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눈감은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역사는 진행형

[아시아생각] 군부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미완의 과제

2019년 5월 18일, 39주년을 맞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추모식에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인도네시아의 인권활동가가 서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드조 운퉁(Bedjo Untung).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인도네시아 1965~66 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재 베드조 운퉁씨가 대표로 있는 YPKP65(Yayasan Penelitian Korban Pembunhan 1965-66의 약자로 '1965-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희생자 조사를 위한 재단’이라는 뜻)는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1965~66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 배·보상 및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 1965년 10월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공산당원 혐의로 한 남성을 체포하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기록원

1965 대학살은 무엇인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국부로 불리던 수카르노가 실각하고, 수하르토 대통령의 32년간의 장기집권이 시작될 시점에 전국적으로 소위 '빨갱이 사냥'이 진행되었다. 학살의 각본은 군부에 의해 사전에 준비되었다. 자바와 아체, 그리고 인도네시아 공산당 본부가 있던 발리에서의 대대적인 학살로 50만 명에서 300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베드조 운퉁씨는 학교에 다니다가 자카르타에 있는 군 정보부에 잡혀가 재판 없이 9년을 강제노동을 하며 감금생활을 하고서야 풀려나게 되었다.

1965년 10월 1일, 정보사령부의 한 대령은 "자바에서의 학살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저지른 짓이며 그들은 창고를 약탈하여 모든 무기를 준비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반란이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군부의 계획이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은 군부가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으로 각 도시의 특공대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죽이라는 무선 전보가 내려졌다. 1965년 10월 첫째 주부터 인도네시아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가 전국적 규모로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군사작전은 반공단체 및 군대 산하조직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공산당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동원되었다. 여기에서 제주의 4·3사건과 서북청년단이 연상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니리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소비에트연방의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원은 300만 명이었으며 지지자는 거의 26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학살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45년 헌법에 기반하여 사회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거대한 국가 인도네시아 건국을 이루며 수많은 집단의 통합을 강조하고 이를 '판차실라(Pancasila)'라는 인도네시아의 건국 5원칙에 담았다. 산스크리트어 단어인 판차실라는 '판차' (Panca, 다섯이라는 뜻)와 '실라' (Sila, 원칙 이라는 뜻)의 합성어로 ①다양한 신앙에 대한 존중, ②정의와 문화적인 인본주의, ③인도네시아의 단결, ④ 합의제와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의 지혜로운 길잡이, ⑤사회정의 구현을 이른다.

1945년 6월 1일에 열린 독립준비위원회에서 수카르노는 "판차실라의 탄생"이라는 주제의 연설로 인도네시아 건국 정신인 이 원칙들을 무슬림과 민족주의자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헌법에도 담겼던 인도네시아 통일과 단결원칙은 20년이 지난 후 수하르토와 군부에 의해 찢겨져 나간 것이었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와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자신들이 무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지역 당국에 협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구금되고 고문을 받았고, 납치되기도 했다. 군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은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일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전쟁도 아닌데 이 군사작전으로 최소 50만 명에서 300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수용소에서 강제노동과 납치, 고문이 이루어졌고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다.

또 다른 광주


세월이 흘러 1965년의 비극에 대한 미국의 외교문서가 2017년 10월 공개되었다. 공개된 3만여 쪽에 달하는 19개 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1965년 공산당원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카르타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은 살해당한 인도네시아 공산당 대표의 신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정부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군부가 인도네시아 내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지원했음이 보고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문서에는 반공산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슬람 종교단체가 이 학살에 협력했음이 적시되어 있었다. 군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그 산하조직을 박멸하는 작전을 수행했고 그 결과 50만 명의 공산당 지지자가 죽었으며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공개된 CIA의 문서를 참조할 때 미국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며, 영국과 호주 역시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여 수카르노의 제거를 지원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미국은 이렇게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배후에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와 국제시민법정


사건 이후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1965 대학살은 2012년에 이르러서야 밝은 햇볕 아래 실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상규명팀을 설치하여 1965년부터 1966년 사이에 벌어진 국가폭력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위원회는 2012년 7월 23일, 1965년의 비극이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이며 살인과 구금, 고문, 약탈, 성폭행, 강제노동, 차별과 추방이 있었다고 확인·발표했다. 또 위원회는 법무부 장관에게 인권법정을 설치하여 인권법에 따라 이러한 범죄를 처리할 것을 권고하였고, 학살을 자행한 군부 내 명령체계를 공개했다.

그 결과 인권침해를 심판하기 위한 국제시민법정(민간법정)이 2015년 11월 10일부터 13일까지 헤이그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1965대학살에 대한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가 단순히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일뿐 아니라 '학살'범죄라고 확인되었다. 1965년의 비극이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박멸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박해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의 그날까지


베드조 운퉁씨와 그가 대표로 있는 YPKP65는 현재 암매장된 유해의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살해된 사람들이 집단으로 매장된 무덤을 찾아 발굴하고 당국에 신고하는 활동을 벌인 결과 현재 319개의 학살 공간을 찾았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발리를 조사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부는 여전히 학살을 부인하고 있고, 군부에 대한 불처벌은 아직도 인도네시아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 해결의지가 없는 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해결은 요원한 것이다. 80세가 넘은 노인임에도 그는 여전히 해결의 의지를 불태우며 포럼에서 만나는 참가자들에게 연대를 호소하며 당시 후방에서 지원했던 서방국가들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같은 자리에서 독일의 나치범죄 중앙사무국장이 "세계 2차대전 패전 후 7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것은 그런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자는 목적도 있지만, 미래에 대대적인 국가폭력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라고 발언한 것과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 범죄의 공소시효는 1969년 의회 결의로 폐지됐다. 이로 인해서 1944년 17세의 나이에 폴란드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했던 함부르크 시민(92세)은 지난 4월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될 수 있었다.

광주의 5‧18기념재단은 삼처럼 엉키어버린 5‧18왜곡과 폄훼에 맞서 국제사회에 과거청산의 정당성을 호소하고자 지난 5월 18일~19일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미완의 과거청산이라는 주제로 열린 아시아포럼에서는 국제적으로 이행기 정의를 비교적 잘 실천한다고 인정받고 있는 과거청산의 경험을 가진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사례와 다른 한편으로는 미완의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험을 보여주었다. 과거청산이라는 표현은 마치 과거사를 지우개로 지우듯 불을 질러 그 흔적을 없애버린다는 의미로 우리나라에서 주로 쓰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 혹은 잘못된 과거 바로잡기(Dealing with the Past Injustice)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역사가 E.H. 카의 유명한 명제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청산되어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과거문제를 올바르게 정리하거나 해결하지 않고서는 현재나 미래의 민주주의는 담보되지 않는다. (이글에 나오는 1965대학살 내용은 베드조 운퉁씨의 광주아시아포럼 발표문과 YPKP65사이트(www.ypkp1965.org), 미국 국가안보기록원 사이트(https://nsarchive.gwu.edu/)를 참고했다. 필자)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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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지난 2000년 국경을 넘어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과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연대활동, 빈곤과 개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위원회는 △아시아 인권, 민주주의 연대 △공적개발원조(ODA) 정책 감시 △국제 인권 메커니즘을 통한 국내 인권 및 민주주의 개선 △참여연대 활동 해외 소개 등을 주 활동 영역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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