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 AI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지만 큰 터닝포인트를 고르라고 하면 올 3월 즈음인 것 같다. 이후에는 원고를 쓸 때마다 모델이 발전해서 지난번 글을 쓰던 시점의 모델은 하지 못하던 일을 최신 모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상황이다. 지난번 글을 쓸 무렵만 하더라도 대형언어모델(LLM)은 프로그래밍과 디자인은 잘 해냈지만 실제 3D 공간에 물건을 배치하는 등 시각적인 판단이 필요하고 공간을 인지하는 작업에는 서툴다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오픈AI의 GPT-6 Astra나 앤트로픽의 Opus 5.5에 이르러서는 이런 작업을 더는 못한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아주 뛰어나다고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아스트라가 처음 나왔을 때 게임 엔진과 연결하여 게임 안에 오브젝트를 그럴싸하게 배치하는 실험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아스트라가 다른 앱들을 직접 다루면서 화면을 구성하는 것까지 어느 정도 해낸다는 게 직접 사용하면서 느끼는 부분이다. '아직은 어렵다'고 여겼던 영역이 몇 달 사이에 하나씩 가능해지는 걸 보니 '몇 달 전엔 어땠지?'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날 지경이다.
이번 모델들이 나오면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경향이라면 고전 게임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해서 다른 플랫폼으로 옮기거나 한국어 패치를 만들어 공유하는 움직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란 역분석 혹은 역공학으로, 이미 있는 제품을 거꾸로 분석해서 그것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알아내는 작업이다. 비단 프로그래밍에서만 하는 일은 아니고, 기계의 구조와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방법이다. 소프트웨어에서는 실행 파일이나 실행 중의 동작을 분석해서 내부 구조를 알아내는 일을 말하며, 원래의 동작을 재현하는 소스코드를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컴퓨터가 읽는 기계어 덩어리로부터 의미를 하나씩 건져 올리는 작업이라 오랜 훈련을 거친 숙련된 엔지니어가 집요하게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해낼 수 있었다. 과거에도 고전 게임이나 게임기의 코드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하는 일들은 존재했다. 특히 에뮬레이션 작업 등에서 많이 활용되었는데, 이러한 작업들은 길게는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 여기서 LLM이 게임체인저로 등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한 번의 '딸깍' 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LLM에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지시하면 동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내놓지만, 실제로는 원본과 같게 동작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원본 수준까지 동작하게 하려면 원본에 대한 이해와 함께 다양한 검증 절차와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고전 게임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에는 게임에 대한 이해나 위화감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의 역할이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럼에도 AI의 발전에 힘입어 과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던 작업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해지면서, 유년기의 아쉬움을 채우겠다는 듯이 당시에는 한국어로 즐길 수 없던 게임들을 한국어로 패치하는 움직임이 소수만 즐기던 게임에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일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해외에서도 플랫폼 탓에 즐기지 못하던 게임을 다른 플랫폼으로 옮기는 시도들이 자주 눈에 띈다. 편의성을 위해 웹에서 실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다양하다. 웹에서 에뮬레이션하는 경우도 있고 게임 코드 자체를 웹으로 옮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는 이런 흐름을 연구할 '엑스박스 랩스'라는 조직을 출범시켰다. 엑스박스의 수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글에서 최근 몇 주 사이 게임들이 빠르게 역분석되어 다른 기기와 웹 브라우저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적었다. 오래된 게임에 새 생명을 주고 더 많은 사람이 창작에 참여할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게임의 무단배포를 긍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게임을 구입하고 보관하는 환경이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소니는 지난 7월, 2028년 1월부터 플레이스테이션(PS)으로 나오는 신작 게임의 디스크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제 소비 경향이 다운로드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게이머들의 반발은 거셌다. 특히 영국과 유럽 일부국가에서는 디지털로 구매한 영상 콘텐츠를 잃는 일도 벌어졌다. 소니는 라이선스 계약을 이유로 9월 1일부터 스튜디오카날의 영화와 드라마에 접근할 수 없게 하고 구매자의 라이브러리에서도 제거한다고 공지했다. 판매가 끝난 콘텐츠라도 이미 구매했다면 라이브러리에서 계속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디지털 콘텐츠를 구매할 때 실제로는 '이용권'을 얻는다는 설명은 약관 등으로 제시되지만, 실제 이용자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것 같다. 영상 콘텐츠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게임 이용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례다. 서버 없이도 실행할 수 있는 싱글플레이 게임조차 계정과 인증에 묶여 있다면, 이용권을 구매하고도 판매자와 권리자의 결정에 따라 플레이할 방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디지털이라는 형식보다도 구매 뒤에도 이용을 계속 허락받아야 하는 구조의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구조에 대한 불만이 나오는 한편, LLM을 이용한 리버스 엔지니어링의 확산과 함께 게임기와 게임을 둘러싼 논쟁도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PS5 탈옥 도구와 함께 다른 게임기의 에뮬레이터나 거의 현세대에 가까운 게임들을 탈옥한 기기에서 실행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PC에서 PS5 독점 게임을 실행하려는 프로젝트들도 진행되고 있다. 과거 게임기의 보존뿐 아니라 현역 게임기와 신작까지 대상이 되면서, 현재 직접적으로 수익을 낳는 사업 영역과 직접 충돌하는 셈이다. 일종의 영업방해다. 게임기를 분석하고 제약을 바꾸려는 시도들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참여자들의 목적이 모두 불법 복제나 배포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신작 게임을 무단으로 복제하고 배포하는 행위를 회사를 탓하며 정당화할 수는 없다.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무단 복제와 배포는 부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리버스 엔지니어링까지 부정해야 할까. 게임을 산다는 것이 그 게임의 저작권을 산다는 뜻은 아니었다. 패키지 시절에도 디스크와 그 안의 복제물을 갖는 일과 게임을 이용하는 일, 저작권을 갖는 일은 달랐다. 다만 그 시절에는 패키지를 보관하면 게임을 계속 이용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쉬웠기 때문에 패키지와 이용권을 하나처럼 받아들였다. 자신이 산 게임을 계속 실행하고, 고장 난 부분을 고치고, 더는 지원되지 않는 환경에서 옮겨올 여지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게임이 서비스로 가면서 과거에는 게임의 데이터를 고쳐 쓰거나 '트레이너' 같은 프로그램을 써서 편하게 즐기던 행위도 이제 다른 이용자나 서비스 운영에 영향을 주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는 특히 경쟁과 서비스가 결합된 온라인 게임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1980년대 국내에서는 선진국의 기술을 분석해서 써보자며 애플 II 컴퓨터를 분석해 호환기를 만들어 파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의 복제와 판매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완성된 기계를 열어 분석하고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기술을 배우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선 기술을 분석하고 시험하면서 자기 기술을 익히는 것과 남의 설계나 코드를 그대로 판매하는 행위의 정당성은 구별해서 판단해야 한다. 기술을 들여다보는 것과 베껴서 파는 일을 묶어서 금지한다면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불리한 쪽은 계속 불리하게 된다.
이러한 힘의 비대칭은 개인과 회사 사이에도 있다. 회사는 판매와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끝낼 수 있고, 라이선스 계약에 따라 콘텐츠 제공을 중단하거나 펌웨어 업데이트로 기기의 기능을 바꿀 수 있다. 이용자는 항의하고 제도 개선을 요구할 수 있겠지만, 제도적인 대응에는 시간이 걸린다. 당장 실행되지 않는 게임을 다시 실행하기는 힘들다. 그런 점에서 리버스 엔지니어링은 자신이 정당하게 확보한 게임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일정한 제품에 대해 제조사의 수리 의무를 정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수리를 방해하는 행위를 제한하는 제도도 마련했다. 게임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게임 보존의 영역까지 가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게임의 보존, 서비스를 끝낸 회사의 권리와 후속 비즈니스의 가능성, 게임을 계속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요구가 전 세계에서 얽히는 중이라 단기간에 일이 깔끔하게 풀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과정에는 계속 이용하겠다는 이유로 권리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서버에 의존하는 게임의 서비스를 끝낼 때 이용자에게 계속 플레이할 방법이나 환불을 제공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서비스 중심의 현대 게임에서 서비스를 끝내는 회사가 이용자에게 어떤 대안을 남겨야 하는지 물어볼 부분이다. 어쨌든 리버스 엔지니어링에 대한 권리는 돈을 냈으니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작동 원리를 분석하는 것과 보호 장치를 우회하는 일, 복원한 코드와 원본의 게임 리소스들을 다른 사람에게 배포하는 일은 모두 구분하고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보존을 위한 작업과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가 얽히는 이런 상황에서는 기술을 다룰 때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산 게임을 분석하고 계속 이용할 방법을 찾는 일까지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언제까지, 어떤 환경에서 이용할 수 있는지를 플랫폼 기업만 결정하도록 둘 것인가. 이것이 기술의 주권을 빅테크에게만 맡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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