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이 왜 김해를 떠났을까?

"합천은 고향이라는 거 말고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김해가 메이저이고 나머지는 마이너다"

"낮은 벼슬아치는 밑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술아치는 위에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고 있다/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백성을 수탈한다/ 그들은 가죽이 다 떨어지면 털도 붙어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평소 조정에서는 재물을 받고 관리를 등용했다/ 재물은 모았지만 백성은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장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없고 성(城)에는 군졸이 없어 왜적이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 듯 침입했다/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괜히 오랑캐를 자극해 말썽을 일으키기 보다는 겸손한 말로 온순하게 대하는 것이 낫다/ 과연 적의 침략을 막아낼 계책이 없다는 것인가/ 대마도의 왜놈들이 본토의 왜적들과 몰래 결탁해 향도가 되어 치욕스런 왜변을 일으킨 것이다/ 어찌하여 장수를 대우하는 것은 주나라 때 법보다 엄하면서 왜적을 포용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나라 때보다 더한가."

▲최구식 전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 ⓒ프레시안(조민규)

최구식 전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은 5일 오후 김해문화원에서 남명 조식선생의 단성소(을묘사직소)를 이같이 소개했다.

최 원장은 "남명 조식 선생은 서른 살에 처가가 있는 김해 대동에 '산해정'을 짓고 18년간 머물며 학문과 인격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고 밝혔다.

즉 김해는 남명학파의 기반이자 실천적 선비정신이 꽃핀 곳이다는 것.

최 원장은 "김해지역 가야는 철에 대해서는 최강자였다"며 "즉 철의 왕국이고 신비의 왕국이다. 또한 기질도 무(武)를 숭상하는 상무정신이 강하다. 이런 정신으로 해양으로 나갔으면, 일본하고 중국 남부지방하고 아우르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패자로 우뚝 서설 것이다"고 말했다.

이른바 가야가 삼국통일을 했으면 해양 강국 영국처럼 어마어마한 나라가 됐을 것이라는 뜻이다.

최 원장은 "남명이 서울에서 김해로 올 때 서울 장안이 아주 떠들썩했던 모양이다"면서 "조식선생의 태어난 합천은 고향이라는 거 말고는 별 특별한 것은 없다"며 "그래서 김해가 메이저이고 나머지는 마이너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모든 기반이 김해에 있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원장은 "김해 김수로 왕이 AD 42년에 출발했다"며 "시작은 여기서 시작했는데 끝은 산청에서 맺었다. 마지막 왕이 10대 왕 구형왕(521년 즉위)이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기세가 대단했던 그 시절 <동사강목(東史綱目)> 역사책은 어마어마 했다"면서 "이게 다 남명선생이나 퇴계선생의 덕분이다"고 밝혔다.

최 원장은 "조선시대 광해군은 전쟁 영웅이다"며 "이 시대에 <동의보감>도 만들어졌고 남명 조식선생의 시대였다.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들 대부분은 임진왜란 의병장들이었다"고 말했다.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들은 공부도 잘했고 칼 싸움도 잘했으며 목숨 걸고 나라도 잘 지켰다는 것이다.

최구식 원장은 남명 조식선생의 간접적인 양제역 벽서사건(1547년)을 이렇게 해석했다.

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 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이기 등이 아래서 휘두르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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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규

경남취재본부 조민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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