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벤처 붐' 연간을 기억할 것이다.
2년도 안 되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거대한 지식의 분출을 맛보았다.
보잘 것 없는 중소기업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벤처기업들이 갑자기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어엿한 대기업 직장인들이 자리를 박차고 연이어 새로운 인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시생들로 북적이던 대학 도서관은 어느새 창업 준비생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식당하는 사람, 도매상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돈놀이하는 사람, 심지어는 대기업 회장님들까지도 이 대열에 한몫 끼려는 생각에 부심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내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이 아이템은 특출난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 수익모델이 있다.”
4천만이 다 함께 머리를 굴렸으니 대한민국 사람들 IQ가 확실히 올라갔음직 하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가?
정부의 벤처육성책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대 어느 정부가 벤처 육성에 목소리 높이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국민들은 늘상 되풀이되는 그 말을 습관적인 공염불 이상으로 평가할 만큼 정책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금이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이동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확실히 사람들은 돈냄새를 맡아야 머리 굴릴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돈냄새가 난다고 언제나 머리를 굴리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부러워할 뿐이다. 그때 일어남직한 벤처 붐이란 지식의 분출이 아니라 '투기의 분출'일 뿐이다.
인터넷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인터넷은 분명히 새로운 생활 패러다임과 거기서 파생된 무수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는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생활문화는 이미 PC통신 시절부터 폭넓게 확산돼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벌어 보겠다는 시도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기술의 발전이 이런 시도들을 더욱 손쉽고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 지식 창출의 동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전 생존방식의 위기**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 2년간의 거센 지식의 분출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하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식 분출의 장으로 만든 우리 사회의 '내적 동인'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의지가 충만해 있었다. 변화에 민감한 우리 국민들의 행동 특성이 IMF라는 위기를 겪으며 증폭된 모습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IMF 위기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동안 믿어 왔던 생존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토록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 언제든 문을 닫을 수 있고, 자신의 의지나 능력에 상관없이 내쫓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한국의 노동시장은 -미국식 표현으로- 갑자기 유연해졌다. 이제 자신의 능력으로 기회를 찾아 예전과 다른 생존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절실해진 것이다. 이들은 인터넷의 출현이나 자본시장의 변화와 같은 자극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예전 생존방식의 위기는 전사회적인 규모로 나타났다. 한국사회가 글로벌 경제체제에 급속히 편입해 들어가면서 전통적인 정치경제적 역학은 힘을 잃고 있다. 농민들의 표심이 아무리 사나워져도 정부는 핸드폰 판매를 위해 중국산 마늘 수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국내산업 보호시책은 국제무역기구와 교역 상대국들의 감시와 간섭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쟁력 제일주의로 인해 중소기업과 영세사업자들의 이익은 갈수록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결국 지난 2년간의 벤처붐은 이같은 예전 생존방식의 위기를 자각한 각 사회 구성원들의 자구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직장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존모델을 찾아 나섰고, 기존 생활방식과 사업모델을 혁신하는 실험에 열중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갖춘 뛰어난 '지적 능력'이다.
우리나라는 과잉교육 사회이다. 산업화 초기에 대학 졸업자는 고급노동에 종사하는 지식인 집단에 속했지만, 오늘날에는 단순 사무직종에까지 대졸자의 취업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교육에 투자된 막대한 자원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장과 동떨어져 있던 지식노동자들이 현장업무와 보다 밀접해짐으로써 현장업무 혁신의 기회가 확대된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대졸자가 그보다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에 비해 현장업무를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를 보다 구조적으로 인식하고 종합하는 데는 대졸자가 평균적으로 보다 유리할 수밖에 없다. 기존 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모델을 세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이렇게 구조화하고 종합하는 능력이다. 벤처붐의 주역이었던 닷컴 비즈니스 열풍은 이같은 현장 경험 축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작스런 지식의 분출**
지난 2년간의 지식 분출현상은 예전 생존방식의 위기에 대한 각 사회 구성원들의 자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런데 꺼질 줄 모르고 타올랐던 2년간의 활력은 어느날 갑자기 사그라들고 그 활력의 외화물이었던 벤처기업들은 온갖 비리의 온상으로서, 혹은 생존능력이 없는 부실덩어리로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왜 이런 급전직하가 이루어졌을까?
예전 생존방식의 위기가 해소된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 평생직장의 환상은 거의 확실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식량자급이니, 국산품 애용이니, 중소기업 보호니 하는 산업화 시대의 목가적 온정주의는 이제 정치인의 구호로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벤처붐의 종식이 지식분출의 소멸을 부른 직접적 원인이다. 즉 소위 ‘신지식’을 이용해 새로운 생존방식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던 벤처 비즈니스라는 사업모델이 매력을 잃자 사람들이 지식생산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침 예전 생존방식의 울타리를 대표하던 거대 기업들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체감 위기 정도가 완화된 점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기업들은 벤처붐 기간동안 유연한 업무시스템이나 성과에 대한 보상체계, 일부 기술적 성과들과 같은 벤처기업들이 실험한 다양한 혁신기법들을 기업내에 도입해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이 40만 넘으면 자리 걱정을 해야 되는 직장인들의 비애가 심화되게 되었지만.
지식분출 현상의 종식은 벤처붐의 소멸과 외형적으로뿐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연결돼 있다. 대다수 벤처 실험이 새로운 지식 생산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와해되는 주된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지식의 빈곤'에서 기인했다. 대부분의 벤처들이 새로운 지식을 현실화할 만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재무관리나 마케팅, 영업전략 등에서 벤처기업들은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했다. 다양한 현장경험을 통해 신 사업모델의 트리거(trigger)가 될 만한 지식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 비즈니스 세계의 복잡한 가치사슬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이디어가 전무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지식생산 프로세스가 여전히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2년간의 지식 분출은 그 이전의 지식생산활동과 연결돼 있지 못하다. 말하자면 지식생산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위기를 맞자 갑자기 골머리를 싸매고 자기 일과 경험을 되돌아 본 결과가 지난 2년의 실험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식생산의 전통이 일천한 상황에서 그같은 지식분출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속적인 지식생산은 지속적인 자극이 가해질 때 가능하다.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지식생산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 지식생산의 전통이 일천한 것은 이 지속적인 자극이 가해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지식생산을 방해하는 장벽들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식 생산을 방해하는 장벽들**
지식생산은 능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때 가장 크게 자극받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랫 동안 연공서열체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실력 중시 경향이 강해진 최근에 들어서도 능력 평가는 겉으로 드러난 숫자에 초점을 맞추는 수준이다. 숫자로 드러나는 실적은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평가의 중심이라면 사람들은 업무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숫자 키우는 능력을 키우는데 부심하게 마련이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조건이 '공개하고 공유하는 문화'이다. 수직적 관리체제 하에서는 자원과 정보의 독점이 관리를 위한 주된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러한 방식은 관리자의 권위를 세우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조직 구성원의 창의성은 억압될 수밖에 없다. 최근 경영원리에서 스피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현장에서의 즉각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작금의 경쟁환경을 견뎌내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원과 정보가 독점되면 의사결정 역시도 독점되고, 그 여파로 현장에서의 즉각적인 의사결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돼 버린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조건이 '기록하는 문화'이다. 물론 기록하지 않는 조직이 어디 있겠느냐 하겠지만, 조직에게 가장 중요한 지적 자산의 대부분은 여전히 각 조직구성원의 머릿속과 책상서랍 속에 잠겨져 있다. 이것도 역시 숫자 중시풍조가 낳은 폐해라 할 수 있는데, 조직이 그런 무형의 지식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소수의 관료적 통제에 의존하던 과거의 조직운영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에는 오랫동안 지식 생산과 지식 축적의 통로가 막혀 있었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지난 2년간의 지식분출은 이제 그 자취를 찾기 힘들고, 또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지만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큰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 경험을 공유한 인재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회 각 부문의 활력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또 부분적이긴 하지만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당시의 성과들을 기업 운영에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는 지식생산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운영 프로세스가 정착되지 못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지식 생산 노력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극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지식산업화의 길에 들어선 우리 사회가 안게 된 절박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편집자주: 필자 전원하씨(40)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한겨레사회연구소 국제연구분과장, 동일애드컴 기획팀장, 대우정보시스템 전략기획팀장, 엠에이컴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시장조사전문기관인 KRG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필자와 대화하고 싶은 독자는whchun@krgweb.com로 연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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