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윤의 먹거리 이야기] ⑫미래의 밥상,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일

연재를 마치며

▲ 가지에 매달린 올리브 열매. 수천 년 지중해 밥상을 지켜 온 이 작은 열매처럼 미래의 밥상도 결국 오래 사랑받아 온 '잘 먹고 잘 사는' 지혜로 돌아간다. ⓒ프레시안(문상윤 기자)

열한 번의 글에서 우리는 꽤 먼 곳까지 다녀왔다. 콩으로 빚은 고기와 세포로 기른 살코기, 미생물이 만든 우유 단백질과 가루로 빻은 곤충을 보았다. 빌딩에서 자라는 상추와 배양기에서 자라는 참치, 음식을 인쇄하는 프린터와 내 혈당에 맞춘 식단, 버려지던 껍질의 재탄생과 탄소를 줄이는 밥상까지 짚었다. 하나같이 공상처럼 들리지만 이미 우리 곁에 와 있거나 머지않아 당도할 변화들이다.

이 긴 여정을 지나며 한 가지 생각이 또렷해졌다. 미래의 밥상을 이야기하는 일은 결국 미래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은 수단일 뿐이다. 물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먹는 사람이 있었다.

연재 내내 같은 두 질문이 되돌아왔다. 하나는 '왜'다. 왜 식물성 고기이고 왜 배양육이며 왜 곤충인가? 그 답은 대체로 같았다. 늘어나는 인구를 먹이면서도 지구에 덜 부담을 주기 위해서다. 고기를 적게 먹자는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같은 단백질을 더 적은 물과 땅과 탄소로 얻으려는 현실의 요구가 이 모든 기술의 뿌리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한계'다. 어느 기술도 만능은 아니었다. 배양육은 아직 비싸고 스마트팜은 전기를 많이 먹으며 맞춤영양은 과장과 상술이 뒤섞여 있다. 곤충은 영양이 뛰어나도 마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3D 프린터의 진짜 쓸모는 화려한 요리가 아니라 씹기 힘든 이를 위한 한 끼에 있었다.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는 일, 어느 쪽으로도 들뜨지 않는 균형이야말로 이 기술들을 제대로 쓰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밥상은 모든 것이 뒤바뀐 낯선 식탁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연재가 거듭 확인시켜 준 것은 새로운 기술이 결국 아주 오래된 지혜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콩으로 단백질을 얻는 일은 우리가 두부와 된장으로 수천 년 해 온 일이고 미생물로 맛과 영양을 빚는 정밀발효의 원리는 김치와 장을 담그던 손끝에 이미 있었다. 버려지던 것을 되살리는 업사이클링은 비지찌개를 끓이던 살림에 배어 있었고 탄소를 덜 내는 기후미식의 모범은 나물과 쌈이 오르던 우리 밥상 그 자체였다. 미래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래의 밥상 앞에서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를 잃는 일이다. 효율만 좇다 먹는 즐거움을 놓치고 혁신만 앞세우다 음식을 나누던 온기를 잃는다면 아무리 똑똑한 식탁도 공허하다. 음식은 영양소를 채우는 일이기 전에 누군가와 마주 앉아 하루를 나누는 일이고 한 지역의 땅과 계절과 이야기가 담기는 그릇이다. 기술은 이 본질을 더 잘 지키는 데 쓰여야지 이것을 대신하려 들 때 길을 잃는다.

결국 미래의 밥상이 향하는 자리는 거창하지 않다. 몸에 이롭고 지구에 덜 해로우며 함께 먹는 사람에게 즐거운 한 끼. 잘 먹는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오래된 진실. 아무리 기술이 앞서가도 결국 돌아올 자리는 거기다.

열두 번의 글을 함께 읽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내일의 식탁이 어떤 모습이든 그 위에 놓이는 것이 더 건강하고 더 지속가능하며 더 따뜻한 한 끼이기를 바란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그것이 미래의 밥상이 끝내 지켜야 할 하나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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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윤

세종충청취재본부 문상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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