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던 이라크전 파병동의안이 한 차례 연기된 이후 28일에도 또다시 연기되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파병안 처리에 반대하는 의원들의 전원위원회 소집이 연기의 이유다. 그러나 파병안 처리 재연기 이후, 여야 총무에 이어 국회의장까지, 정치권이 이구동성으로 시민사회단체의 ‘낙선운동 위협’을 문제 삼는 것을 보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전쟁반대, 파병반대’ 여론에 국회와 여야 각 정당이 얼마나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담감에서 대통령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파병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들과 여기에 동조하는 국민들이 일개 비주류 정치인에 불과했던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로 이끌었던 동력이요, 향후 정국운영의 강력한 지지기반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이 느끼는 당혹감이 얼마나 클 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라는 견해가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대체적인 시각이다.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대통령**
정부의 파병방침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주장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부시의 전화 한 통화”다. 대통령 선거 내내 “원칙과 상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전쟁이냐 평화냐”와 같은 직설적인 물음을 통해 상대후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했으며 “미국에 굽신거리지는 않을 것”이라던 새 대통령이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전화 한 통화로 성급히 입장을 정리한 것에 많은 지지자들과 시민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아마도 이렇게까지 반대여론이 거셀 줄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대선 시기 대통령을 믿고 지지했던 개혁성향의 국민과 시민단체 등은 대통령이 사후 입장표명을 통해 양해를 구하면 이에 동의를 표할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안일한 판단이었고 2002년의 여러 사건들을 경과하며 물질성을 획득한 ‘새로운 정치 지형’의 특성을 간과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비주류 정객에 불과했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새로운 정치지형’은 선거 시기 단 한번의 거수기 노릇으로 역할과 권리를 갈음했던 예전의 (수동적)유권자와는 전혀 다른 양태의 (능동적)유권자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들 능동적 유권자들은 한번의 선거만으로 대리인들에게 주권을 이양해 왔던 순진하고 대상화된 국민이 아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개개인의 권리를 집단화 시켜 표출하는 구성적 권력을 꿈꾸고 이것을 작동시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한다.
지난 대선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이 ‘다수’의 이름으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노무현 정부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망각한 채, 낡은 정책결정 시스템의 관성에 젖어 일방적이고 성급한 ‘파병결정’을 내린 것은 새로운 지형에 어울리지 않는 퇴행적 행위요 정치적 자살골이었던 셈이다.
***‘묻지마 정치’에서 ‘불복종의 정치’로 이행**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에게서 흘러 나오는 발언을 보면 일종의 ‘야속함’과 ‘억울함’ 같은 것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이면, “좀 성급하더라도 밀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팽팽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구체적인 근거도 밝히지 않은 채 “전략적인 판단”, “국익에 도움이 되는 판단”임을 동어반복 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쉽게 납득하고 넘어갈 상황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난 주 열린 한 TV토론에서, 토론자로 나선 박근 전 UN대사는 “한미동맹이 깨지면 여러분이 누리는 자유와 경제적 여유는 모두 사라진다”라고 협박조로 이야기 하며 파병을 역설했다. 과거와 같으면 이런 으름장에 “왜 그런가”라는 단서도 달지 않고 수긍하는 국민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정치인의 판단에 모든 것을 위임하고 맡겨버리는 ‘묻지마 정치’에서, 자신이 지지한 정치인의 방침일지라도 정도와 민의를 벗어난 것일 경우 반대를 서슴지 않는 합리적 ‘불복종의 정치’로 정치지형의 구조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선운동이 두렵다면, 새로운 지형에 익숙해지기를**
이런 상황에서 낙선운동이라는 시민사회의 전술을 문제 삼는 것은 옹졸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낙선운동이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들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실은 ‘의회‘만’의 민주주의’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최근 미국의회에서도 대도시 지역구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전여론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또 9.11 테러의 직접적 피해대상이라 할 수 있는 뉴욕시의회는 전쟁반대 입장을 공식화한 상황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유색인종을 중심으로 미국에서도 반전여론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지역구민들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충실히 대변하는 게 바로 의회민주주의임을 이들은 잘 알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회의원 중에서도 민주당 조순형 의원의 경우 31일 파병 찬성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이번 결정에 대해 17대 총선에서 당당하게 유권자와 국민의 평가와 심판에 겸허하게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조의원의 경우처럼 현 시기 파병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가진 의원이 있다면 낙선운동에 구애됨 없이 자신의 의사를 적극 펼치면 된다. 정말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라면 무엇이 두려운가. 예전처럼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책을 결정하고, 선거 때는 ‘모르쇠’로 일관하면 만사 형통하던 ‘좋은 시절’은 이제 끝났다.
또 대통령과 국회의장까지 나서 “(낙선운동 때문에)의원들이 소신 있게 판단하기 어렵다”라고 이야기 하며 국회의원들을 감싸는 것이야말로 ‘의회민주주의’의 수준을 저하시키는 보기 민망한 행동일 것이다.
시나브로 주객이 전도됐던 정치의 양상이 교정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정치가 헌법에 명시된 ‘주권재민’의 원칙이 충실히 구현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한걸음씩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형에 적응하거나 혹은 도태되거나, 결정은 정치인들 스스로의 몫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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