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자리에 있다 보면 한국에서 노사관계 개혁을 추구하는 새로운 프로그램들과 제도들이 이전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한층 강화돼 다채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형식 속에 담긴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한계 상황도 함께 느끼게 된다.
***"왜 정부와 사용자는 노동자의 극단적 투쟁 방치하나?"**
한번은 모 기관의 시찰단과 함께 독일 금속노조(IG Metall)에 간 적이 있다. 우리를 맞이한 독일 노조 측 관계자는 독일의 단체교섭 체계와 현재 독일 노조의 현황과 고민 등을 소개해 주었고, 곧이어 방문단으로부터 질문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국의 모 병원 노조 위원장이 질문을 했다.
"단체교섭을 체결하고도 사용자들이 그것을 어기면 그때는 정부가 나서서 사용자들을 공정하게 처벌하는가?"
이 질문에는 그 동안 사용자들로부터 약속을 파기당하며 불이익을 입고 정부에 하소연했다가 냉담한 반응을 경험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억울함과 분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독일 노조 측 관계자는 "협약을 체결했는데 왜 그것을 어기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거기에는 도저히 그런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이어서 그 관계자는 그 동안 여러 차례 한국의 노사관계에 관해 듣고 TV를 통해 노동자들이 격렬하게 시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풀지 못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며, "왜 한국의 정부와 사용자들은 도대체 노동자들이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시위를 하는 지경으로까지 사태를 방치하는가?"라고 방문단에게 물었다.
이 질문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왜 노조의 불법시위에 용단을 내리지 않는가?"라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 관계자의 질문의 핵심은 "왜 타협과 조정을 통해 극단적인 사태의 도래를 막지 못하는가?"였다.
한국 측 질문자나 독일 측 관계자나 너무나 상이한 두 사회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우문'을 던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통역 석에 앉은 나는 양 측의 차이를 곰곰이 헤아려 보게 되었다.
***독일 노동사회의 전통, '법'보다 '자율'이 우선**
독일 노사관계는 소위 '단체교섭 자율주의(Tarifautonomie)'라는 원칙이 금과옥조로 그 제도의 핵심에 자리해 있다. 그것은 쉽게 말해 "국가가 노사 간의 단체교섭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임금과 고용 조건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정한다"는 원칙이다.
한국의 맥락에서 바라보면 어쩌면 이러한 원칙이 문자 그대로 작동한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럼 악성 노사분규가 장기화되어 국가 경제의 막대한 손실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하는 질문이 곧바로 제기될 것이고, 노동부 장관의 긴급조정권이나 파업이 금지된 특수공익사업장의 분쟁 등의 이슈도 뒤따라 나올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객관적인 통계가 드러내듯 세계 그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산업 평화가 장기간 잘 유지되어 온 나라이며, 생산력과 산업민주주의 양자 모두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나라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뮐러-옌취의 표현대로 안정된 제도적 기제를 기반으로 한 노사 간의 '갈등적 파트너십(Konfliktepartnerschaft)'이 그러한 긍정적인 결과를 이끈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독일의 노사가 높은 갈등 해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지난 반세기 동안 수십 만 개의 단체협약을 기업, 지역, 산업, 업종 등 다양한 수준에서 체결하면서 노사 각각이 시스템의 성숙하고 책임 있는 주체로서 국민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비결을 거기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러한 노사관계의 성립은 법이 엄정 중립의 자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노사 양자 간의 세력 균형과 자율 해결을 잘 육성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법대로' 사회와 '알아서' 사회**
법률이 강제성을 지니는 규제(regulation)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면 교섭은 자율성을 지니는 조정(coordination)의 성격을 띤다. 사회적 질서(social order)는 국가가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는 규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크고 작은 사회세력들 간에 조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전자에 의존하는 사회는 '딱딱한 사회'이고 후자에 의존하는 사회는 '부드러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또 전자는 소위 '법대로'(rule of law)가 강조되는 사회로, 법의 논리의 사회 각 영역으로의 확장과 그 적용의 일관성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알아서'(autonomy)가 강조되는 사회로서, 법의 논리를 원칙 수준에서만 최소화하고 사회 세력들 간의 자율적인 타협과 조정에 의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 가는 사회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은 전자의 대표적인 나라, 독일은 후자의 대표적인 나라로 보인다. 따라서 앞서 한국 방문단의 질문자는 '법대로'의 정신이 지배적인 규제의 세계에 대해 물었다면, 독일 측 답변자는 '알아서'의 정신이 지배적인 조정의 세계에 대해 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대로'의 논리는 사실 법치의 원리가 국가로부터 악용되는 체제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 긍정성을 지닌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고 그 자체로 일관된 합리성을 지니는 속성을 끝까지 추구하다 보면, 강자가 법의 논리 위에 군림하는 것을 법의 이름으로 제어하는 효과를 갖게 된다. 따라서 독재국가나 약탈국가(predatory state) 등 법의 합리성 대신 주먹과 편법이 앞서는 사회들에서 '법대로'의 논리는 나름대로의 진보성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법대로'가 강조되는 사회는 사회적 관계를 매우 딱딱하게 만들고, 규제의 성찬 속에서 법에 의해 지배되는 객체화되고 미성숙한 국민들만 양산할 수 있다. 나아가 규제주의는 제3자의 개입을 강조하게 되고, 이는 양자 간에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비용을 높인다는 면에서도 부정적이다.
***지금 우리는 '규제'가 모자란 시대인가?**
'법대로'의 원칙 보다 '알아서'의 원칙이 보다 강조되는 사회가 보다 진화한 사회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규제가 최소화되고 성숙한 사회 구성원 간의 조정과 합의에 의한 갈등해결이 우선시 된다. 당연히 갈등의 해결비용도 높지 않다.
물론 '알아서'의 원칙이 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다. 사회 세력 간에 상당한 수준의 신뢰자본을 공유하며, 상대방의 입장과 이해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향후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정치가는 우리 사회를 '법대로'의 경직성에서 한 차원 높여 '알아서'의 부드러움으로 이끄는 자일 것이다. 이제 글을 마치면서 자문해 본다.
"과연 지금 우리는 아직도 엄정한 규제가 모자란 시대를 살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는 자율적인 조정의 미학에 의지해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체화하는 사회를 꿈꿔야 할 때일까?"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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