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상에 이어 아내와 아들까지 연이은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삶의 무너짐을 학문적 수양과 백성을 향한 헌신으로 승화시킨 조선 선비의 비통하지만 치열했던 삶이 묵직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이재숙 학술연구교수는 29일 열린 '2026 명재학 학술대회'에서 이토록 참혹한 슬픔을 꼿꼿한 학문적 수양과 백성을 향한 헌신으로 이겨낸 도계(陶溪) 윤홍규(1760~1826)의 생애와 문학을 세상에 알렸다.
명재 윤증의 학맥을 잇는 파평 윤씨 가문에서 태어난 윤홍규는 18세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론이 정치적 핍박을 받던 척박한 시대를 살았다.
그의 삶은 거듭되는 상실의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을 일찍 떠나보낸 데 이어, 쉰여섯 살 무렵 평생을 의지하며 살았던 유일한 아우마저 병으로 잃고 말았다.
윤홍규는 아우의 제문에서 "남들은 절반을 잃었다 하나 나는 그 전부를 잃었다"며 통곡했고, 예순둘에는 두 번째 부인 안동 김씨가 세상을 뜬 지 40일 만에 아들 종진마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참혹한 비극을 맞이했다.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백성을 향한 애민과 헌신으로 스스로를 추슬렀다.
쉰다섯의 나이에 경상도 창녕 현감으로 부임하여 극심한 흉년을 마주하자, 자신의 봉급을 덜어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며 굶주림에 쓰러져가던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이후 영덕 현령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몰락해 가던 지역 교육 기관인 향교의 재정을 사재를 털어 되살리고, 선비의 탈을 쓴 채 향교 재산을 팔아먹던 무리들에 맞서 잃어버린 학전(學田)을 기꺼이 되찾아오는 꼿꼿한 결기를 보여주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촌에 머물 때도 장사꾼들이 오가며 풍속이 문란해진 마을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 생활 규범인 이약(里約)을 제정해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특히 가문의 교육 기관인 '종학당(宗學堂)'의 기틀을 다시 세우면서, 젊은이들이 오직 과거 시험과 출세에만 매달리는 세태를 꾸짖고 인격 수양이라는 학문의 진짜 목적을 되찾아야 한다는 엄격한 규율을 세웠다.
평생을 소박하게 살며 권력과 이익을 멀리했던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조카에게 남긴 유언장에 "장례는 힘써 절약을 따르고 헛된 꾸밈을 일체 쓸어 없애며, 나처럼 내세울 실상이 없는 사람을 위해 굳이 벗들에게 만사(輓詞)나 제문을 구하지 말라"고 당부해 마지막까지 헛된 명성을 경계했다.
이 교수는 "가족을 잃은 처절한 슬픔과 당쟁 속 소론 학자로서의 정치적 소외감을 교육 개혁과 깊이 있는 문학으로 승화해 낸 윤홍규의 생애는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선비 정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묵직한 가르침을 던진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는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와 명재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가운데 지난 29일 충남대학교 문원강당에서 '명재학의 연원과 전개 양상'을 주제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이재숙(충남대), 김연주(고려대), 윤여갑(명재학연구소), 김용흠(연세대학교) 등 연구자들의 주제발표와 박명희, 안정은, 서흥석, 김승대 등 토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도계 윤홍규의 삶과 문학 연구 △정재 박태보의 시문에 나타난 명재 윤증과의 사승 관계 △팔송 윤황 유문 연구 △소곡 윤광소의 정치 활동과 갑을록 편찬 등에 대한 발표와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