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의 목표는 '코끼리 살빼기'가 아니다"

[프레시안 books] <탈성장 개념어 사전>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격차'다.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냉소 속에 자리 잡은 깊은 절망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기인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부의 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를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른 문제라는 것도 모두가 잘 안다. 지금과 같은 분배 시스템에서는 더 많이 성장한다 하더라도 '흙수저'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다.

▲ <탈성장 개념어 사전>, 자코모 달리사.페데리코 데마리아.요르고스 칼리스 엮음, 강이현 옮김, 그물코 펴냄.
현재 지구상의 수많은 위기(카트리나, 아이티, 필리핀의 자연재해와 후쿠시만 원전 사고, 멕시코만의 기름 유출, 기후변화 등)는 끊임없이 성장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에서 비롯됐다. 더 많이 만들어내고,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기반하고 있으며, 동시에 욕구를 더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고, 대안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해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장주의 이데올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성장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전혀 다른 철학과 상상력과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탈성장 개념어 사전>(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엮음, 강이현 옮김, 그물코 펴냄)는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다.

'탈성장'은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임은 분명하지만, '보다 적게'가 아니라 '다름'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다. "우리의 목표는 코끼리를 날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를 달팽이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 책의 저자들은 말한다.

"(탈성장은) 첫번째는 성장에 대한 비판이고, 두번째는 영속적인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탈성장이 비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건설적인 측면에서 탈성장의 상상계는 돌봄의 재생산 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사유화되었던 오래된 공유물을 되찾고 새로운 공유물을 형성하는 사회이다. 공공 돌봄은 생태공동체나 협동조합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삶과 생산에 내재되어 있으며, 일자리 나누기, 기본 및 최고소득 등 새로운 정부 제도로 뒷받침된다."

탈성장 논의의 역사적인 맥락에서부터 탈성장 사회의 핵심 개념들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는 다양한 대안들을 52가지 개념어 사전 형식으로 묶은 이 책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있는 탈성장 연구 학술 단체 '연구와 탈성장(Research & Degrowth)'에 속한 많은 회원들의 협력으로 탄생했다.

이 책은 서론에서는 탈성장이라는 단어의 역사와 탈성장에 관한 다양한 제안과 아이디어를 소개하며, 1장 '탈성장의 지적 뿌리'에서는 반공리주의, 생물경제학, 사회적 메타볼리즘, 정치생태학 등 탈성장과 관련된 학설을 요약해 소개한다. 2장 '탈성장의 핵심'은 탈성장의 핵심 개념(자율성, 돌봄, 상품화, 공유물, 비물질화 등)들에 대한 설명이며, 3장 '탈성장의 행동'은 국가 정책부터 활동가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탈성장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 생생한 예시를 제시한다. 4장 '탈성장의 연맹'에서는 탈성장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아직까지는 느슨한 관계에 있는 학설, 운동, 개념 네 가지(부엔 비비르, 영속의 경제, 페미니스트 경제학, 우분투)를 소개한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탈성장'이라는 아직은 낯설지만 매우 유의미한 개념에 주목해야할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에서는 물론,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고도) 성장은 불가하다. 이미 각국의 사회 경제 시스템은 물론 그 속에 사는 우리 자신이 대부분 성장 중독증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걸려 삶의 진정한 필요나 충분함의 미학을 잊은 지 오래다. 따라서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우리 자신과 시스템이 모두 성장 중독증에 걸려 삶의 진실과 의미를 모른채 허우적 거리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성장 중독증을 지탱하는 모든 구조적, 정책적, 제도적, 행위적, 문화적 요소들을 해체하거나 건강하게 바꿔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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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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