"개발의 판타지를 깨는, 저 강철 같은 명랑함!"

[기고] 생명적 대안의 유혹을 느낀다

지율 스님이 지난 1월 말 단식을 중단한 뒤 세상의 관심은 그와 천성산 문제에서 다시 멀어졌다. 하지만 천성산 환경영향 공동조사 결과가 곧 발표되는 데 이어 천성산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머지 않아 나올 예정이니, 지율 스님과 천성산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만금 간척사업과 함께 이 시대 개발주의를 상징하는 천성산 문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복식을 한 지 한 달째가 되는 지율 스님은 지난 2월 18일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다시 세상과 만나 천성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지혜'를 모으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경 진주국제대 교수(국문학)가 이 문제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지율 스님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불편하고, 또 곤혹스럽다. 목숨을 거는 절실함과 국책사업의 막중함 사이에서 방향을 잡는 일은 쉽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래서 이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남이 생명을 건 일에 굳이 잡음을 낼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더불어 생명을 걸 만큼 곧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대개의 사람들은 22분 빨리 가기 위해 산을 파괴하라고 종용할 만큼 자연을 함부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규모 국책 사업에 반기를 들 만큼 자연을 구체적으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는 대개의 사람들이 익명의 다수로 남는 길을 택한다. 스스로를 익명으로 만들고 사건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지율 스님의 단식 이후, 등 돌린 세상의 관심**

하지만 지율 스님의 5차 단식 이후 상황의 변화는 이제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100일을 훌쩍 넘도록 세상이 몰랐던, 그래서 날짜 계산 자체가 유죄인 것 같았던, 기나긴 단식을 지율스님 스스로가 중단했다는 사실과 단식에 대한 세간의 변심이 그 변화의 내용이다. '천성산 지키기'라는 초록의 공명이 어느덧 정반대편으로 울리기 시작하여 세상의 글들이 안티 지율 측에 부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1차 단식이 시작된 2003년 무렵의 애초 대립구도는 '지율 스님 대 한국철도시설공단' 혹은 '천성산 대 터널'이었고, 4차 단식이 중단됐을 즈음 세상은 스님의 입장에 지지를 보냈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정토회관으로 지율 스님을 방문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는 등 세상의 인심은 분명히 지율 스님 편에 있었다. 한때나마 초록의 공명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같았다. 100일이라는 기나긴 단식이 잘 먹고 잘 사는 법에 함몰된 각 개인들의 빗장을 한순간 열어젖혔던 것이다.

물론 단식 자체를 의심하거나 일개 비구니가 국책사업을 가로막고 있다는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생명을 건 호소에 대한 절실한 공감이 세간을 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이다. 도롱뇽 수 놓기와 도롱뇽 소송인단 결성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지지와 함께 초록이라는 동색으로 온 세상이 물드는 듯했다. 오직 생명 그 자체를 위해 생명을 거는 지율의 행보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생명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5차 단식을 중단한 요즈음 세상의 관심은 스톱 모션에 걸려 있거나 애초보다 훨씬 멀어져 있다. 터널 혹은 한국철도시설공단이라는 대척점의 항목이 점점 증식되기 시작한 것과 세간의 차가움은 정확하게 비례한다. 나아가 이제는 이윤과 속도를 골자로 하는 자본주의의 강령 자체가 지율 스님의 대척점에 서 있다. 마치 4차 단식에 보내었던 지지와 갈채로써 생명을 향한 우리의 의무는 모두 이행했다는 듯 5차 단식은 군더더기 혹은 잉여로 치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과 전 문명이 등을 돌리고 있는 지금, 이 사태에도 이점은 있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문제 지점과 문제의 규모가 가장 잘 드러난 순간이기 때문이다. 감동과 갈채에서 비난과 분노로 이첩되는 지점과 지율 스님에 반하는 힘의 실체를 우리는 뚜렷이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동은 한 번으로 족해…'결단'보다는 '침묵'이 쉽다**

지율 스님이 맞서고 있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윤리라면 그에 대한 동의는 곧 생활세계와 문명 전체를 다시 성찰해야 하는 일이 된다. 스님의 진정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 전체를 새로운 영역에 내려놓는 일, 즉 자신이 떠받치고 있는 태산 같은 삶의 무게를 옮겨놓는 일을 의미한다. 즉 문제의 규모는 각자의 전 인생과 당대 전체가 짊어진 태산인 것이다.

문명의 무게는 근대 이래 이미 우리 몸에 각인돼 있는 오랜 무의식을 이룬다. 우리를 호명하는 근대적 개인이란 관념에는 이미 자연의 도구화와 인간이라는 특권적 위치에 대한 자의식이 각인되어 있다. 이 점에서 지율 스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약속을 못 지킨 죄로 세세생생 곤충으로 태어나 목말라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스님의 고백에도 근대적 자의식은 숨어 있다. 곤충 되기가 지은 죄에 대한 벌로 배치되어 있다. 이런 참담한 배치에 실망한 곤충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현실은 물론이고 현실의 배후를 이루며 우리 자신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까지가 스님이 맞서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저 청계천이 증명하듯 자연은 파괴의 대상일 뿐 아니라 복원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환상까지 현실화된 요즈음, 이러한 자의식의 갑옷은 더욱 완강할 따름이다.

세상의 인심이 등을 돌린 이유의 일단을 일차적으로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숭고한 감동은 단 한번으로 족하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감동은 일회적인 숭고함일 뿐이다. 이 감동에 되풀이 감염된다는 것은 곧 우리 삶을 되돌려보기로 결심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목숨을 건 행보에 동참한다는 것은 생명에 값하는 결심을 요청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거나 앞으로 누릴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가능성을 전부 무로 돌리는 일이다. 따라서 공명의 문은 한없이 좁을 수밖에 없다.

지율 스님과 천성산, 그리고 한국철도시설공단과 터널이라는 상징대립의 뒤에는 이토록 무거운 태산의 선택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천성산으로 걸어가는 길은 태산을 되돌리는 일이고 가만히 침묵하는 것은 곧 터널을 수락하는 길이다. 우리의 침묵은 고속철도공단의 사업을 재개하게 하는 신호인 셈이다. 천성산 혹은 지율 스님이라는 좁은 문의 반대편에는 이토록 편리한 침묵의 대로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침묵은 곧 '경제 판타지'에서 깨고 싶지 않은 우리의 자화상**

침묵은 곧 한국철도시설공단 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일이기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우리는 그 트랙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개발주의자의 테제를 따르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요청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쉬운 선택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침묵의 배후에는 으레 우리를 안도하게 만드는 교환가치가 있다. 그야말로 침묵은 금으로 계산되는 셈이다. 개발과 성장의 비전, 국익의 판타지 등이 그것에 후광을 부여한다. 이 비전과 판타지는 숱한 숫자를 동반하기에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구체성을 가진다. 환상을 뒷받침하는 숫자의 힘은 그 환상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 숫자의 판타지야말로 안티 지율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엔진 역할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센' 자본의 위력 아래 생명과 윤리의 상징이 손해라는 악덕으로 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터널은 곧 이윤이라는 정의는 새로운 현실을 생산한다. 정부와 공단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고 돈을 들였기에 그에 반하는 지율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하는 주적이 된 셈이다. 그 결과 생명윤리의 전파자는 손해라는 악덕을 추동하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된다. 지율 스님은 무한히 질주해나가야 하는 잉여가치의 속도에 발을 거는 장애로 재배치된다. 초록의 공명이라는 어제의 감동은 서슬 푸른 오늘의 분노로 변색된다. 성장에 태클을 거는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이 스님을 향한 과격한 목소리를 주조하는 것이다.

하여, 우리가 애초에 맞닥뜨렸던 '지율 스님 대 한국철도시설공단'의 대립구도는 이제 '스님 대 자본'의 구도로 전선이 이동한다. 단식이라는 부드러운 죽음보다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가 절실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전선의 규모가 고속철도공단일 때와 태산 같은 문명 전체일 때는 그 싸움의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남 몰래 이루어진 5차에 해당하는 이번의 단식과 그 중단의 과정은 싸움에 임하는 방식의 변화에 대한 하나의 징후로 느껴진다. 120여 일에 걸친 단식 끝의 고통 한가운데서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만화영화 주제가로 농담을 거는 지율스님에게서 중단 있는 전진의 틈과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소진하는 단식은 숭고함과 무력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국민의 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스님의 의지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스스로를 소진시켜야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은 개인이라는 존재의 무력함 또한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단식 수행 역시 생명 혹은 개인을 소모재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의 욕망에 함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단식수행으로 초록의 공명이 전 세상을 뒤덮는다 하더라도 그 수행이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죽어서 다시 사는 역설 너머를 꿈꿀 수 있게 하는 지율 스님의 입지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지율 스님의 새로운 길**

죽음에 이르는 단식의 위험은 죽음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도구적 생명관과 애도의 정치성에 있다. 순교와 살신성인의 계보학이 가리키듯 그의 단식 또한 도롱뇽을 비롯한 숱한 생명붙이들에 바치는 숭고한 희생으로 길이 애도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애도의 의례는 한시적이고 선택적으로 전유되기 마련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애정의 대상을 상실한 후 다른 대상으로 전환하기까지 주체가 보이는 의식적인 반응이다. 고인의 뜻을 받들어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자로 정리되는 애도의 의례는 상실에서 새로운 시작에 이르는 경로를 너무 쉽게 공식화하는 경향이 있다.

희생과 죽음, 그리고 애도의 트랙에 정치성의 혐의를 두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는 일과 개발주의자에게 동의하는 일이 동시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애도의 의례가 품고 있는 이런 가능성 때문이다. 자신을 미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인하는 것 같다는 권력에 대한 지율의 표현은, 그 또한 이 위험을 예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식이 권력의 유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그 유인의 다음 수순이 죽음과 애도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지율 스님은 세상을 버림으로써 세상을 구원한 죄 없는 성인들과 다르고 또 다르기를 바라며 달라야 한다. 스님은 '규범적인' 운동가가 아니라 '수행적인' 운동가이며 수행중인 운동가이기도 하다. 초록의 공명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직관이며 또 감수성의 혁명이다. 처음에는 단지 산과 생명붙이들을 아끼는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터널 공사 반대 운동에서 청와대와 정부를 겨냥한 것으로, 이제는 자본주의의 기획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녀의 운동 방식은 늘 움직인다.

단식과 그 중단 또한 이런 움직임의 대의 안에 자리한다. 따라서 단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에서 치유와 삶으로 선회한 지율의 행보는 아무리 환영해도 지나치지 않다. 삶으로 선회함으로써 그는 희생과 애도의 트랙 외부에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단식중단은 도구합리성이라는 몸과 정신의 틀에서 벗어나 삶의 복잡성을 승인하는 의미를 지닌다. '천성산에 바친다'로 정리되지 않는 '징한' 삶의 출발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버림으로써 다른 생명을 구하는 역설에서 일탈함으로써 그는 초인의 반열에서 내려오지만 동시에 대지에 속하는 신분을 확실히 부여받게 된다. 우리와 연대할 수 있는 육신의 거점을 분명히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피와 살로 생명의 연대를 만들어나가는 대지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상호성은 몸에 바탕을 둔다. 몸으로 등장하는 타인은 나의 주체성의 거울이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적극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20여 일의 단식 끝에 무섭게 살아나는 그의 생명력은 그의 소속이 대지임을 잘 증명한다.

단식과 죽음, 그리고 애도의 직진 노선을 우회하는 이 어렵고 복잡한 행로야말로 우리를 지율 스님에게로 끌어당기는 틈이고 힘이며 또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터널에 맞섰던 싸움의 시작지점이 알려주듯 애당초 직선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산이 되어 산과 함께, 아니 산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분"이라는 한 소설가의 설명보다, 또한 천성산 일을 하면서 "돌아나갈 길을 만들지 않았다"는 스님 자신의 고백보다, 삶의 편으로 돌아누운 지금의 지율 스님에게로 강하게 견인되는 것이다. 배수진을 치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죄 없는 기투보다는 죄의 편에서 죄와 함께 죄를 사하는 것에서 도리어 능동적 가능성을 읽는다. 설령 그 죄 속에 뒤섞인다 하더라도 죄의 순도는 그만큼 흐려질 것이니 말이다.

***개발에 대한 대안이 개발논리보다 더 유혹적이어야 한다**

개발에 대한 대안이 개발논리보다 덜 유혹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천성산이라는 생명적 대안이 자체의 내용증명 없이 속도와 이윤의 거부로만 정의되어서는 대안의 힘이 현저하게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생명이라는 대안의 내용증명을 시작하는 일일 것이다. 천성산에서부터 문명을 긴장시키는 에너지의 연대를 만들어가자는 말이다. 우리가 서 있는 모든 땅을 천성산으로 만드는 능동적 주체가 되도록 말이다. 천성을 바꾸는 일인 만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중환자실에서 의식혼탁과 감각마비의 와중에서도 만화영화 주제가를 부르던 지율 스님의 일탈은 이와 같은 능동태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단식과 눈물이라는 자기소멸적 능동성이 아니라 생명과 유머로 대지에 발을 붙여 대지를 바꾸어가려는 생성적 능동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120여 일의 단식 끝에 남은 25Kg의 몸무게로도 농담을 걸 수 있는 강철의 명랑성이 그 증거다. 이때의 웃음은 음식과 욕망의 명예회복에 값한다. 늘 가치의 저편에 있던 음식과 욕망이 가치실현에 합류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웃음은 우리를 기꺼이 감염시키고 철갑의 구조를 흔들고 바꾸어낼 수 있는 유력한 에너지이다. 지율 스님 스스로도 즐겁지 않았으면 이렇게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말이다. 바로 이 즐거움을, 죽음과 도구화의 패러다임이 삶과 에너지의 구도로 재배치되는 징후로 읽고자 한다. 누구의 말을 전유하여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운동의 역사는 두 번 생성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유머로.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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