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 논쟁은 개혁의 강도와 속도를 둘러싼 공방에 갇혀 있다. 검찰개혁은 지금으로 충분한가, 대통령의 통합 지향은 올바른 방향인가 개혁의 후퇴인가, 진보 진영 내부의 대통령 비판은 건전한 비평인가 흔들기인가? 이같은 질문들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이 상대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누가 더 개혁적인지를 판별하는 정통성 경쟁으로 흐르면, 정작 개혁정치가 답해야 할 진짜 질문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개혁은 시민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권력기관의 재편을 넘어 불평등한 기회의 구조를 얼마나 바꾸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사법제도의 새로운 설계와 민주적 통제는 끝까지 책임 있게 추진해야 한다. 수사와 기소가 정치적 무기로 악용되던 검찰독재의 기억이 생생한 지금 그 권력의 남용 여지를 없애는 작업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제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대한 개혁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시민이 개혁을 체감하는 곳은 정치권 내부의 공방에서가 아니다. 자녀의 과도한 교육비를 감당하는 학부모, 어려운 여건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 지방대 위기와 함께 다가오는 지역소멸의 경고야말로 개혁을 통해 돌파해나가야 할 실천의 현장이다. 권력기관 개편에 대해서는 강경하고 선명한데 이같은 사회구조의 변혁에는 미온적이라면 그 강경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게 된다.
조국 사태가 던진 두 가지 질문
조국 사태를 다시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사태는 한국 사회에 서로 구분해서 답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검찰권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행사되는가였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자산과 지위가 자녀의 교육과 진학 기회를 어떻게 좌우하는가였다. 검찰권의 선택적 행사에 대한 비판이 교육 특권에 대한 비판을 지울 수 없으며, 교육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검찰권의 남용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당시의 진영 대립 속에서 두 질문은 특정 인물을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논리에 흡수되었다. 교육기회의 불공정을 비판하면 검찰의 행태를 두둔하는 것으로, 검찰권의 남용을 비판하면 교육 특권을 감싸는 것으로 취급되는 풍토조차 있었다. 그 결과 교육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독립적인 개혁 의제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청년들이 제기한 공정성의 요구를 특정 사건의 시비를 넘어 사회구조의 변화로 연결하지 못한 것이다.
대학입시에서의 공정성 문제에서 조국 사태가 던진 질문은 '누가 규칙을 어겼는가'에 그치지 않는다. '왜 특정 대학의 입학이 가족 전체의 자원과 인맥을 동원해야 할 만큼 결정적인 일이 되었는가'를 되짚어봐야 한다. 그런 경쟁에서 출발선이 다른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어떤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진 두 가지 질문 가운데 검찰개혁이 한고비를 넘긴 지금이야말로 두 번째 질문인 교육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시간이다.
개혁의 선명성은 어디에서 증명되는가
교육개혁은 검찰개혁에 비해 덜 시급한 것처럼 여겨져왔지만 개혁정치의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곳은 바로 여기다. 검찰권력의 카르텔을 해체하는 일과 대학 서열을 통해 재생산되는 특권을 줄이는 일은 모두 중요하나 그 정치적 부담은 다르다. 전자는 부당한 권력행사를 일삼은 자들을 징벌하고 사법구조를 재편하면 되지만, 후자는 개혁정치 세력과 그 지지층 내부에조차 존재하는 이해관계와도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산과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상위권 대학 진학과 이를 통한 더 나은 기회 확보는 기득권적 보수층만의 경로가 아니다. 조국 사태가 말해주듯이 개혁을 지지하는 중산층과 정치 엘리트 역시 그 질서 안에서 이익을 누려왔다. 자녀에게 유리한 교육환경을 제공하려는 학부모로서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정과 평등을 말하면서 그같은 불균형을 방치하거나 뒷받침하고 있다면 진보정치의 설득력은 약해진다. 강경한 검찰개혁 주장이 곧 교육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장하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진보적 이념을 앞세우는 집단이라도 그런 기득권 앞에서 머뭇거린다면 시민들은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통합 지향 역시 같은 기준에서 평가해야 한다. 진정한 통합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현상을 유지하는 적당한 타협이 아니다. 오히려 수도권과 지방, 기득권층과 청년세대 등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교육 및 사회구조 개혁이라는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개혁적 통합'이어야 한다. 갈등 회피를 목적으로 불평등한 구조를 그대로 두는 통합은 기득권 유지의 언어가 될 뿐이다.
인구 감소가 요구하는 대학체제의 전환
교육개혁이 더 시급해진 것은 인구 감소의 충격이 현실화하는 시간이 목전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 학령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현재의 수도권 중심 구조를 그대로 두면 정원 감축의 부담은 지방대학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지방대학의 위축과 몰락은 지역 청년의 이동을 촉진하고 지역사회의 쇠퇴로 이어진다. 또 그것이 다시 대학의 존립 기반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예견 가능한 이같은 파국에도 불구하고 교육개혁을 미루는 것은 지역소멸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방치하자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시장주의 원칙에 따라 개별 대학의 생존 경쟁에 맡기는 방식의 교육부 정책은 시효를 상실하였다. 인구통계 상 앞으로 10년 후면 학령인구 전체와 수도권 대학의 정원이 거의 맞먹게 된다. 이대로 그날을 맞게 되면 비수도권에 과연 몇 개의 대학이 남아 있을 것인가?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학령인구 전망에 맞추어 대학 정원을 총량적으로 관리하여야 한다. 동시에 대학들을 일률적 기준에 따라 줄을 세우는 지금의 서열구조를 벗어나 연구, 교육, 기술·평생교육 등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대학체제를 개편해야 한다.
대학입시개혁도 이런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으로 대비할 수 있는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시험제도를 마련하는 동시에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켜온 과열 대학입시경쟁을 완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포용성을 높이고 지역적 불이익을 보정하는 사회통합전형을 지금의 20% 수준에서 40% 이상으로 대폭 확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구가 급감하는 시기에 지금처럼 소수 명문대 입학에 모든 것을 거는 교육풍토를 개혁하지 못하면 계층 및 지역 불균형은 극도로 심화할 것이다.
권력의 민주화에서 기회의 평등으로
물론 교육개혁만으로 서열체제를 완화하고 과열 대학입시경쟁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대학 간 서열은 노동시장의 임금과 고용안정성 격차, 학벌 중심의 채용 관행과 맞물려 있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열악한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청년들에게 대학 간판에 연연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허하다. 교육개혁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개선, 공정한 산업 생태계와 사회안전망의 강화와 이어질 때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이나 고용 관행이 바뀔 때까지 교육개혁을 연기할 수도 없다. 교육 문제와 고용환경 문제는 서로 연동되어 있는만큼, 어느 한쪽의 변화를 다른 쪽의 선결 조건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대학체제를 바꾸고 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것과 아울러 청년의 사회 진입을 지원하는 정책들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정치권의 논쟁이 진보의 선명성 경쟁을 넘어 이같은 교육 및 사회개혁의 실천방안을 중심의제로 할 때 비로소 개혁정치의 본령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시민들이 열어놓은 촛불혁명의 길에서 검찰개혁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토대일 뿐이다. 검찰개혁이 국가권력의 독점과 남용을 바로잡는 일이라면, 교육개혁은 사회적 기회의 독점과 대물림을 완화하는 일이다. 부모의 자산과 출신대학이 청년의 미래를 가르고, 수도권 집중이 지역의 교육과 삶의 기반을 허무는 현실 앞에서, 개혁의 선명성도 통합의 가치도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실천을 통해 증명될 수밖에 없다. 권력의 민주화에서 기회의 평등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국민주권정부가 촛불의 과업을 수행하는 길이다. 과연 개혁정치는 자기 진영의 이해관계까지 넘어 그 길을 열 수 있는가? 교육개혁은 그 진정성을 가늠할 시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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