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현상? 한국도 다르지 않다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⑩] 디르크 힐베르트 드레스덴 시장

현재 한국에서 독일 관련 뉴스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극우 시위다. 독일도 인정하는 문제다. 지난 달 29일, 독일 통일 기념일을 나흘 앞두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은 성공적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 발생한 많은 일을 (우리가) 오늘날 다시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메르켈 총리가 지적한 '다시금 직면한 갈등'이 최근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 나아가 세계를 뒤흔드는 극우화 바람이다.

독일 극우 세력의 핵심은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 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이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며, 동성애, 다문화주의 등에 반대하는 전형적인 극우 집단의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최근 난민 문제를 계기로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다. AfD가 특히 옛 동독 지역 일부에서 내년 지방선거 후 제1당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AfD가 독일 연방의회 입성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 세력이라면, 독일 극우화의 다른 한 축에는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가 있다. '유럽의 이슬람화에 저항하는 애국적 유럽인의 모임'이라는 뜻의 이 단체는 독일 작센(Sachsen) 주의 주도인 드레스덴(Dresden)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반 이슬람 집회를 이어가며 극우주의 세력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독일에서 극우주의 바람이 부는 현상은 단순히 한두 가지 원인을 꼽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폐해, 인류사를 관통하는 타 민족 배제 정서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유독 신연방주, 즉 구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극우화 바람이 부는 현상은 재통일의 후유증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북한 지역을 구 동독 지역과 함께 묶어 생각해 볼 법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잖은 탈북민 단체가 극우적 정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지난 달 17일, 페기다 운동의 시발점인 드레스덴을 찾아 디르크 힐베르트(Dirk Hilbert) 시장을 만났다. 마침 월요일이었다.

1971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힐베르트 시장은 한국 언론에도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다. 성악가인 아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당(FDP,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내건 정당이지만 한국의 자유한국당과는 조금 노선이 다르다. 민영화, 규제 완화 등을 기치로 내걸고 있으며, 복지를 줄이고 기본소득제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동성 파트너의 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역시 주요 정책이다. 편집자.)의 지지를 받은 그는 2015년 선거에서 범 야권 후보로 나와 당선됐다.

이처럼 여러 정당 기조에 한 발씩 걸친 이미지 덕분인지, 그는 선거 당시 페기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거에서는 다문화 가족인 자신의 배경을 적극 홍보하며 드레스덴을 다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들자고 강조하기도 했다. 시장 당선 후에는 극우단체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흘간 그의 가족이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기도 했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와 구 동독의 극우화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 디르크 힐베르트 드레스덴 시장. 힐베르트 시장 역시 독일 재통일의 혜택을 입은 통일기 젊은 세대다. 여전히 독일에서 구 동독 출신이 엘리트층으로 오르는 사례는 적지만, 서서히 이들 젊은 세대가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별취재팀

구 동독은 지금 세계와 대화하는 중

프레시안 : 1988년 드레스덴 공대를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다 정치에 입문했다. 이력을 튼 계기가 있나?

힐베르트 : 독일 재통일 후 동독에 여러 변화가 일어났는데, 당시 나의 할아버지가 동독 기독교민주연합(CDU)의 당원으로 활동하셨다. 이에 청소년기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정당 행사를 자주 다녔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정치 입문 시기는 2001년이다. 당시 평범한 직장인이던 나는 프랑스 니스(Nice)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FDP에서 드레스덴 경제부 담당자로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고 나에게 연락했다. 당시 드레스덴 정부는 FDP와 CDU 연정 정부였다.

결국, 2001년 6월 8일 휴가지에서 후보로 등록했고, 3개월 후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이때부터 정치인 이력을 시작했다.

프레시안 : 재통일 전후 고향의 변화를 직접 경험한 셈인데,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힐베르트 : 아무래도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인민들이 직업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통일 후 건물들도 개성적으로 변화했다.

프레시안 : 현재 드레스덴은 작센 주의 대표적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대학이 있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외국인이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한편으로 드레스덴은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하고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이들이 밀집하는 페기다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 같은 간극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힐베르트 : 구 동독 지역이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재통일 이전 구 동독 사람들은 외국인을 많이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재통일 후 많은 외국인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이 가운데 테러 뉴스 등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이런 이유로 시위가 일어났다고 본다.

하지만 구 동독의 이런 배타적 모습만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지금껏 드레스덴과 작센 주는 많은 유학생을 받고, 이들이 지역민과 함께 사는 공동 사회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드레스덴 시 차원의 정책 하나를 소개해드리겠다. 우리는 난민들에게 잘 꾸며놓은 좋은 집을 제공한 후, 이들과 드레스덴 내 독일인 가정 하나를 연결해 정착을 돕는다. 즉, 난민 가족이 독일인 가족과 가족 대 가족으로서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제공한다. 난민 가족을 정기적으로 시청에 초대해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면 자연스럽게 외국인을 향한 (독일인의) 두려움도 사라질 수 있다.

한국의 상황에 우리 현실을 빗대고 싶기도 하다. 당신이 알다시피 난 한국인과 결혼했고, 한국 상황을 잘 안다.

한국도 최근 난민 문제에 반대 목소리를 낸 걸로 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 사람들을 반대하는(혐오하는) 이들이 많은 걸로도 안다. 이 점에서 한국도 사실 구 동독과 다르지 않다. 세계에 열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닥친 변화에 당황해 그 같은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과 더 교류해야 한다.

앞으로도 난민 문제는 세계적 이슈가 되리라고 본다. 드레스덴은 다른 도시보다 앞장서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을 겪었다. 우리 도시가 모두가 하나 되는 프로그램을 잘 기획해 세계 여러 공동체에 본보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레시안 : 드레스덴의 페기다 운동을 부각하는 언론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도 보인다.

힐베르트 : 언론이 독자에게 새로운 문제를 알려 충격을 주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만큼 긍정적인 부분도 조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드레스덴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조명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실제 난민 중에는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독일인 중에도 범죄자가 있다. 그런데 독일 언론들은 난민이 저지른 범죄만 기사화한다. 이런 기사가 자꾸 나오니 현지인이 난민에게 더 편견을 갖게 된다.

▲ 독일 극우단체 페기다의 드레스덴 집회 모습. 독일 전역의 극우단체가 구 동독 지역으로 몰려든다. ⓒwikimedia

독일 극우 사태? 한국도 다르지 않다

프레시안 : 한국인 아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 피부색이 다른 이와의 결혼 생활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힐베르트 :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 부부는 매일 새로운 것을 서로 배우고 있다(힐베르트 시장은 손님 접대 시 손님이 커피와 한국 차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권유한다. 한국 문화를 알린다는 차원에서다. 편집자.).

프레시안 : 시장 당선 이후, 선거 당시 당신을 지지하기도 한 극우 세력을 비판한 걸로 안다. 그 때문에 2016년에는 가족들이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았다고 들었다.

힐베르트 : 당시 드레스덴에 들어오는 난민을 위해 어떤 숙소를 제공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당시 나는 '그들이 머물 곳이 없다면 우리 집 거실이라도 내놓겠다'고 했다. 이 발언에 극우적 사람들이 (내 정책에 반대해) 자신들이 머물겠다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이에 경찰이 며칠 간 우리 집을 보호해줬다. 사람들의 감정이 격해져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다.

프레시안 : 당신 가족이 곧 극우세력에 관한 당신의 대답인가?

힐베르트 : 그렇다. 내 이웃 사람은 유대인이다. 우리는 이웃을 통해 다문화를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프레시안 : 한국의 난민 반대 사례를 얘기한 걸로 봐서 한국 상황을 잘 아는 것 같다. 당신의 이 같은 대답을 난민을 반대하는 한국인을 향한 답변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힐베르트 : 물론.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한국과 신연방주의 상황은 여러모로 비슷한 듯하다. 드레스덴의 경우, 최근에는 난민 문제와 별개로 중국인 관광객의 쓰레기 투척 사례도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날수록 마음을 닫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구 동독이 서독과 같은 순 없다

프레시안 : 당신은 계속해서 열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드레스덴 시민이 지지하고 있나? 반대자가 꽤 많을 듯한데?

힐베르트 : 그렇다고 본다. 물론 내가 시장에 당선된 이유가 단순히 다문화 정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난 선거 당시 부시장으로서 시정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다문화적 배경도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지난 8월 20일 독일 여론조사 업체 포르자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힐베르트 시장은 독일 자치단체장 중 시정 만족도 4위에 올랐다. 편집자.)

프레시안 : 드레스덴은 신연방주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한 도시다. 재통일에 잘 적응한 도시라고 볼 수 있는데,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나?

힐베르트 : 휴먼 파워가 중요했다. 드레스덴에는 좋은 대학이 있었고, 이에 따라 핵심적인 연구소도 원래 있었다. 이 인재들이 재통일 이후에도 드레스덴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었다. 지금도 대기업의 투자가 이어지는 이유다. 최근에는 폭스바겐이 드레스덴에 전기자동차 사업 관련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물론 전략도 중요했다. 우리는 기업 유치 시 신기술 분야 투자에 집중한다. 어차피 옛 기술, 옛 산업부문에서 신연방주는 서독 지역과 경쟁할 수 없다. 이미 그곳에 인프라, 인력이 다 갖춰져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직 신기술 산업 분야에만 집중한다. 예를 들어, 드레스덴은 차세대 태양 전지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최근 유치했다.

그래도 통일이 답

프레시안 : 한국은 독일을 통해 남북한의 미래를 점쳐보고자 한다. 최근 남북한은 화해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이 독일 재통일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나?

힐베르트 :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 일단 사람들이 교류를 해야 오해가 사라진다.

▲ 힐베르트 시장은 남북한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교류란 일방적 거래가 아니다. ⓒ특별취재팀
남북한이 연방 체제를 이루든 통일 국가를 이루든, 우선은 남한 사람들이 지금껏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인정해주고 존중하는 배려심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구 동독 사람들은 재통일로 인해 그간 자신이 살아오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이는 사람이 견뎌내기 아주 힘든 사건이다. 이 상황에서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우리보다 덜 배웠으니 당신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초기의 통일 열기는 확 가라앉고 사회는 더 침체될 것이다.

두 체제의 통일을 위해서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남한의 기업들이 용기를 갖고 북한에 투자해야 한다. 남한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에 투자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의 용기를 내야 한다. 이 같은 투자가 잘 되지 않는다면, 상당수 북한 사람은 잘 사는 남한으로 몰려갈 것이다. 이는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간 혼란이 있었지만, 재통일은 결과적으로 독일의 성장을 도왔다. 재통일로 인해 같은 언어를 쓰는 인력 공급이 확대되어 독일 기업은 독일어를 쓰는 각 분야 전문가를 더 쉽게 채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한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남북이 통일된다면 인구가 약 7000만 명 정도가 되는 걸로 안다. 그만큼 한국 기업은 더 좋은 인재를 쉽게 채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는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않나. 통일 후 혼란을 잘만 극복한다면, 아시아에서 한국의 정치력과 경제력이 더 커질 것이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이 당신에게는 무엇을 주었나?

힐베르트 : 나는 재통일의 혜택을 본 세대다. 생각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젊은 시절 통일이 왔기에 다양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통역: 박영철)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켐니츠의 오늘

신연방주 극우화 현상은 켐니츠(Chemnitz)에서 절정을 이뤘다. 지난 8월 26일, 인구 약 25만 명의 작센 주 주요 도시 켐니츠에서 35세의 쿠바계 독일 남성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체포된 용의자는 시리아 출신 23세 남성과 이라크 출신 22세 남성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하루 후인 같은 달 27일, 전국에서 약 6000명의 극우단체 회원이 켐니츠에 결집해 반 난민, 반 이민자, 네오 나치 구호가 섞인 인종차별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주로 외친 구호 중 하나는 (난민을 끌어안은 주역으로 이들이 평가하는) "메르켈은 물러가라(Merkel muss weg)!"였다. 사건은 더 커졌다. 같은 달 29일, 용의자 2명의 인적 정보가 담긴 구속영장이 유출됐다. 역시 극우주의자인 작센 주 교도관의 소행이었다.

페기다와 AfD를 지지하는 단체로 알려진 '프로 켐니츠' 등이 용의자 인적 정보를 온라인에 퍼뜨렸다. 이 정보를 확인하고 전국에서 켐니츠로 몰려든 극우세력은 난민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사실상 인간사냥을 방불케 하는 폭력집회를 열었다. 독일이 발칵 뒤집혔다.

극우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의 저항도 본격화했다. 지난 달 1일, 열린 독일을 지향하는 1만1000여 명의 시민이 켐니츠에 모여 시위를 열었다. 같은 달 3일에는 뮤지션들이 주도해 한국의 촛불집회와 같은 콘서트 형식의 극우 반대 시위를 열었다. 이 시위에 6만5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주 출신 예술가 라이너 오폴카(Rainer Opolka)는 켐니츠의 명물인 카를 마르크스 두상 주변에 나치식 경례를 하는 늑대 여러 마리가 모인 섬뜩한 작품 <그 늑대들이 돌아왔나(Die Wolfe sind zurück)?>를 전시해 극우단체를 비판했다(이 작품은 취재진이 켐니츠를 찾은 지난 달 17일에는 이미 철거되어 있었다). 독일 전역이 난민 문제, 극우 문제로 갈라졌다.

▲ 작센 지역언론인 에 보도된 오폴카 씨의 극우 비판 조형물 <그 늑대들이 돌아왔나?>의 모습. 현재는 철거되었다. ⓒ기사 링크: https://www.mdr.de/sachsen/chemnitz/chemnitz-stollberg/woelfe-aktion-in-chemnitz-100.html

주목할 것은 켐니츠와 작센 주다. 한때 독일 연방 최고의 지역으로 꼽히던 작센 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를 잃었다. 연합군은 독일을 향한 보복으로 작센 주를 선택, 드레스덴에 집중 폭격을 퍼부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같은 역사를 공유한 켐니츠는 동독 시절 카를 마르크스 시(Karl Marx Stadt)로 개칭되어 동독의 주요 공업 도시로 성장했으나, 통일 이후 생산 기반을 송두리째 잃었다. 독일 재통일로 인한 신연방주의 피해를 상징하는 도시다.

취재진은 힐베르트 시장과의 인터뷰 직후, 곧바로 켐니츠를 찾았다. 도시는 한참 활기가 넘쳐야 할 시간인 오전 9시경, 오후 5시경(상당수 직장인이 퇴근 후 아이와 함께 쇼핑하는 시간이다. 편집자.)에도 텅 비어 있었다. 백화점이 있는 중심가를 제외하면, 카를 마르크스 두상 인근에도 텅 빈 상점이 많았다.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실업의 상처가 지금도 도시 곳곳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취재진이 찾은 날 저녁에도 카를 마르크스 두상 근처에서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극우 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인 시위였다. 두상 뒤에는 큰 현수막이 "켐니츠는 회색도, 갈색도 아니다(Chemnitz ist weder grau noch braun)!"라는 글귀로 장식됐다. 독일에서 갈색은 나치를 상징하는 색으로 활용된다. 회색은 획일성을 뜻한다. 즉, 이 말은 "켐니츠는 인종주의를 반대하며, 다양성을 지향한다"라는 뜻이다. 중앙역 인근 한 건물에는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No! Nie weder faschismus)!"라는 낙서가 벽에 그려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베트남계로 추정되는 중년 부부, 중국계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 몇을 제외하면 아시아계 사람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민 사냥 사태의 여파를 걱정하는 듯,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 더 친근한 모습으로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의 도시를 향한 세계의 시선에 켐니츠의 평범한 시민 역시 상처를 입은 듯했다.

▲ 켐니츠의 명물 카를 마르크스 두상 주변을 "켐니츠는 회색도, 갈색도 아니다"라는 구호가 둘러쌌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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