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회담'을 제안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의제인 "북한의 비핵화"나 "한반도 비핵화"를 놓고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핵 강대국들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의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자는 취지이다. 이는 조선(북한)과 미국의 핵문제 논의 방향 및 조미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다.
트럼프는 19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함께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논의하고 싶다며, 그렇게 되면 "세계를 위해 매우 긍정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중·러 정상들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3자 회담은 중국에서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는 11월 18〜19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비핵화 3자 정상회담'을 갖자는 취지이다.
트럼프는 이전에도 핵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최근 핵무기를 대폭 증강해온 것으로 알려진 중국이 참여하는 핵군축 회담을 갖자고 여러 차례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미·중·러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부터가 마땅치 않았다. 또한 러시아는 자국의 원하는 방향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중국은 미러가 먼저 핵군축에 나서야 한다며 난색을 표해왔다.
그런데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세 정상들이 별도의 회담을 여는 것은 유력해지고 있다. APEC 개최국인 중국은 미·러 정상을 초청했고 두 정상도 이를 수락했다. 또 푸틴은 10월 9일 트럼프와의 전화통화에서 러-우 전쟁 종식 방안을 핵심의제로 삼는 미·중·러 3자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3자 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3자 회담의 의제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 푸틴은 러-우 전쟁 종식을 우선순위로 삼고자 하지만, 트럼프는 러-우 전쟁보다는 "우리는 핵무기와 비핵화를 논의하기 위해 회담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중국은 3자 회담의 가능성은 열어두면서도 현재까진 회담 의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우리가 트럼프의 비핵화 3자 회담 제안에 관심을 가져야 할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때와 장소'이고, 또 하나는 비핵화에 관한 조미 정상의 '공감' 가능성이다.
트럼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연내'에 조선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희망한다고 밝혀왔다. 조선으로부터 속 시원한 답이 없자, 미국 현지시각으로 19일에는 '다음달 중국에서 김 위원장과의 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모르겠다. 회담을 하자는 제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조선이 트럼프의 제안에 확답을 주저하는 데에는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요구를 내려놓을지 불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은 행정부 차원에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원칙적인 목표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조선을 "핵보유국"이라고 부르면서 조선을 지칭하는 비핵화라는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기자들이 물어도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넘어갔다.
그런데 트럼프는 중국 방문이 다가오면서 미·중·러 비핵화 회담을 제안하고 나섰다. 이 제안이 성사될 경우 이는 세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된다. 트럼프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회담을 제안한 이유도 역사적인 업적을 세워 노벨평화상을 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구상은 트럼프의 또 하나의 희망사항인 조미정상회담과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미·중·러가 먼저 핵군축에 나서고 조선 등 다른 핵보유국도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트럼프의 구상은 김정은과 '공감'을 이룰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세계의 비핵화'는 조선의 오래된 화법이었다. 또 트럼프가 김정은을 핵보유국 지도자로 간주하면서 세계의 전략 문제, 특히 핵군축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면, 김정은으로서는 자신이 강조해온 조선의 전략적 지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로 여길 수도 있다.
여전히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11월 중순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 트럼프의 두 가지 희망사항, 즉 미·중·러 비핵화 회담과 조미정상회담 추진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 가지 예상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미·중·러 회담에서 핵군축이나 비핵화에 관한 원칙적인 합의가 나오고 트럼프가 이를 지렛대로 삼아 김정은에게 '세계의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자'며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를 김정은이 수용한다면, 우리는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가능성의 높고 낮음을 떠나 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면, 우리도 차분히 짚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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