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최대 피해자는 동독 여성, 그 중에서도...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⑨] 아우가 훔볼트대학 교수

독일 재통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동독 여성, 정확히는 동독의 미숙련 여성 노동자라는 지적이 있었다. 노동을 인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봤던 동독 사회에서는 여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 여성이 노동자였다. 통일 직전인 1989년 당시 동독 여성의 취업률은 91.2%에 달했다. 세계대전의 피해가 컸던 데다, 끊임없는 인구 유출로 노동력 부족을 고민한 동독 정부가 여성을 집 안에 둘리 만무했다. 여성을 노동 현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육아는 국가에서 책임졌다.

이를 상징하는 장면이 동독 탁아소의 '단체 변기 시간(Collective Potty Breaks)'이다. 유아에게 단체 배변훈련을 시킴으로써 개인주의 성향을 줄이고 공동체 정신을 일찌감치 키운다는 목표 아래에 동독 정부가 국가적으로 시행한 프로젝트다. 여러 아이를 한 변기에 앉혀 용변을 보게 했고, 마지막 아이까지 배변을 끝마쳐야 모두 함께 일어나게 했다.

비록 동독 시절의 사회주의적, 인권 침해적 교육 태도가 드러난 사례이지만, 목적성을 제거하고 보자면 국가가 주도해 만든 복지 시스템이 여성을 노동자로서 자립하게끔 도왔다. 이 같은 지원이 동독 시절 여성의 첫 자녀 출산 연령을 낮아지게끔 했다. 1970년 동독 여성의 첫 자녀 평균 출산연령은 21.9세에 불과했다. 구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별명 '무티(Mutti, 어머니)'가 전형적 동독 여성상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이가 진정한 어머니라는 뜻이다.

반면 서독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서독 역시 전쟁의 여파로 남성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기에 다자녀 가구를 원했다. 이를 위해 서독은 '집에 있는 어머니상'을 모범으로 삼았다. 남성은 노동하고, 여성은 아이를 많이 낳아 집안에만 머무는 모습이다. 서독에서 직장 여성은 '까마귀 엄마(Rabenmutter)'로 불리었다. 새끼를 신경 쓰지 않는 까마귀에 여성을 빗댄 말이었다. 노동하는 여성을 나쁘게 봤다. 서독은 68혁명의 여파로 젊은 세대가 들고일어나서야 아주 느린 변화를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원했고, 출산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동서의 차이는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막스 플랑크 재단이 2011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8년 현재 신연방주 지역 여성의 첫 자녀 출산 평균연령은 27.5세며 구연방주 여성의 경우는 28.7세다. 구 동독 여성들이 첫 자녀를 더 빨리 출산하는 경향은 재통일 후 한 번도 뒤집히지 않았다. 여성을 가정에 가두기 전략과 복지를 강화해 여성의 육아 부담을 줄이기 전략 중, 출산율을 높이는데 어떤 정책이 효과적인가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 동독 시절 보육 정책의 일환이었던 '단체 변기 시간'의 사진은 베를린 DDR박물관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flickr.com

동독 여성은 재통일의 피해자

재통일 후 구 동독 지역의 모든 것이 서독식으로 변했다. 대 여성 가치관도 서독식으로 재정립됐다. 어차피 동독 지역 노동자들 상당수는 해고 대상자였다. 여성 대부분이 일자리를 잃고 가정으로 내몰렸다. 이제 미숙련 구 동독 여성 노동자는 '까마귀 엄마'라도 되기 위해 비정규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2013년 독일경제사회연구소(WSI) 발표에 따르면, 2010년 현재 독일 여성의 47.5%는 시간제 근무를 하는 반면, 남성의 경우 8.5%에 불과했다.

재통일이 독일 여성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달 12일 울리케 아우가(Ulrike E. Auga, 54세) 베를린 훔볼트대학 교수를 만났다.

동베를린 태생의 아우가 교수는 문화, 젠더, 종교철학 등을 연구했다. 동독 시절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재통일 후에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아우가 교수는 구 동독의 여성 노동을 현대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동독 여성이 재통일의 피해자라는 평가에 부분 동의했다. 서독식 제도, 곧 자본주의적 제도가 모든 것을 휩쓰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고도 물었다.

아우가 교수는 재통일의 여파 자체를 조금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구 동독이 통일 독일의 '내부 식민지'가 되어버렸다는 시각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과연 진정한 자유가 있는 체제라고 볼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아우가 교수의 자택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 울리케 아우가 훔볼트대학 교수. 그는 여성, 문화적 관점에서 독일 재통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특별취재팀

동독 여성 인권 > 서독 여성 인권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로 인해 특히 구 동독 여성이 일자리를 많이 잃었다. 재통일이 구 동독 여성에게는 재앙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의하는가?

아우가 : 우선 동독 당시 여성의 노동 상황을 정리하고 싶다. 법적으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로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사회의 모든 일자리에 남녀가 동등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면 당연히 남녀를 가리지 않고 동일한 임금을 받았다.

따라서 동독의 여성은 남편의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물질적 기반이 있었기에 여성이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해방적 사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평등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서독과 달리) 구 동독에서 포르노그래피가 불법이었다는 점도 짚고 싶다. 동독 정부는 여성의 몸을 물질화, 상품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물론 동독이 특별히 여성 친화적인 국가여서가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슈타지는 대국민 체제 교육을 위해 '서방의 타락' 실태를 홍보하곤 했는데, 당시 주로 사용한 사례가 록 음악과 포르노그래피였다. 편집자.).

동독의 여성 인권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은 임신 3개월째까지는 낙태가 합법이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서독에서는 종교적 문제로 인해 낙태가 불법이었다. 하지만, 동독에서는 아니었다. 이 같은 차이가 재통일 후 큰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졌다. 구 동독 지역에서는 여성이 '내 몸의 권리를 내가 가졌는데 왜 낙태를 못하게 하느냐'며 크게 반발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독일은 동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이 같은 동독 시절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구 동독 여성을 재통일의 피해자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굳이 '피해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자칫 구 동독 여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여겨서다.

프레시안 : 서독식 흡수 통일이 여성에게 더 가혹했던 건 사실이라고 볼 수 있나?

아우가 : 재통일 후 구 동독 여성들의 법적 권리, 경제적 권리가 분단 시절에 비해 제한되었다고 볼 수는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에는 매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정상 가정에서는 여성이 전업주부여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가 대단히 강했다. 베이비붐 시대가 지나고도 노동자가 부족하자, 1970년대 이후 서독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스, 터키 등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도 여성에게는 일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반면, 동독의 사회주의 정부는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는 이념에 충실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독과 같은 접근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은 서방과의 비교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실제 ‘여성해방’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성 역할 차이도 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구 동독 여성들이 재통일 후 대량 실업의 여파에 휘말렸다. 이는 남녀 모두에게 공통된 사건이었지만, 여성의 실업률이 더 높았다. 여성들은 이에 더해 서독식 '정상가정'의 굴레에도 얽매였다. 재통일 직후 당시 구 동독 지역에는 싱글맘, 이혼 여성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 서독식 시각은 이 같은 여성을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재통일의 여파를 극복하고서도 한 번 시작된 차별은 구조적으로 남았다. 구 동독의 경제·사회 시스템의 기본은 보육이었다. 남녀 모두 일을 해야 했기에 아이는 국가가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독에서는 이 같은 제도가 미비했다. 그나마 재통일 후 많은 여성주의자와 시민운동가들이 노력해서 제도가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하다.

프레시안 : 재통일 후에도 신연방주와 구연방주에서 보육 체제에 차이가 있나?

아우가 : 단언하기는 어렵다. 독일의 교육 제도는 주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그런 잔재가 조금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관해 예나에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조경혜 번역가는 신연방주 도시인 예나의 보육 시스템이 서독 지역에 비해 더 저렴하고 체계적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인 유로타워. '유럽 금융의 심장'이라 할 만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내적으로는 서독식 자본주의 체제의 완승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특별취재팀

자본주의는 절대선이 아니다

프레시안 : 이처럼 문화, 체제가 달랐던 동서 독일이 일방적인 서독식으로 통일됨에 따라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많은 이가 최근 독일의 문제로 떠오른 극우 시위 사태 등을 재통일의 연장선에서 보고 있는데, 이에 동의하나?

아우가 : 재통일 후 독일 매체가 동독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가 중요하다. 동독은 실패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너무 컸다. 이 같은 시각의 조명이 이어지면서, 동독은 '내부 식민지화' 되었다. 동독을 나쁜 체제로 보는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독재와 타협하지 않은 동독 출신까지 모두 한 단계 낮은 이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이런 시각은 이른바 '제1세계'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자유를 기준으로 다른 세계 사람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일반적 태도다. 독일로 돌아가자면, 서독식 자본주의 가치를 자연주의화함으로서 일종의 세계의 기준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니, 구 동독 출신은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더해, 나의 세상에 누군가는 넣고, 다른 누군가는 배제하는 건 모든 세상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체제 안의 사람, 너희는 바깥의 사람이라는 배제의 논리가 동서독 사이에서는 물론, 최근 난민 문제에서도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정체성'이나 '오스탈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다.

프레시안 : 서독에 대한 동독인의 반발로 오스탈기 현상이 강해졌다는 평가에도 동의하지 않는가?

아우가 :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면 위험하다. 정체성의 단위는 흔히 국가 차원에서 정의된다. 독일로 따지자면 '넌 (수준이 낮은) 동독 출신'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단어가 지배하면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잘못이 재통일 후 독일 내에 존재했다. 단순히 정부 차원에서만 위계가 내려지지 않았다. 시민 사이에서도 정체성에 따른 낙인 현상이 발생했다. 지배적인 담론에서 잘못 사용하는 단어를 바꿀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프레시안 :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나?

아우가 : 미디어가 승자와 패자를 나눠서는 안 된다. 독일 미디어는 계속해서 동서를 승자와 패자의 기준으로 나눴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남북이 통일로 다가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누군가는 낙오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남북 사회는 낙오자를 최소화하는 경제 체제를 새롭게 만들려 노력해야 한다. 즉, (남북 일방의 방식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이 같은 담론을 꾸준히 재생산해야 한다.

▲ 아우가 교수 역시 당시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동독 정부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서독식 일방주의에도 저항한다. ⓒ특별취재팀

대안 공동체의 모색

아우가 교수의 개인사 역시 흥미로웠기에, 이 부분에 관한 질문도 이어졌다. 아우가 교수는 청소년기에 동독 정부로부터 학업 금지령 제재를 당한 바 있다.

프레시안 : 젊은 시절 학업 금지령을 받았다고 들었다. 왜 받았나?

아우가 : 동독 시절 특히 기독교 가정의 자녀는 아비투어(대학입학시험) 자격을 받기 어려웠다. 난 개신교 가정의 자녀였고, 아버지는 수의사였다. 동독 당시 기본적인 교육 원칙상 아비투어를 보기 힘들었다. 종교 문제에 더해 아버지의 직업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동독은 부모가 노동자일 경우 아이는 공부를 더 하게 유도했고, 부모가 엘리트라면 아이가 노동자가 되도록 했다.

이에 더해, 나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더 안 좋았다. 고모와 이모가 서독으로 몰래 도망치다 잡혔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자체도 독재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아버지는 SED 당원이 아니었고, 나 역시 청소년기 당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바 있었다. 아비투어 자격을 받을 수 없었다.

프레시안 : 그럼에도 분단 시기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가능했나?

아우가 : 공교육 체계와는 별개로, 교회가 선교 목적으로 제공하는 교육 시스템(Sprachenkonvikt, 교회 기숙 학교)이 있었다. 이 기관이 기독교 교육에 더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성경을 위한 언어도 가르쳤다. 난 대학 진학 대신 이곳에서 교육 받았다.

프레시안 : 당시가 몇 년도인가?

아우가 : 1987년이었으니 23살 때다. 동베를린의 교회 기숙 학교에서 5년간 공부했다. 30~50명 정도의 동료들과 함께였다. 재통일 후 내가 이수한 프로그램이 서독의 비슷한 교회 프로그램과 함께 훔볼트 대학에 통합되었고, 덕분에 난 훔볼트 대학 학위 이수를 인정받았다.

프레시안 : 동독 후반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당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선 걸로 안다. 당시 교수께서 지향한 건 동독 내부의 개혁이었나, 아니면 서독과의 통일이었나?

아우가 : 이는 내가 왜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는지와 연관해서 답해야 할 듯하다. 나를 포함해 당시 많은 이들이 (통일이 아니라) 동독에 '연대하는 공동체'를 만들기를 꿈꿨다.

동독 설립 후 많은 동독인이 비록 서독보다는 가난해도, 도덕적이나 공동체적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의 여파로 인해 체제가 무너져갔다.

이를 대체할 가능성을 나는 교회에서 보았다. 당시 교회에는 나뿐만 아니라 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이가 모였다.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은 교회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에 독재 정부에 대항했다.

프레시안 : 서독과의 통일을 생각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나?

아우가 : 그렇다. 당시 우리는 동독식 공산 독재의 폐해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서독식 자본주의 역시 원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는 착취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제3의 길을 우리 스스로 찾기 원했다.

실제 이상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는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노력(중앙원탁회의, 1989년 12월 7일, SED 수뇌부와 시민운동가가 만나 민주적인 새 체제 수립을 위해 만든 기구)이 구체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급박한 과정을 지나 동독은 서독에 흡수됐다. (통역: 추영롱)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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