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한국, '말잔치'에 그치면 곤란하다"

기술 패러다임의 미래를 찾아서 <10ㆍ끝> 패러다임 전환기의 과학기술 정책

이번 글을 끝으로 10회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연재해왔던 내용 중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과 관련된 내용을 종합, 요약해 보았습니다. 필자.

***패러다임 전환, 지연과 위기**

박정희 정부 하에서 추진되었던 국가 주도, 자원 동원형 계획경제 성장 모델은 세계적인 유례가 없을 정도의 고속성장과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빠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경제성장에 못 미치는 시민사회의 성숙,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상대적 후진성, 그리고 만성적인 분배 불평등이 있다. 지난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성장 제일주의, 정치적 후진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대중적 욕구의 분출이었으며 낮은 차원에서나마 시민사회의 생성, 그리고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민주주의의 일반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여전히 성장 일변도, 자원 동원형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1990년대 전반에 걸쳐 경제위기론이 심심찮게 거론된 배경에는 분배의 개선, 시장경쟁의 본격화에 따른 기업 경쟁력의 약화가 놓여져 있었다. 기업경쟁력의 원천이 국제적 수준의 기술혁신과 지식생산으로 이동하는 한편, 시장경쟁의 활성화를 통한 혁신과 변화의 촉진이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은 규모의 경제와 자원 집중형 경영전략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급격한 분배구조의 변화가 곧 기업 경쟁력의 약화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과 정부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기 보다는 고임금을 경쟁력 약화의 주범으로 지목하거나 혹은 낮은 이자율의 해외차입금에 의존한 규모 확대에 열중했다.

***위기,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

불행하게도, 90년대 이후 빠르게 성장한 국내 시장 수요에 대해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선택한 전략은 해외의 낮은 금리를 이용, 규모의 경제와 시장선점을 통한 시장지배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과도한 부채비율, 낮은 이윤율, 그리고 과잉 중복투자와 이를 가능케 했던 금융시장의 완전개방은 환란의 도래가 단지 시간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IMF 환란은 위기였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행, 전환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산고(産故)를 요구한다. 무엇보다 기존 패러다임에서 지배적인 위치,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 세력, 조직들은 새로운 변화에 대해 저항하게 마련이며 구 패러다임의 저항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물적토대에 위기가 오지 않는 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과학기술 변화의 패턴에 적용한 개념이 바로 Freeman의 'Sailing Effect'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IMF 환란은 구 패러다임의 붕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을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나 2000년에 들어서서도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 체질은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대기업 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시장질서, 경쟁국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기업들의 R&D 투자, 그리고 후발주자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기술-경경전략, 혁신창업을 가로막는 수직적 분업구조 등, 구 패러다임의 기본질서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와 IMF가 선택한 해법은 신자유주의라는 구호를 앞세웠지만 시장경쟁의 활성화도,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강화도 이루어내지 못한 채 80년대 구 패러다임을 더욱 완강하게 지속시켰다.

뿐만 아니라 IMF를 경과하면서 국가의 역할은 대폭 축소되거나 축소할 것을 요구받았고, 그 자리에 시장질서, 개방과 경쟁의 논리가 대신 들어섰다. 하지만 시장과 경쟁은 정부개입을 제거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기존의 대기업 지배, 수직적 분업구조, 미-일을 축으로 하는 기술적 종속성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시장이나 경쟁을 통한 혁신은 불가능하다. 경쟁과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시장질서의 핵심은 혁신기업의 진출입이 자유로울 때, 그래서 기존의 시장질서가 끊임없이 교란될 수 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한 기술과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 보장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8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기초과학, 중범위 기술군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기술혁신과 관련된 각종 유인책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장에서 기술혁신이 지지부진했던 이유, 대기업들의 기술역량이 원천-기반기술에서 여전히 미-일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져야 한다. 대기업 위주의 시장구조, 대기업의 자원 집중형 경영전략이 변하지 않는 한 혁신적인 패러다임 이행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대단히 늦어진다. 이는 결국 과학기술 정책이 단순히 지식생산과 확산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 시장구조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도 정부는 대기업 위주의 시장논리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기술정책의 패러다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80년대 이전까지 사용해왔던 국가의 직접개입을 통한 산업정책, 국가가 전적으로 도맡아 추진해왔던 과학기술 투자를 넘어서서 시장이 갖고 있는 유연성, 혁신성을 높이면서도 국민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창출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한 정책수단과 기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장의 지배, 저항할 수 없는 힘**

근래 들어 경제, 기술, 교육 전반에 걸쳐 부쩍 심해진 시장논리, 일개 기업이 국가의 정책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경제, 정책, 과학기술에서의 대안 패러다임 부재가 놓여있다. 국가와 정부의 전략적 선도, 기획능력이 없다보니 남아있는 대안은 "경제문제는 전적으로 시장에 일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주장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기업의 경쟁력은 곧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뒤에서 보겠지만, 논리적으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 역량부족을 미화하기 위한 수식어에 불과하다. 특히나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지배적인 현실 앞에서 기업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신고전파적 이상세계를 전제하지 않는 한, 아주 위험한 미신일 뿐이다.

기업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해법과 개별 기업의 경쟁력 확보에 대한 요구가 서로 대립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보자. 국가 경쟁력은 지식을 포함한 혁신역량, 노동력과 삶의 질, 소비역량이라고 정의 가능하다.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 및 가격 우위를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기업의 수익성은 최종적 결과로 드러난 기업 경쟁력의 총합이다. 그러나 개별 기업의 최대 수익성 관점에서 삶의 질, 그 삶의 질을 결정하는 소득수준 상승은 비용상승으로 간주되며, 국가 혹은 산업 차원의 시너지 효과가 완벽하게 제거되거나 혹은 최소화 될수록 개별 기업에게 유리해진다. 이에 반해 국가 경쟁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기술이 가져올 산업연관 효과가 크고 긴밀할수록, 해당 기술의 고용창출 능력이 크면 클수록 국가경쟁력은 높아진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산업연관 효과를 최대화하는 동시에 고용 및 소득 수준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책적 개입, 경제 시스템 전반의 설계야말로 기업 경쟁력의 강화를 국가 경쟁력 강화로 연결하는 핵심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글로벌 시대 한 나라의 과학기술 정책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과학기술 변화에 있어서 수요와 공급의 역할**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된 가장 근본적인 쟁점 중 하나는 기초과학-응용과학 분야에서의 선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공급측 문제의식과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학-산 기술이전을 통한 수요-공급의 효과적인 조정이 필요하다는 수요측 입장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러한 쟁점에 대한 분명한 답변은 제시되지 않았으며 입장에 따라 어느 일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혹은 "적절한 조화"의 필요성을 원론적으로 되풀이 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수요측 요인을 강조하면서 학-산 기술이전의 문제를 강ㄹ조하게 될 경우 장기적인 기술적 성장잠재력을 잃을 위험이 높은 것은 물론, 아주 이상적인 시장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경우 국가가 나서서 시장 수요 지향의 과학기술 정책을 펼칠 경우 기업들 스스로의 혁신, 기술 경쟁력을 가로막을 위험이 대단히 높다.

이에 반해 공급측 요인을 강조하면서 과학적 토대, 기초기술을 강조하게 될 경우에는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사장될 위험이 대단히 높다. 기술적 우위는 과학이론의 우월성이 아니라 시간, 비용, 성능, 그리고 범용의 범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변화의 패턴이 특정 산업의 생명주기(life cycle)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중간항, 즉 산업구조가 만들어내는 동학의 결과이다.

***국가혁신체제(NIS)론의 의의와 한계**

현재 OECD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NIS론은 바로 위와 같은 경제적 조건, 과학기술학의 전반적 이론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과거의 성장 패러다임은 사멸했으나 과거의 시장 지배자들은 그것을 넘어설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 혁신을 주도하지 않는 상황, 대안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황,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행하는데 있어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은 절감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국가의 부족한 정책 설계역량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 참여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그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NIS론은 시장의 논리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국가적 차원의 지식-기술 발전의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방어막을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 클러스터 형성, 지식생산 및 교류를 위한 제도적 기반구축, 그리고 무엇보다 NIS론이 강조하고 있는 지식생산과 학습의 영역은 시장의 논리가 아닌 시스템의 논리, 국가적 차원의 조정이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NIS론은 지난 10여년간의 경험을 통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듯이 제기되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하기 보다는 새롭게 제기하는 질문이 더 많으며, 과학기술 전략 혹은 정책의 유효한 대안을 제공하는 데에서도 많은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NIS론의 핵심은 과학정책이나 기술정책을 이어주는 매개항으로 혁신 시스템을 상정한 후 혁신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주체와 기능을 정의하는 것,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상이한 주체들의 행위패턴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조정의 필요성, 그리고 시스템 내 구성요소들의 위치선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시스템 수준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혁신 시스템의 중핵은 기업들의 R&D행위이며 기업간, 기업-대학, 기업-사용자간의 상호학습 과정이 혁신 시스템의 전체적인 진화패턴을 결정한다고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혁신 시스템의 발전과정은 시장 내에서 움직이는 기업들의 상호적응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기 진화적, 자생적 결과이기에 외부적 개입이나 사전 설계의 개념을 거부한다. 정부의 역할은 설계가 아니라 조정, 거점구축을 통한 육성이 아니라 간접 유인체계를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NIS론은 혁신 시스템을 시장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동시에 시스템 진화의 핵심동력은 개별 기업들로부터 찾는다는 점에서 이론내적 긴장은 물론 정부 정책의 전략적 개입 가능성을 거의 전적으로 배제한다. 그 대신 혁신 시스템을 구성하는 이질적인 행위주체들에 대한 거버넌스, 즉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조정과 중재 역할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NIS를 요약하자면, 전략설계(strategic architecture)의 부재와 조정(coordination)의 과잉, 장기 유인체계의 무력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운용되고 있는 NIS론의 경우에는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본래 NIS론자들에게 있어서 클러스터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육성되는게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정부의 클러스터 정책은 자생적 클러스터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missing link를 찾아서 이어주거나 혹은 그 발전의 속도를 빠르게 앞당길 수 있는 유인체계를 제공하는 것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NIS론은 왜, 언제,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매개로 삼아 클러스터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경제 연구소가 주창하고,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산업정책에 적용된 NIS론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산업 클러스터”를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이들이 주장한 클러스터 형성의 핵심요인, 즉 “집적, 그리고 조정과 연결”만으로는 클러스터를 만들지 못한다. 설령 기업과 연구소가 특정 지역에 집적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 집적에 불과할 뿐 클러스터의 가장 큰 장점인 시너지 효과, 산업연관 고리를 따라 만들어지는 강력한 패러다임 효과 역시 창출하지 못한다. 성공적인 클러스터 육성을 위해서는 기술 경제적 조건, 인접 산업의 성숙도에 따른 시기설정, 클러스터 발전단계에 따른 적절한 정책대안이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그 기본 분석 및 설계단위는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부문, 학제적 차원이어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기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

올 상반기까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유행어는 클러스터였지만 하반기에 들어서서는 블루오션이 대단한 유행어로 등장하고 있다. 블루오션이란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그 시장에 대해 독점적인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을 지칭한다. 그러나 블루오션 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시장, 그 누구보다 뛰어난 원천기반 기술을 가질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블루오션은 다가오는 BT, NT, CT시대의 도래, 패러다임 전환에의 요구와 딱 맞아 떨어지는 단어이다. 유행어라는 게 본래 시대의 흐름을 탄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블루오션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시장경쟁의 효율성을 믿는다면 미발견의 광대한 처녀지란 없다. 제 아무리 우수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시야를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해도, 기술의 새로움 그 자체만으로는 블루오션을 만들 수 없다. 블루오션은 수요의 변화와 기술적 가능성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심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창조적인 전략에 의해서만 만들어 질 수 있다. 슘페터의 창조적 기업가는 그 깊은 심연을 가로질러 외나무다리를 놓는 자이며, 후속하는 자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다리를 더욱 넓고 튼튼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기술 혁명은 패러다임 전환, 혹은 블루오션을 창조하는 천재적인 개인, 혁신적 기업가가 나타나기 위한 조건으로 국가의 전략적 개입을 요구한다. 기술혁신은 하나의 장비나 제품의 수준이 아니라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대 중요 기술들의 70퍼센트 이상이 적어도 두 학제 이상의 지식, 두 산업부문 이상으로부터 그 부품을 공급받고 있다. 이렇듯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신천지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지식기반 구축, 산업 및 소득분배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물론 이런 패러다임 변동은 진화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이 아니라 급격하게,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전면적으로 진행된다.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바로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패러다임 변동을 고용창출, 소득분배의 형평, 그리고 보다 경쟁적인 시장구조로 연결하기 위해 패러다임 이행과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이 곧 전략적 기술 설계의 과제가 된다.

***전략설계로서의 과학기술 정책**

패러다임 이행을 위한 국가의 전략적 기술설계는 과학 연구역량의 발전과정에서 Focusing device(특정한 방향과 중심과제, 진화의 거점)를 제공하는 것, 고용, 분배구조, 그리고 문화적 특성에 따라 몇몇 중요한 기술 시스템들을 중심으로 융합거점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혁신 기업가(Technopreneurship)들이 새로운 시장에 활발하게 진입할 수 있는 기술-경제적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시장구조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 여기에 글로벌 시대가 전면화 됨에 따라 국가 과학기술 정책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있다.

첫째는 R&D 국제화이다. R&D 국제화는 연구소들의 국제적 협약이나 유수 연구기관의 국내유치 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끄는 중요한 학제간, 산업부문간 융합 잠재력이 큰 국제 R&D 컨소시엄 프로젝트를 기획,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R&D 국제화가 감당해야 할 진짜 과제이다. R&D 국제화는 국내적 산업 연관망과 국제적 분업구조망을 설계, 연결하기 위한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사전포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측면을 감안한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기관과의 협력만을 추구하기 보다는 우리보다 낮은 기술력을 갖고 있다 해도, 미래의 기술수요가 풍부하게 존재하는 국가나, 기업, 연구기관들을 대상으로 연구협력을 진행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간관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과 관련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과학 기술 정책은 일관 통합 시스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조정이 아니라 설계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정상적인 시기의 과학기술 정책은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이어주거나 부처 간, 연구집단 간, 산업 및 기업 간 이해갈등을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패러다임 이행기에는 전략설계와 이 설계가 실현될 수 있는 거점을 국가가 나서서 창조, 육성해야 한다. 이 시기 중요한 과제들은 주어진 시장 내에서 활동하는 개별기업들 차원이 아니라 시장 구조 그 자체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며, 없는 시장을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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