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선택에 따른 북한 진로의 세 가지 시나리오

[프레시안 심포지엄]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와 숙제 <2>

13일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 '남북 북미 화해 시대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에서 제 1세션 발제자는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다. 이 교수는 먼저 남북, 북미간 정상 회담이 진행되기까지 동북아와 미국의 상황을 짚었다. 이어 현재 가장 큰 화두인 북미협상의 교착 원인에 대해 분석한다. 나아가 한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까지 제시한다.

주목되는 부분은 이이 교수가 북한의 태도, 그리고 미국의 태도에 따른 2018년 '평화 협상 국면'의 시나리오를 제시한 부분이다.

이 교수는 싱가포르 북미선언의 근본 취지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평화협정도 아닌 종전선언이 마치 북한 비핵화의 대가인 것처럼 주장하는 미국의 태도는 일방주의라면서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다 창의적이고 과감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이번 협상의 향후 전망에 대해 첫째 안정적인 평화체제, 둘째 불안정한 평화체제, 셋째 미국의 군사적 압박 속의 북한 핵무장 강화 등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 교수의 발제문을 '북미 협상 교착 상태의 원인'과 '한국 정부의 과제와 향후 시나리오'로 나눠 2편에 걸쳐 <프레시안 지면에 싣는다.

첫번째 꼭지는 '싱가포르 선언의 본질, 그리고 북미 협상 교착의 배경'이다. 이어서 두 번째 꼭지는 '북한의 선택에 따른 북한 진로의 세 가지 시나리오'다.

1편 바로가기 : 싱가포르 선언의 본질, 그리고 북미 협상 교착의 배경

9월 5일 정의용 방북특사단을 통해서 본 한국 ‘중재’ 외교의 현주소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발간한 자서전 <운명>에서 자신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한 노무현 정권의 일관된 외교 원칙은 ‘균형외교’였다고 밝혔다. 2017년 집권 후 북한 핵문제로 위기가 고조되어간 2017년 7월 이후 한동안 문재인 정부는 ‘균형외교’를 지향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균형외교에 대해 미국 등 주변국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 개념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으며 대신 2018년에 들어 ‘운전자 외교’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앞서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문재인 정부의 균형외교 내지 운전자 외교는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는 화성-15형 ICBM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대북한 선제타격 위협이 절정에 달했던 때인 2017년 12월 14일 전격적인 한중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전쟁불용론을 명확히 밝힌 것에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법으로의 대전환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로 삼은 것은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문재인정부의 균형외교 내지 운전자 역할의 성과임이 분명하다. 나아가 3월에 들어 북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천명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북미정상회담과 북미정상 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 데에 문재인정부의 운전자 역할은 주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미간에 약속되었던 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전격적인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를 살려낸 것 역시 그러했다. 싱가포르 선언 이후 북미협상이 교착에 빠지면서 2018년 8월 하순 예정되어 있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을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취소하면서 부각된 외교적 위기에서 문재인 정부는 정의용 특사단의 2차 방북을 진행하여 북미협상의 불씨를 살려낼 수 있었다. 이 역시 문재인 정부가 자처하는 운전자 역할의 발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9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이 파견한 정의용 특사단의 2차 방북의 결과는 문재인 정부의 운전자 역할의 성과와 함께 그 한계도 일정하게 노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의용 등의 2차 방북에서 특사단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회합을 갖고 9월 18-20일 3차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일정을 확정했다. 또한 그 회담 전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소하는 데에도 합의를 보았다. 다른 한편 2차 특사단 방북의 주요 목표였던 북미 간 협상의 교착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중재’ 노력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한계도 보여주었다.

특사단의 2차 방북은 북미 간 협상 교착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을 직접 듣고 확인하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특사단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밝힌 내용은 대체로 여섯 가지 정도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첫째, 김정은 위원장은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의 3분의 2가 파괴되어 핵실험 영구 불가능해졌음을 지적했다. (평안북도 신의주 근처의) 동창리의 북한 유일의 미사일 엔진시험장을 폐쇄한 것 또한 매우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북한의 조치들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평가가 인색한 것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러한 김정은의 발언은 북한으로서는 쌍잠정의 북한 측 조치, 즉 북한 핵 및 미사일 개발 중단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 것인데, 한미동맹이 이에 상응하려면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북한에게 비핵화 초기조치 선행을 요구하면서 그것이 관철되지 않자 미국이 한미연합훈련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위협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함을 재천명했다. 그는 핵무기 없는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확고함에도 미국이 여전히 불신감을 갖고 있는 것에 유감을 토로했다.

셋째,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에게 동시 행동의 원칙을 재차 강조했다. 2차 방북 결과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특사단장을 맡았던 정의용 안보실장은 “미국이 요구해온 북한의 현재 핵 능력에 대한 초기조치 관련 언급은 없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북한은 동시 행동 원칙이 충족된다면 조금 더 직접적인 비핵화 조치들을 취할 용의와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고 답했다.

넷째,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신뢰에 기반해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내에 북한과 미국 간에 70년 간의 적대적 역사를 청산하고, 북미 관계를 개선해나가면서 비핵화를 실현 했으면 좋겠다”고 특사단에게 말했다. 미국이 상응하는 북미관계 개선 일정표를 제시한다면 북한은 신속한 비핵화 일정표로 부응할 의사가 있다는 메시지였다.

다섯째,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관점에서는 무리한 일방적인 조치들을 미국이 요구하는 행태가 지속됨에 따라 미국이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진정으로 원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왔음을 토로했다. 그는 “내가 비핵화를 천명한 판단이 옳았다고 느낄만한 여건을 만들어달라는 얘기를 미국에 전해 달라”고 특사단에게 주문한 것이다. 북한 지도부 안에서 북미협상의 가치에 대한 회의론이 형성되고 유력해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볼 대목이기도 하다.

여섯째, 김정은 위원장은 종전선언은 한미동맹 약화나 주한미군 철수와는 무관한 별개의 조치임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일단 종전선언에 한정된 발언이기는 하지만, 나아가 평화협정 협상에서도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고집하지 않고 그 문제에 열린 자세를 보일 개연성을 높여준다.

요컨대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이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중단한 데 대해서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지속하는 쌍잠정을 지키는 가운데 미국이 동시 행동의 원칙에 따른 협상에 임한다면 북한은 비핵화를 진행할 확고한 의지가 있을 뿐 아니라 더 직접적인 비핵화 조치도 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의 동시행동 원칙에 따른 맞교환을 규정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서)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 1기 임기 안에 완수하는 일정표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

이번 정의용 특사단 2차 방북은 의미 있는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중재안이 제시되고 논의된 데 있다기보다는, 북한 최고 지도부의 입장을 우리 정부 최고책임자들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직접 확인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특사단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길게 밝혔지만, 특사단과 만찬을 같이하지는 않았다. 청와대가 애초 기대한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정의용 특사단의 이번 2차 방북의 역할은 6.12 선언 대원칙의 관철을 주장하는 북한과 그것을 우회하려는 미국 사이의 대립 사이에서 한국이 뾰족한 중재안을 제시했다기보다는 미국이 대원칙을 무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확인하고 그것을 국제사회에 전달한 정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성격의 만남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설적으로 말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북한으로서는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 공동선언에서 합의하고 공식 천명된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비핵화’라는 대원칙의 구체적인 관철을 위해서는 문재인정부가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보기에 문재인 정부는 첫째,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북미간의 협상에 대한 제3자적 관점을 취하면서 미국에 대한 대원칙의 실천을 압박하는 행동을 강력하게 취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둘째로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본격적이고 공개적인 논의를 회피하면서 북한 비핵화 대 (정치적 선언 차원의) 종전선언의 구도로 몰고가는 미국의 전략에 대해 한국정부가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불만이 표출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정면 거론이 필요하다

북미 간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 이유는 남북 간의 4.27 판문점선언에 이어 북미 정상이 6.12 싱가포르 선언에서 공식 천명한 북한 비핵화 로드맵의 요체, 즉 북미 간의 대등하고 동시적인 행동 교환을 규정하는 평화협정 체제에 의한 북한 비핵화 구현이라는 원칙이 미국 행정부 안에서 여전히 강력한 채로 있는 다양한 형태의 북한 비핵화 선행 요구와 부단히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한국정부는 4.27 판문점 선언에서 “2018년 안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완료”한다는 원칙에 분명히 동의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그러한 원칙과 함께 미국이 제기해온 다양한 형태의 북한 비핵화 선행조치론 사이에서 때로 스스로 입장이 불분명하거나, 때로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 선행조치론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함으로써 말 그대로 “가야할 노선은 미국이 정하고 한국은 운전만 하는,” 그래서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미 간 협상에 맡긴 채 방관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던 것은 아닐까.

북한 비핵화의 실질적인 진행은 북한과 미국이 서로 줄 것과 받을 것을 포괄적이고 동시적으로 규정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의용 특사단의 2차 방북 때 김정은이 재차 강조한 것 역시 그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정부는 협상 교착의 원인과 해법의 본질에 관해 정면으로 명확하게 언명하는 것을 회피해왔다. <CNN>을 비롯한 미국 언론은 트럼프의 폼페이오 방북 취소 원인이 된 김영철 편지의 내용이 그 점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비해서 한국 언론은 평화협정의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문재인정부의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일견 어려워하는 태도가 언론에 투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2018년 8월 하순 폼페어오 국무장관의 방북이 취소된 배경과 관련하여 <KBS> 뉴스를 포함한 한국 언론사들의 해석은 미국은 비핵화 선행을 요구하는 데 비해서 북한은 “종전선언”이 먼저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정부가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정상공동선언의 기본 취지가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북한 비핵화”라는 대원칙에 대한 한국 및 미국 정상들의 동의였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에 명확하게 밝히고 여론을 설득하려는 노력에 대한 소극성으로 비칠 수 있다.

북한의 선택: 북한 진로의 세 가지 시나리오

6.12 싱가포르 선언의 취지와 행정부 안팎의 강경파들의 북한 비핵화 선행조치론 사이에서,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과 보수적인 관료집단의 관성적인 대북정책 패러다임 사이에서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 진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향후 선택하게 될, 또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진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

북한은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데에 있어서도 역시 본질주의적 설명을 경계하고 상호작용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핵무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노선을 갈 것이라는 본질주의적 비관론이나 북한은 전적으로 비핵화를 준비하고 있다든가 하는 낙관론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도 아니며 현명하지도 않다고 생각된다. 북한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한미동맹이 북한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의해서 판가름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향후 북한이 어떤 길을 갈 것인가는 역사적으로 열린 문제라고 생각되며, 북한의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안정적인 평화체제: 조약 형태의 평화협정에 의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한이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 공동선언 성립으로 기대한 최고치는 물론 쌍잠정(쌍중단) 상태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북한의 핵리스트 제출 등 비핵화 초기조치들을 모두 평화협정 협상의 대상으로 삼아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및 경제제재 해제의 일정표를 ‘일괄 타결, 단계적 실천’을 골자로 한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맞교환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해서 그 일정표에 따라서 비핵화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평화협정은 미 의회가 조약으로서 비준함으로써 초당적 지속가능성이 확보되는 것을 말한다. 2018년 말까지 이러한 평화협정이 타결되어 미 의회의 비준을 획득하게 된다면, 지난 9월 5일 2차 김정은 위원장이 정의용 특사단에게 밝힌 희망처럼 평화협정의 이행에 의해서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공고히 하는 과정은 트럼프 행정부 1기 임기 안에 마무리짓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안팎의 대북 정책이 6.12 싱가포르 선언을 존중하는 것으로 정리되어 일관성을 띠게 될 경우에 가능한 북한의 진로이다.

이 경우 북한으로서는 위험대비책(hedging against risk)의 유혹이 크지 않게 된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도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평화체제 속에서 비핵화가 실현되면 동아시아 공동안보 질서 구축의 기반이 된다. 6자회담의 역할을 통해서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Nuclear Weapon-Free Zone in Northeast Asia)의 구축도 그 가능성이 열린다. 한반도 비핵화와 일본의 비핵3원칙을 제도화하여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자유로운 비핵무기지대로 묶는 것을 가리키는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 건설은 또한 이 지역에서 미·중·러 3대 핵보유국들의 핵군비경쟁과 핵의 군사적 역할을 제한하고 축소시킬 수 있는 장치이다. 동아시아 공동안보 질서 구성의 일차적인 어젠다이자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미동맹과 북중동맹은 북한의 대외 경제 및 외교관계가 정상화되고 북한 비핵화를 포함한 평화협정 이행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동시에 해소될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서도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이 북중동맹과 함께 잔존할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성되는 상황에서는 전시작전권이 한국에 완전히 회수되는 가운데, 주한미군의 동아시아적인 광역적 역할을 의미하는 전략적 유연성은 폐기될 것이다. 그런 조건에서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사라질 것이란 주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의 동아시아 전략의 주축인 미일동맹의 안정성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일정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데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 내 정치적 조건이 지속되는 한 미국도 동맹과 적어도 상징 수준의 주한미군을 유지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2) 불안정한 평화체제: 조약이 아닌 일련의 행정협정에 의한 평화체제 구성

미국 정부 안에서 6.12 싱가포르 선언의 대원칙에 대한 일관성 있는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국 정치권 전체에서도 초당적인 비준을 기대할 수 있는 조약 형태의 평화협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평화체제에 의한 북한 비핵화라는 원칙을 존중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는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미 의회에 상정하여 상원의 비준을 얻어내는 것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1994년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체결한 제네바합의는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사보타지 속에서 표류하다가 공화당 정권으로 바뀐 후인 2002년 결국 미국에 의해서 파기되었다. 2015년 7월 14일 이란이 미국 오바마 행정부와 체결한 ‘이란 핵협정’은 2018년 5월 초 트럼프 공화덩 정권에 의해서 폐기되었다. 둘 모두 의회의 초당적 비준을 받은 조약이 아닌 행정협정에 불과했다. 이 두 협정들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핵 프로그램을 가진 반미적인 약소국가들의 비핵화를 위해 이 나라들과 미국이 맺은 대표적인 ‘비핵화 협정’들이었다. 그런데 이 둘 모두 결국엔 미국에 의해 폐기되었다. 북한은 행정협정이라도 차선책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협정체제는 북한에게는 ‘불안정한 평화체제’일 수밖에 없다.

불안정한 평화체제에서 북한의 선택은 조약에 근거한 안정적 평화체제에서와는 다른 행동과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국 또한 좀 더 쉽게 북한에 대해 협정 폐기를 위협할 수 있으며, 정권이 바뀔 경우에 그렇게 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북한으로선 자신이 비핵화 일정을 지키더라도 미국이 정치적 지형의 변화로 협정을 파기할 위험성이 상존하므로, 위험 대비책(hedging against risk)을 개발할 유인(誘因)이 커진다. 그만큼 상호 불신 속에서 협정 이행 자체가 좌초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로 인해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그것이 마침내 폐기될 때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북미 사이의 군사적 긴장은 재연되기 쉽다. 그러한 상황은 북한으로 하여금 헷징(hedging)의 유혹을 강화시키고, 그러한 의심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더욱 불신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수준의 평화체제에서는 둥북아시아 비핵지대 모색 등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실현은 어려울 것이다.

또한 불안정한 평화체제에서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북중동맹과 함께 한국과 북한의 안보체제의 중심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군사적 위기의 지속이 내포한 장단점과 안정적인 평화체제가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서 가질 수 있는 장단점을 두고 고민하다가 그 절충 내지 타협으로서 ‘불안정한 평화체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내 강온파의 대립의 결과로서 혹은 강온파 간의 ‘견제와 균형’의 결과로서 ‘불안정한 평화체제’가 도출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 미국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의 북한 핵무장 강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외교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실질적인 대북한 안전보장과 경제관계 정상화를 담은 상응하는 일정표를 동시적으로 제시함이 없이 북한의 비핵화 일정만을 일방적으로 재촉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게 된다. 비록 외견상 대화 국면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핵무장 유지와 확대를 꾀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의심과 불신을 심화시키게 되고, 그 결과 북미 평화협상은 실종될 수 있다. 그 상황은 다시 북한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핵무장 확대를 선택하게 만들 것이다.

2018년 9월 초순 현재 미국이 평화협정 협상에 본격 응하고 있지 않음에 따라, 북한은 종전선언이라도 확보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억지하는 가운데 유엔의 대북한 경제 제재의 부번적인 완화라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6.12 싱가포르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보이는 비일관성은 북한이 미국을 신뢰해야 할 이유를 더욱 축소시키고 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1월 중간선거 이후 의회 권력 판도 변화 가능성과 정치적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탄핵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만일 트럼프가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면 비록 최종적으로 탄핵이 되지 않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은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보수적 대북정책의 관성에 빠진 관료집단의 저항을 누르면서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인 선택과 결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대북한 평화협상의 동력은 크게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을 북한은 의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그러한 사태가 전개되면 북한이 의존할 것은 1) 북한의 핵무장 상태; 2) 2018년 3월 5일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 천명 후 복원된 북중관계; 3) 6.12 싱가포르 선언으로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공식 천명한 ‘평화체제에 의한 북한 비핵화’라는 대원칙이 될 것이다. 북한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는 6.12 싱가포르 선언에 따른 평화협상의 실패 책임을 북한이 아닌 미국에게 묻게 될 것이다. 이로써 유엔 대북 제재 이행에 저항할 수 있는 국제적 명분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핵무장을 은밀하게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동창리 엔진시험장은 폐쇄했다고 하지만, 엔진시험장을 다시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굳이 그것을 재건하지 않더라도 북한은 이미 완성된 중장거리 미사일등과 신형 장사정포 대량생산을 지속함으로써 적어도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한미동맹 군사력을 상대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와 괌을 인질로 삼는) ‘공포의 균형’을 강화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미국도 북한도 원하지 않는 전쟁의 위험성은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북한의 안전과 경제 관계 정상화가 동시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북한의 일방적인 비핵화 조치들을 압박하는 협상에 응하기 보다는 공포의 균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18년 올해는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결정적인 고비가 될 것이다. 한미 양국의 대북한 정책이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유지하고 이행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인가, 아니면 북한이 한미양국의 외교를 불신하고 중국에 의지하면서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추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인가, 2018년의 한반도는 그 기로에 서 있다.

북한은 1990년대 중엽 이래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국민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나가야 했던 역사적 경험을 했다. 지금도 수백만 명의 국민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이다. 이러한 “절대빈곤국가의 질곡”을 벗어나는 것이 이제 지상과제라는 북한 사회 전체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 봄 비핵화 의지를 천명한 직후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서 그 때까지 북한 국가정책의 금과옥조였던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경제발전 우선 노선을 통과시킨 것은 그 상황을 반영한다.

다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중관계와 함께 핵무장이라는 상황을 최대한 그리고 효과적인 지렛대로 삼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지속가능한 안전보장과 경제체재 해제 일정표와 동등하게 맞교환하고 그것을 미국 정치권에서 초당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의 형식으로 확보해내는 한에서만 진정한 비핵화 일정표를 제시해 합의하고 그것을 진실하게 이행할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4.27 판문점 선언과 6.12 북미정상 공동선언의 요체는 명백히 평화협정체제 건설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라는 대원칙이다. 이 대원칙이 구체적인 후속협상에서 일관성과 신뢰성 있게 관철되지 않을 때 북한은 비핵화가 아닌 다른 길을 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후자의 불행한 상황이 되면 그 책임은 결코 북한에게만 전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점 한미 양국 외교가 함께 명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사회에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북한 핵무장의 과정과 그 해소 가능성, 그리고 그 방법을 두고 존재할 수 있는 본질주의(essentialism) 내지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관점을 상호작용주의(interactionism)의 방향으로 인식론적 전환을 하는 것이다. 본질주의는 냉전주의, 냉전적 사유의 핵심이다. 갈등의 상대편을 본질주의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성질로 말미암아 우리와 공존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그래서 양립할 수 없는 타자로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태도는 극우파와 극좌파들 모두의 세계인식의 인식론적 공통분모이다.

갈등하는 상대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같이 변화해갈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할 때, 그 상대방의 존재방식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할 때, 상호작용주의가 성립한다. 상대방에 대한 나와 우리의 사유와 행동이 상대방의 존재 성격과 행동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북한의 핵무장 과정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잠재성에 불과했던 것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개의 결과로서 현실화되고 촉진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북한 핵무장 상태의 지속 여부 그리고 그 팽창 혹은 평화적 해소의 여부는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북한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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