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안전하다는 일본 정부의 말만 믿었다"

[함께 사는 길] 청소년 탈핵운동가가 전하는 그날의 기억

저는 칸노 한나라고 해요. 저는 일본의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났어요.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한 가족이에요. 제 고향 후쿠시마에는 맛있는 과일, 야채, 라멘이 있어요. 저희 집에서도 야채나 유자를 기르고 있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이 정원에 나가서 물을 주고 기르는 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산도 있고, 바다도 예쁘고, 공기도 좋아서 어릴 때는 밖에서만 놀았어요. 정말 재미있는 생활을 후쿠시마에서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 저의 행복한 생활이 단숨에 변화시킨 사건이 있었어요.

2011년 3월 11일 그날의 기억

2011년 3월 11일에 일본의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지진의 강도는 최대 진도 7을 기록한 대지진이었어요. 그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그날 아버지는 일이 있어서 회사에 계셨고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저는 같이 학교에 있었어요. 진동을 느껴서 바로 선생님한테 달려갔어요. 3분 정도 큰 지진이 계속 지속됐던 것 같아요. 천정도 무너지고 책상도 넘어지고 생명에 위협을 느꼈어요. 아직도 그때의 공포심은 잊을 수 없어요. 지진이 멈추고 저와 제 친구들은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그때는 3월이었는데 밖에는 눈이 왔고 너무 추웠어요. 그 이후에도 지진이 몇 번 계속되었는데 다행히 저와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집 안 가구는 쓰러지고 식기는 떨어져서 깨진 상태였어요. 정말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고 지역과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할머니 집으로 가서 보내기로 했어요. 다음 날은 제 생일이었는데 축하하는 상황이 아니어서 너무 슬펐어요. 그날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에 알게 된 사실은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저희의 행복한 생활을 변화시킨 일이에요.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당시 핵발전소는 1, 2, 3호기가 운전 중이고 4, 5, 6호기는 검사 중이였어요. 지진이 일어나서 1, 2, 3호기는 자동 정지했고 바로 비상용 발전기가 가동했어요. 하지만 지진 발생 50분 후에 높이 15미터 정도의 쓰나미가 발전소를 덮쳤고 지하에 있는 비상용 발전기가 바닷물에 잠겨서 기능이 정지됐어요. 또 전기 설비, 펌프, 연료 탱크, 비상용 배터리 등 모든 전원이 고장 났어요. 이 때문에 펌프를 기동할 수 없게 되었고 핵연료 냉각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스스로의 열로 녹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 2, 3호기는 수소가 대량 발생해서 건물의 각 내부에 수소 가스가 가득 차서 1, 2, 3, 4호기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어요. 4호기는 정기 검사중이었는데 3호기로부터 급전 정지와 함께 개방 상태였기 때문에 비사용 가스 처리 계통 배관을 통해서 충만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 때문에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와 바다, 지하수에 방출하는 큰 사고가 일어났어요.

그 결과 후쿠시마도 오염되었어요. 저와 언니에게도 이상 현상이 일어났어요. 저는 코피가 계속 나왔고 언니는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어요. 하지만 사고 당시 핵 문제나 방사능에 대해서 부모님과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방사선에 의한 피해는 없다"는 일본 정부의 말만 믿었어요. 하지만 뉴스를 보면서 점점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핵발전소에서 300킬로미터 이내의 구역은 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집은 핵발전소와 6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어요. 그 당시 외국에서 온 분들은 귀국하라는 명령이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부모님은 위험한 후쿠시마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하셨고, 사고가 일어나고 5개월 후에 교토로 피난했어요.

▲ 칸노 한나 양은 2019년 12월 14일 환경운동연합이 진행한 '청소년 탈핵X 기후위기 잡담회'에 참여해 자신이 일본에서 겪은 핵발전소 사고와 탈핵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환경운동연합

행복을 앗아간 핵

교토에 와서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을 만나는 것, 말하는 것, 학교 생활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웠어요. 새로운 학교에서는 후쿠시마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바보 취급을 당했어요. 처음에는 저의 말투가 다르다는 것을 가지고 사투리를 흉내 내며 놀렸고 후쿠시마로 돌아가라고 말했어요. 저처럼 후쿠시마에서 온 학생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한 학생들이 많아요. 한 학생은 방사능이라 불리고 괴롭힘을 받아 자살을 했어요. 만약에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서 계속 후쿠시마에 살았다면 이런 힘든 일은 없지 않았을까? 저는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 왜 내가 이렇게 힘든 상황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핵발전소사고나 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부모님은 "엄마랑 아빠가 더 빨리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라고 후회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핵이나 방사능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은 핵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에요.

암 환자 느는데

후쿠시마에서도 대표적인 큰 사건이 있었어요. 후타바 병원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가 나고 3월 12일에 1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피난 지시가 내려졌어요. 후타바 병원에서는 436명이 피난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피난은 4일 후인 16일에 완료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과정은 이랬어요. 먼저 병원에 오는 자위대가 입는 보호장비가 도착하지 않아 24시간 이상 늦어졌어요. 보호 장비가 병원에 도착하고 2일 후 14일에 피난이 시작되었어요. 먼저 132명이 피난했는데 그때 이미 6명이 죽었어요. 버스를 타고 피난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방사선량이 높고 환자들과 의사들은 식사도 못 하고 치료도 못하면서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피해가 컸어요. 그 이후에도 피난이 계속 되었고 방사선량이 상승하여 자위대에게 후쿠시마를 떠나라는 피난 지시가 내려지면서 환자들 피난이 중단되거나 환자가 내버려 두고 가버리는 일이 있었어요. 피난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많은 환자들이 죽어 있고, 버스 안에서는 사체 냄새가 심했던 것 같아요. 피난이 진행된 4일 동안 44명이 죽었어요. 이 44명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희생자에요.

저는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사망자가 나오는 위험한 핵발전소에 대해 알면서도 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왜 핵발전소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이것이 다 돈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큰 쓰나미가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발전소를 설계해야 해요. 하지만 그렇게 공사를 진행한다면 많은 비용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도쿄전력은 경영의 악화를 두려워해서 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계속 발전소를 건설했어요. 이런 사실이 있지만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재판에서는 "기억이 없습니다"라는 말만 했어요.

일본 정부와 정치가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자기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는 매우 실망했어요.

우리 집은 핵발전소에서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지역이라 피난 지시가 안 내려졌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자발적 피난자로 분류되었어요. 하지만 위험하고 피난해야 되는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현재 후쿠시마에는 18살 이하의 갑상선 암 환자가 230명 이상 있고 암이 의심되는 아이는 280명 이상 있다는 발표도 있어요. 어른들도 갑상선 암에 걸린 분들이 많아요. 암 때문에 학교나 직장을 그만 두시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이런 피해가 나오고 있는데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 사고와의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 가족을 비롯해 현재 174명이 함께 도쿄전력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8년 3월에 첫 판결이 나왔는데 부모님은 피해의 일부분을 인정받는데 언니와 저는 인정받지 못했어요. 핵발전소 사고와의 관련성이 없다고 일본 정부가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현재도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현재 후쿠시마 땅에 방치되어 있는 방사성폐기물이 엄청 많아요. 저희 집 근처에도 많이 있었어요. 방치되어 있는 폐기물은 2018년 시점으로 2200만 자루라고 해요. 그 자루를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보관지는 1100개소가 있고, 집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에 보관하는 보관지는 13만7000개소가 있어요. 방사성폐기물을 담은 자루를 일본어로는 ‘후레콩밧쿠’라고 하는데 이 안에는 방사성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자른 나무 등이 들어가 있어요. 이것들을 다 방사성폐기물이라고 해요. 근데 이 방사성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이것들은 다 처리할 수 없어요. 일본 정부는 이런 폐기물을 건설이나 건축에 사용한다고 결정했어요. 이런 방법을 진행한다면 아마도 방사성폐기물 집이 생길 것이고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이런 계획을 제안한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일본 국민들 중에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가 8년이 지나가면서 이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또 자신은 후쿠시마 시민 아니어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현재도 피난을 하고 싶어도 못 하고 있는 후쿠시마 시민들도 많고 피난은 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해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미 일어난 사고는 어쩔 수 없지만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한국에 왔어요. 어머니와 저는 후쿠시마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후 여러 번 전학을 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환경에서 살며 많은 것을 참으며 지내야만 했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어디 고등학교에 갈까 고민하다 한국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어요.

근데 가끔 후쿠시마에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나요. 여러분의 친한 친구가 방사능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데 하지 못 하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핵 그리고 방사능은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서서히 혹은 빠르게 죽음으로 몰고 갈 거예요. 일본에는 54개의 핵발전소가 있어요. 한국에도 24개의 핵발전소가 운영 중이에요. 한국에서 사고가 일어나서 방사능이 방출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들부터 행동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해요. 핵발전소를 없애기 위해 전기 사용을 줄이거나 스스로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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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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