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너희는 누구니?

[인터뷰] <한국, 남자> 저자 최태섭

한국에서 '남성'은 질문받지 않는 존재였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경험하고 해방 이후 냉전의 틈바구니에 끼여 분단을 겪게 된, 남한과 북한이 적대적인 체제 경쟁을 하면서 70년이 지난, 한국 사회에서 성장한 '남성'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70년 동안 한 번도 질문받지 않았던, 의심받지 않았던, 어떤 요구도 받지 않았던,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았던 한국의 남성들에게 이제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이수역 폭행 사건'에서나 '거제 폭행 사망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어떤 이유든 여성을 죽기 직전까지 때리거나, 아니면 실제로 때려서 죽이는, 또 이들의 폭력을 정당화("쌍방폭행이었다")하거나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 온갖 인터넷 사이트를 도배하는 한국 남성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들은 왜 같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가치나 권리조차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화가 나 있는가?

의도적으로 남성들을 미러링하겠다고 공표하고 나선 '메갈리아(메갈)'이나 '워마드'와 같은 일부 젊은 여성 집단들에 대한 각종 보도와 논란은 넘쳐나는데, 실제 행동으로 여성들을 죽이거나 때리는 한국 남성들에 대해선 왜 아무런 질문이 없는가?

<한국, 남자>(최태섭 지음, 은행나무 펴냄)은 최근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한국 남성의 '남성성'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소수자에 의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화를 내는 이들을 '너의 피해의식이 정당하다'며 마냥 두둔할 수도,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느냐'며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격렬한 '백래시'(반격)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수전 팔루디가 쓴 <백래시>라는 책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가부장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전(全) 지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시민),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인권 등에 대해 전 사회적인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에 대해 교육 받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표출되는 '화난 남성들의 분노'는 사회 전체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제라도 '한국, 남자'에 대해 질문하고, 알아야 한다는 문제 의식으로 동년배(30대 중반) 한국 남성인 최태섭 씨가 책을 썼다. 그는 <한국, 남자>를 시작으로 한국 남성들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한다.

다음은 지난 12일 있었던 인터뷰 전문이다.

▲ 문화평론가이자 사회학 연구자 최태섭 씨. ⓒ프레시안(최형락)

한국, 남자

프레시안 :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한국, 남자>의 의미는?

최태섭 : 제목 그대로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남자'라는 말을 들으면, 요즘에는 바로 생각나는 단어('한남')가 있지 않나. 그래서 '한국'과 '남성' 사이에 있는 쉼표(,)가 중요하다. 그냥 '한국 남자'가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맥락에서 '남성성' 혹은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의미의 쉼표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 남성성' 문제를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최태섭 : 최근 모든 논란의 중심에는 '한남'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한남'과 싸우거나 공존해야 한다면, 이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 끝에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해 통사적으로 훑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남성학 연구는 1990년대 영유아보육을 연구하던 정채기 교수(강원관광대 교육학)가 관련 문헌을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당시 남성학 연구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남성들에 의한 남성성 연구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반(反) 페미니즘이 주된 목표가 되어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대신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식민지 남성성이나 군사주의 연구를 비롯한 비판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한국, 남자>도 이런 연구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프레시안 :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성'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문제였다.

최태섭 : 1990년대 이후 남성성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90년대 전반기에는 남성성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적 시도들이 있었지만, 1997~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고개 숙인 남자' 담론이 나오면서 동정 여론에 휩쓸려버렸다. IMF 이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생계 부양자로 대표되는 남자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단지 그렇지 않은 척했을 뿐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남성=생계 부양자'

▲ <한국, 남자>(최태섭 지음, 은행나무 펴냄)의 부제목은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이다. ⓒ은행나무
프레시안
: 책에서는 자본과 젠더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페미니즘에서 자본주의와 젠더의 복잡한 상호작용은 주요 연구 주제 중 하나다. 남성성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IMF 이후 '한국 사회 남성성'은 사실상 실추됐다.

최태섭 : '서구 사회 남성성'은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과 함께 나타났고, 성별 분업을 바탕으로 한다. 남성은 생계 부양자이자 공적인 일을 맡고, 여성은 이른바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식이다. 한국 사회 역시 '남성=생계 부양자'라는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는 동원 논리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또는 '책임진다'는 미명 아래, 실제로 죽도록 일했다. 반면, 생계 부양자가 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도 상당했다.

프레시안 : 지금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도 그에 기반한 걸까?

최태섭 : 현재를 살고 있는 남성들이 생계 부양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온라인에서 남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할 때 자주 하는 말이 '남자는 돈 벌어오는 기계'라는 표현인데, 이런 말을 하는 남성들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했을까 의문이다. 게다가 남자 혼자 외벌이로 가계를 지탱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남자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성 생계 부양자는 그에 대한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여전히 남성성의 규범으로 작동한다. 그 규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결격 사유로 여겨지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좌절감을 준다. 이런 좌절감이 잘못된 분노를 불러오는 지점이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남성성이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제 막 성별 권력 구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남자들은 이미 남녀평등이 많이 진전됐으며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엄청난 피해의식을 호소하며, 멀찌감치 물러나 있다. 이 같은 인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최태섭 : 지금 20대 이하를 기준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대부분의 면에서 우수하다. 20대까지는 고용률 또한 여성이 높다. 물론 30대가 되면 역전돼 남녀 간 어마어마한 고용률 격차가 벌어진다. 그러나 10대나 20대에 한정해 보면, 남성들은 계속해서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세상은 여성에게만 관대하고 남성에게는 혹독하다'고.

최근 떠오른 페미니즘 이슈에 반응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기득권이기 때문에 그걸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기보다 스스로를 '피해자'나 '소수자'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피해의식은 진짜다. 물론 더 많은 차별을 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회적 실체에는 맞지 않는 주장이지만.

▲ MBC에서 1992년 10월에서 1993년 5월까지 방송된 주말 드라마 <아들과 딸> 장면들. 이란성 쌍둥이인 귀남이(최수종 분)와 후남이(김희애 분)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남아선호 사상과 가부장제를 실감 나게 다루었다. 귀남이와 후남이의 아버지인 이만복(백일섭 분)은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 한량으로 묘사되어 있다.

'남성성'을 찍어내던 군대, 더는 명예롭지 않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 남성성'의 근간이 되는 역사적·사회적 경험을 꼽자면, 식민지 경험과 분단에 따른 징병제도라고 할 수 있다.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

최태섭 : 사실 식민지 남성성은 식민지의 많은 남성들이 경험하는 문제다. '진짜 남자'는 식민본국에 남자들이고, 식민지의 남자들은 '가짜 남자', '여성화된(거세된) 남자'로 취급됐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노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는 알제리 흑인 남성들이 정신병이 있는 프랑스 백인 여성과 하룻밤 자고 오는 걸 명예롭게 여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식민지 문제가 젠더의 문제와 교차되며 벌어진 일이다.

한국의 경우, 일제 식민 치하였다는 사실은 비슷하지만 백인과 흑인이라는 인종적 차이는 없었다. 이 점이 오히려 조선 남성의 혼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또한 조선은 민족주의적 열망이 팽창하던 시기 일본을 통해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서양의 남성성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 상당수의 민족주의자가 친일파가 된 것도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 더 큰 제국에 투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은 아닐까?

▲ 1997년 8월 한 청년이 서울 명동 한 복판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 후보 아들의 신체조건(키 179㎝, 몸무게 45㎏)과 비슷한지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리고 군대 문제. '한국 사회 남성성' 문제를 다룰 때 군대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남성성을 찍어내는 기관으로, 또 군 복무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게끔 했다. 1950~60년대 군대는 글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일종의 학교 역할도 했다. '군대 다녀오면 사람 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한국 사회는 급속하게 군대화(化)됐다. 학교, 직장 등 많은 곳이 군대식 문화와 논리로 운영됐다.

하지만 지금은 군 복무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징병 대상자 상당수가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특히 민주화 이후 개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지면서 병역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국가는 이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군대 자체도 계층화된 지 오래다. 크게는 부유층과 사회지도층의 병역 비리가 있다. 명문대생들이 카투사, 공군 장교, 해군 장교 순으로 지원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 외 대부분은 육군으로, 일반 사병으로 복무한다. 군대가 한때는 '평등'이 강조된 곳이었지만, 지금은 군 복무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격차'가 발생하고 있다. 개인에 따라서 군대란 또 다를 격차를 경험하는, 그로 인해 박탈감을 느끼는 곳이 되어 버렸다.

'된장녀' '김치녀' 조롱 잔치 이면에는 공포심이

프레시안 : 한국 남자들이 한국 여성에게 '된장녀' '김치녀'라는 멸칭을 붙인 배경에는 그들이 백인 남성에게 갖고 있는 심리적 열등감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최태섭 : 19세기 말 <독립신문>은 "우리 인종"이 태생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식민 치하라는 "임시적 어려움"은 언제든지 "노력만 잘하면" 극복될 수 있다며 "중국인보다 더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깨끗하고, 일본인보다 체골이 더 튼튼한 조선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예전부터 '한국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 다음으로 머리가 좋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이런 주장과 말에 대해 인종주의적 사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90년대 '오렌지족'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굉장히 인종주의적인 표현이다. 그전에는 가기도 쉽지 않은 나라인 미국을 다녀온, 그래서 서양의 질서를 경험하고 온 이들에 대한 선망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된장녀' '김치녀' 같은 멸칭에는 인종주의적 질서에 대한 냉소적인 체념이 담겨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사실 '된장'이고 '김치'일 수밖에 없다. 반도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이 같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강한 가부장제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동양 남성에게 더욱 강렬하게 나타난다. 또한 자신들보다 여성이 훨씬 더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질투가 '된장녀' '김치녀'와 같은 멸칭에 담겨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떠들썩한 조롱 잔치 이면에는 공포심이 자리해 있다. 서구의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식의 자의적이면서도 인종주의적인 불안이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멸칭과 냉소주의의 문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너도 어차피 똑같다'의 의미는 인간성의 한계나 바닥을 향하고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자신의 지식, 상황, 욕망이라는 한계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가령 '남자는 섹스를 원하고 여자는 돈을 원한다'라고 단정하는 이들의 냉소적 세계관은 동물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도출된 것이고,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고민 없이 인간의 본능이나 영점으로 설정된다."(220쪽)

▲ 홍대 몰카 사건으로 촉발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혜화역 시위)'에서 여성들이 '나의 삶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My Life Is Not Your Porn)'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페미니즘 이슈가 불거지자, 한국 남자 중 특히 기성세대들은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성별 위계를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다. 남성들 간의 세대별 인식 차이도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최태섭 : 10대 20대와 달리, 자신들은 위협당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모순이다. 따지고 보면, 기성세대 엘리트 남성들이야말로 사회적 자원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들 역시 '한국 사회 남성성' 문제의 한 축이다.

사실 한국 남성 간 격차 문제도 심각하다. 많은 남자들이 '이재용'과 '정용진', 혹은 그보다는 덜하지만 부자를 선망한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은 야근과 박봉에 시달리며 직장 생활을 한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이재용'과 정용진' 같은 사람들이 만든 착취 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분노는 오로지 자신보다 더 약한 계층을 향해 있다. 결국은 효능감 때문이다. 누군가를 때렸을 때 '누가 더 아파하느냐'의 문제다.

한국 남자, "곤란한 존재"가 되다

프레시안 :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황성원 옮김, 손희정 해제, 아르테 펴냄) 등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페미니즘 운동에 맞서는 남성들의 반격은 다른 나라, 다른 세대에도 있었다. '분노한 남성들'의 존재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최태섭
: 책 서문에서 한국 남자를 "곤란한 존재"라고 표현하며 "이 곤란함은 이중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상적인 상(像)을 구현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남성들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겠다' '페미니즘이 싫다'고 분노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여성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그들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즐거움과 욕망을 유보한 채 학창 시절을 보낸다. 가령 많은 부모들이 대학만 가면 연애가 절로 되는 양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현실은. 남성 입장만 예를 들면, 이성 교제가 절로 되기는커녕 대학에서도 여성 동기생과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해야 한다. 부모가 약속한 미래는 현실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박탈감만 쌓인다.

프레시안 : 한국 남자를 "곤란한 존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남성들이 여성에게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들'이라는 존재가 늘 그렇듯 모순적이다.

최태섭 : 일단 자존감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자신보다 약한 대상 앞에서만 자존심을 세운다.

한국 남자는 대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집약된다. 그런데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과 참 안 친하다. 심지어 가정 내에서 늘 부재 상태다. 특히 '아버지=생계 부양자'라는 역할이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난 IMF 이후, 우리에게는 의문이 생겼다. '그럼, 가족 안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뭔데? 무엇을 하는 사람인데?'와 같은.

적당한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아들 세대는 사실 아버지 세대에서도 실현된 적 없는 '가부장제 유토피아'를 그리워하고 있다. 실현된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져있는 것이다.

"PC 묻었다"는 무슨 말?…놀이가 된 혐오

프레시안 : 10대 또래 문화만 놓고 보면, '남성은 일베(일간베스트) vs. 여성은 메갈리아 및 워마드'로 양분된 채 엄청난 성별 갈등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태섭 : 사춘기에 이성에게 적대감을 갖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관심도 왕성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만큼 사춘기에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과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 특히 부모들은 학업성적이 떨어지고 사고가 날까 싶어 자녀들이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을 못 마땅해한다. 학교에서도 학업을 이유로 이성 교제를 금지한다.

이것이 10대 또래 문화가 거칠어지고 상호 간 배타성이 강해지는 원인이 아닐까? 단순히 이성 교제를 할 수 있다 없다가 아니라, 10대들을 온전한 주체로 대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자의적으로 흔들어 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이는 오히려 무책임한 태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 'PC(Political Correctness)' 논란이 일어난 게임 '배틀필드 5' 이미지.

프레시안 : 10대에게 친숙한 게임과 유튜브 등 놀이 문화조차 혐오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게임은 여성을 대상화하며 하위 계층으로 설정해 놨다.

최태섭 : 게임은 이미 10대 남성들의 핵심 놀이 문화다. 놀이를 통해 습득하는 것은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것보다 소구력이 강하다. 모든 게임이 여성을 부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런 묘사가 다수를 차지한다. 북미를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있었고 개선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남성 게이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묻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성에 대한 부적절한 묘사를 지양하거나 인종이나 동성애 등의 소수자 관점을 반영한 게임이나 만화에 대한 비난이다. 게임은 거대한 산업이자 동시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매체 중 하나다. 영화나 다른 영상매체들이 그렇듯 게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많은 남성 게이머들은 게임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비자의 욕구를 존중하라고 외치지만, 게임을 하는 것은 남성만이 아니다.

"게임 문화 안에서 실제의 여성은 게임을 방해하는 존재다. 엄마, 선생님, 사회, 부인(애인)은 게임을 하려는 남자들의 욕망을 무시하고 쓸데없는 일로 치부하며 적극적으로 그것을 방해하려 한다. (중략) 청년 남성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여성가족부를 주적으로 여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여성가족부가 셧다운제 주무부서이기 때문이다."(242쪽)

프레시안 : 놀이를 통해 혐오를 배우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도 사회도, 학교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태섭 : 누구를 탓하기는 어렵지만, 이 같은 비극은 '내 자식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됐다. 미래를 위해 학습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다양한 놀이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개발할 시간 및 자원이 부족하다. 그로 인해 놀이 문화가 천편일률적이 되고 특정한 것의 영향력 또한 커진다.

10대 남성 문제를 해결하려면, 10대 여성을 포함하여 청소년들에게 좀 더 많은 권리와 권한을 줘야 한다. 교육은 개인이 시민이 되는 과정이어야 하고, 인권의 보장을 통해 자신에게 있는 권리와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게 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남' 아닌 '주체적 인간'을 꿈꾸다


프레시안 : 모순 덩어리인 한국 남자의 문제, 어떻게 해야 할까?

최태섭 : '대안을 모색하자'고 말하는 것마저 어려워진 게 사람들이 너무 냉소적이다. 심지어 댓글 양상도 달라졌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시한다. 일명 '거른다'라고 표현하는데, 내가 상대방과 맞부딪혀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고 건너뛰는 거다.

이는 한국 사회 신뢰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함께 하면 된다'라는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탄핵 촛불'이 그런 경우였지만, 이후 사람들은 계속해서 실망하고 있다. 굉장히 좋지 않은 신호이다, 이런 흐름이라면, 한국도 미국과 프랑스·이탈리아처럼 극우정치와 대중이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


프레시안 : 세계적으로도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젊은 정치인이 나오거나 극우가 집권하거나. 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이런 흐름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나?

최태섭 : 비록 한국의 보수가 수준 이하라고 해도, 대중과 영합하는 포퓰리즘 세력이 태동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한국에서도 '트럼프' 같은 존재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는 등 약진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 중 하나인 민주당을 엘리트 집단으로 몰아 대중의 반감을 부추기는 프레임도 동시에 작용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책을 쓰면서 새로운 질문이 많이 생겼다고 했다.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는 건가?

최태섭 : 책을 시작하면서 또 끝내면서도 고민은 하나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주체로, 또 타인과 연대하고 돌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특히 '한국 사회 남성성' 문제의 답은 '진정한 남자가 되자'도, '좋은 아빠가 되자'도 아니다. 스스로 묻고 답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이 되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 여성 혹은 그 외 다양한 성 정체성이 다양한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결국에는 모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책 <한국, 남자>를 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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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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