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겅우 회고록 (1)

[왕겅우 회고록] 1

질서와 무질서의 엇갈림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어떤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역사학도로서 나는 언제나 구조 비슷한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살아온 경로를 통해 나는 서로 다른 사회들이 안정을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받았다. 나는 또한 여러 문명이 근대화의 도전 앞에서 각자의 질서를 추구하는 길을 공부했다.

내게 가장 익숙하고 깊이 얽혀 있는 문명은 중국문명이다. 중국은 보편주의 이념의 전파력으로부터 방어에 필요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두 차례 혁명을 겪었다. 하나의 혁명을 연구하고 또 하나의 혁명을 관전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통찰력이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감정의 격동을 느낀 것은 아버지가 이포의 영어 소학교에 나를 보냈을 때였다. 어머니는 중국의 가족 이야기를 해주는 노력을 갑절로 늘렸다. 내 마음이 다른 세상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분의 노력은 따져보면 20세기 전반기에 우리 집안 배경을 뒤덮은 무질서에 대한 계속 확장되는 항쟁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부모님은 청나라 말년에 장강(長江) 삼각주에 가까운 두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분들 자라나는 주변에는 혼란이 끝없이 자라났다. 민국 초기, 십 년간의 내전 속에서였다. 그 시기에 쑨원의 혁명당인 국민당은 국가 통일을 위해 십여 개 군벌과 싸움을 벌였다. 두 분은 군대가 오락가락하고 삶에 불확실성이 넘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의 왕씨 가문은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성실하게 관리 노릇을 바라보며 지냈고, 그 후에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민국 시대의 군벌 시기에 아버지는 전통적 방식의 공부로 시작했다가 근대적 대학에 입학했다. 교사직을 택했고, 싱가포르와 믈라카의 중학교에 교사로 초빙받았다. 그렇게 해서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피해 지냈다.

아버지는 수라바야의 교장직 초빙을 받자 집에서 정해 준 신부인 어머니와 결혼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함께 갔다. 어머니의 딩(丁)씨 집안은 왕씨 집안보다 복잡했다. 사업에 관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계속되는 혼란의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결과 어머니 결혼 때는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바다 건너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자바에서 나를 낳으실 때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지 나는 궁금해 하곤 했다.

부모님의 주변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민족제국들은 미개인에게 근대문명을 전파해 준다는 명분 아래 영토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지구 전체를 투쟁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 결과인 2차 대전은 그 제국들을 자멸의 길로 몰고 갔다.

영령 말라야의 한 말레이국가에 광산도시로 만들어진 이포에서 자라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부모님은 중국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사촌들로 이루어진 가족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내게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두 개 전쟁의 발발로 곧 무너지게 될 질서였다.

전쟁 하나는 중국을 토막낸 일본의 침략이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이포를 떠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일본군이 말라야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전쟁이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다. 그런 상황을 겪으며 나는 차츰 무질서를 정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1945년 유엔 창립으로 표방된 민족국가 독립의 이념은 평화로운 미래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이념이 반가웠고,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고,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47년 중국의 대학에 들어갔을 때, 혼란 중에도 특히 질이 나쁜 혼란, 중국인이 중국인을 해치는 혼란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은 말라야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성을 대표한다고 각자 자처하는 세력들이 중국을 찢어발기던 상황은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유해지는 길을 찾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식 국가 관리 방식 사이의 선택 때문에 수백만 명 인간이 죽어가야 했고, 결국 국민당 민족주의가 패퇴했다.

1949년 싱가포르에 새로 생긴 대학에 들어간 것은 행운이었다. 말라야대학에 다니며 나는 독립된 주권국가들로 이뤄지는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 새 국가를 세우는 과업에 참여할 전망에 흥분했다.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닌 후 독립된 말라야연방에 돌아와 1957년부터 쿠알라룸푸르 캠퍼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십년 동안 아내 마거릿과 세 아이와 함께 국가건설의 장래를 내다보며 살았다.

내가 되고자 하던 역사학자, 현재의 이해에 과거를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역사학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게 되었다. 중국문명에 관해 내가 배운 가장 좋은 것을 모두 배척하는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계가 이념의 냉전으로 갈라져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근현대 중국에 관한 책이 모두 금서가 되었다.

1968년에 캔버라의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서 극동사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초빙이 왔다. 내가 중국 연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는 마거릿은 캔버라에서 몇 해 지내며 내 연구를 확충하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해주었다.

말라야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생활을 20년 가까이 했을 때였다. 우리 지역의 분위기가 점점 혼란스럽고 난폭해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내 연구 활동에 가하는 제약을 외면하거나 맞서 싸우기보다 캔버라로 옮겨가서 내 공부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그로부터 18년간이나 캔버라가 안정된 조건을 보장해 준 것은 놀라운 일이다.

18년간 키워낸 기초체력과 방향감각을 가지고 홍콩대학의 초빙에 응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편입을 앞두고 홍콩에는 불확실성이 넘쳐나고 있었다. "영구조차"로 시작했다가 "99년 조차"로 바꾸고 "50년 후 귀환"으로 방향을 바꾼 불가피한 결과였다. 내게는 20세기와 작별을 고하는 기묘한 방식이 되었다.

우리는 1996년 싱가포르로 옮겨가 그 국제도시에서 새천년을 맞았다. 정면 객석에서,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계질서"가 새로운 도전들을 맞는 상황 속에 두 섬이(홍콩과 싱가포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싱가포르는 우리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마거릿에게는 자라난 도시였고, 내게는 마거릿을 만난 곳이었다. 그리고 또한 수십 년간 우리를 따라다닐 말라야에 관한 우리의 꿈이 시작된 곳이었다.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그리 오래 지내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 이곳에서 더 오래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어둡고 신비로운 바다와 오래된 대륙들 사이의 섬들로 이루어진, 경계선이 없는 지역의 질서를 위한 이 새 국가의 노력에 그 답이 있는 것 아닐까?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2252 [페리스코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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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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