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비슷하게 인상 비평부터 하자면, 정권이 조바심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임 정책실장 임기가 8개월을 넘지 못했다고 하니 분명 정상 상황은 아니다. 정교한 계획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터, 갑자기 판단을 바꿀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무언가 급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경제정책의 브랜드인 소득주도성장은 반대 진영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일자리도 성과라 할 만한 것이 변변치 않다. 경제 성과를 대신하던 남북문제도 지지부진, 내년 총선에 대비해야 한다는 정권 내의 압박도 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권의 사정일 뿐, 우리 사회 또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 차원에서는 평가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관점은 딱 하나, 그리고 늘 같다. 구성원들의 삶이 골고루 나아지고 행복해질 것인지 하는 것이다. 지금 정권은 이런 관점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정권이 탄생한 경과와 이유가 그러니, 우리는 이 정권에 '초심'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믿는다. 게다가 주권자로부터 권력을 위탁받은 것으로 치면 이번만큼 민의에 충실해야 할 정권이 없다. 길게 말할 여유는 없으니, 그 '초심'과 민의를 토대로 책임을 다시 정비할 것을 권고한다.
사실, 이 '논평'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비슷한 주장을 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의 '권력'이 약하다는 의미이리라. 이번에도 다시 가다듬고 할 일을 하자고 말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되풀이하는 것은, 정권의 안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시민과 인민(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포함하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그 전환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정책의 목표를 재조정하라. 소득주도성장이니 일자리니, 또는 혁신성장과 공정경제가 다 무슨 소용이랴.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을 바꿔서 무슨 무리를 할지 걱정이 앞선다. 악마는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라'라는 데 있다. 무슨 성과를 어떤 방법으로 내겠다는 것인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은 이 모든 성과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 때까지 소득 불평등이 줄고 자영자의 살림이 나아지며 일자리가 늘어날 묘수가 있는가? 게다가 한 가지도 아니고 한꺼번에. 필시 무리가 따르고 이상한 개입이 있게 마련이다. 온 나라를 다시 공사판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적 차원에서 경제 환경이 달라졌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뭐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관료와 언론과 교수들은 20년째 아무런 대안 없이 시장 논리와 규제 완화를 주문처럼 외고 있지 않지만, 정권의 역할은 그 차원의 (근거도 의미도 없는) 정책 대안을 내는 일이 아니다.
공동체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면, 왜 쾌도난마(快刀亂麻)의 해결책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경제구조를 개혁해야 하면, 예를 들어 자영자의 비중을 줄이되 연착륙이 필요하면, 왜 그 계획을 말하고 사회적 동의를 끌어내려 하지 않는가?
지금 방식으로(아주 전통적인!) 괜찮은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 OO형 일자리로 몇 군데는 성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그냥 사례에 지나지 않을 뿐 '국가적'으로는 다르다. 국가는 구조적이면 동시에 추세적이다.
20년째 해온 말 그대로 '구조개혁'이 필요하면, 필요한 것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치'다. 진즉 해야 했을 말, 옛날식의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책목표임을, 이제라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같으면 '폭탄 돌리기'가 따로 없다. 다음 정권, 다음 정부, 10년 뒤, 아직 이해도가 낮아서…. 모두 면피의 말과 행동뿐이다. 그도 아니면 익숙한 옛날 처방만 되풀이한다. 더 자유로운 시장, 더 완화해야 하는 규제. 대안은 오로지 한 가지 더 자유로운 시장뿐이다.
누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첫발을 뗄 것인가? 지금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경제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결론을 내지 않아도 좋으니, 토론과 논쟁으로 사회적 학습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정책은 또 어떻게 할 참인가? 예상하건대, 앞으로도 교육, 주거, 보육, 의료, 돌봄 등의 사회정책은 경제에 휘둘려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바로 과거 패러다임, 그러나 어쩌랴, 그걸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
누구나 저출산(저출생)과 고령화를 말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질 생각이 없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대학교육의 토대가 전부 달라진다는데, 다들 참으로 한가하다. 응급인 노인 빈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돌봄 '난민'이 속출할 것이 뻔한데,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인지.
이런 이야기만 꺼내면 재정 문제가 바로 튀어나온다.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한가하게 국가부채 퍼센트 기준을 논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연금은 또 어떤가? 더 내고 덜 받는 것이 맞는 이야기면 사람들이 이해하고 동의해야 그렇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기가 막힌 정책 아이디어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회정치'가 필요하다. 정부 부채든 증세든, 보험료 인상이든 돌봄 책임을 지역사회로 떠넘기는 것이든, 이해, 설득, 논쟁, 경쟁, 동의의 과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회정책'의 대조어, '사회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경제든 사회든, 지금의 정책과 정치 구조로는 다른 누구도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먼저 나서야 할 곳은 개인이 아닌 정치 구조로서의 '대통령'이다. 사실상 정권과도 동의어인 이 '제도'야말로 장기적인 국가 의제를 내고 토론을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다.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을 교체한 것이 대통령'제(制)'의 경제정치와 사회정치를 회복하는 신호이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단기성과를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조바심이 날수록 먼 길을 생각해야 한다. 약 2년 전 '논평'에서 '치매국가책임제'를 두고 한 말이지만, 다른 과제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관련 기사 : "치매안심센터, '반동의 레토릭' 될까 두렵다")
"단기성과를 개혁의 동력이나 마중물이라고 강변하지 말라. 돌봄 부담, 건강과 삶의 질, 형평성 같은 것이 진짜 성과라면, 사람들은 곧 저절로 깨닫고 알게 된다. 그런 성과가 나타나서 좋아진 현실이 더 중요하다. 현실이 나아지지 않으면 개혁의 동력도 없다!
지금은 '장기', '종합' 계획과 촘촘한 디자인이 더 급하다. 지역사회와 시설, 의료와 복지, 가족 돌봄과 사회적 돌봄, 예방-치료-재활을 촘촘하게 잊는 연결망. 어떻게 만들고 연결할지, 역할을 어떻게 나누고 합할지, 틀과 내용, 흐름을 정교하게 구성(재구성)해야 한다.
누가 할 것인지도 소홀할 수 없다. 개혁의 진짜 동력은 시민들의 이해와 정치적 지지가 아닌가? 지금 우리의 정치 수준은 '장기'를 바랄 수 없다거나, 그래서 '치매국가관리제'의 성과가 나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의지만 분명하면,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은 장기 구상과 종합 계획을 보고 논의하는 것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
이해와 동의, 그리고 통로로서의 참여야말로 정치의 본령임을 강조한다. 허시만의 처방도 다르지 않다. 반동과 그 레토릭에 대응하는 방법은, 그리하여 개혁을 밀고 가는 동력은 "민주주의 친화적인 논의"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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