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국회에서 열리는 두 자리
10월 6일 화요일 오전 11시, 국회에서 10월항쟁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린다. 오후 2시에는 국회 제4간담회실에서 '10월항쟁 80주년의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가 이어진다. 대구·경북의 시민단체와 진보정당 등 98곳이 꾸린 10월항쟁 80주년 행사위원회가 국회의원들과 함께 마련한 자리다. 토론회에서는 항쟁의 역사적 의미, 진실규명 현황,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이 차례로 다뤄진다. 행사위원회 임성종 공동대표는 80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항쟁의 이야기를 살아 있는 역사로 공론화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1946년 가을, 무슨 일이 있었나
1946년 9월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섰고,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 발포로 노동자 한 명이 숨졌다. 이튿날 학생과 청년이 경찰서 앞에 모였고, 미군정은 계엄령을 내렸다. 항쟁은 그해 12월까지 경북·경남·전남 등 73개 시·군으로 번졌다. 대구·경북에서만 연인원 77만 명이 참여했다고 하니, 당시 인구 317만 명의 4분의 1에 이른다. 노동자와 학생, 청년, 시민은 물론 공무원과 의사, 일부 경찰까지 가담했다.
배경에는 친일관리의 재임용, 식량난, 지연되는 토지개혁이 있었다. 해방을 맞았는데도 일제강점기의 구조가 그대로 이어진다는 민중의 분노가 쌓인 결과였다. 행사위원회 임성종 공동대표는 이 항쟁이 해방 뒤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이며, 자주적 독립 국가를 바란 민중의 미래지향적 항쟁이었다고 짚었다.
이름부터 다퉈야 했던 항쟁
이 사건은 오랫동안 '폭동'이나 '소요'로 불렸다. 임성종 공동대표는 독재정권이 항쟁의 폭력만 부각해 좌익폭동으로 몰았고, 그것은 지배자의 시각이었다고 비판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1기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좌익폭동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이 시각 때문에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도 오래 시도되지 않았다. 진화위는 '대구 10월사건'이라는 이름을 썼고, 대구시는 2016년 위령사업 조례를 만들며 공식적으로 '10월항쟁'이라 쓰기 시작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가 곧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였던 셈이다.
끝나지 않은 학살과 낙인
항쟁은 진압으로 끝나지 않았다. 체포된 이들은 대구형무소에 갇혔다가 한국전쟁 때 학살당했고, 풀려난 이들도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가 희생됐다. 1949년 12월 5일 기준 대구 보도연맹 가입자 3,332명 가운데 학생이 1,056명이었다. 이름이 확인된 희생자는 204명이지만 실제 규모는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1·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잇따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어도 전체 피해를 파악하기 어려워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많을 것으로 본다.
유족들은 오랫동안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과 경찰 감시 속에 살았다. 올해 여든두 살인 유족회 채영희 이사장은 자신과 유족들이 겪은 일을 짧게만 적어도 책 한 권으로 모자란다고 했다. 희생자를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가창골은 댐이 들어서 발굴이 어렵고, 상원리는 사유지라 손댈 수 없다. 2020년 가창골에 위령탑이 세워졌지만 유해발굴과 기록, 교육, 배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여든, 아흔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했나?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는 1970년 12월 바르샤바의 유대인 봉기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국가지도자가 직접 과거의 가해를 인정한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0년대 중반 진실화해위원회를 세웠다. 위원장 데즈먼드 투투(Desmond Tutu, 1931~2021) 대주교는 처벌보다 진실을 먼저 밝히는 길을 택했고, 가해자가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사면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우리 안에도 선례가 있다. 제주 4·3은 2000년, 여수·순천 사건은 2021년에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10월항쟁은 4·3, 여순과 함께 해방기 3대 항쟁으로 꼽히지만,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은 가장 늦은 편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되새길 점
첫째, 국가폭력은 이름을 붙여 정리하지 않으면 반복의 빌미가 된다. 회견 보도자료는 10월항쟁 때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계엄령이 발령되었다고 밝힌다. 2024년 12월 3일 밤 우리는 계엄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님을 겪었다. 80년 전 국가폭력의 진상과 책임을 따져 두는 일은 과거를 위한 작업이면서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둘째, 기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다. 지난 1일 대구지방법원은 동대구역 광장 박정희(1917~1979) 동상을 철거해 달라는 국가철도공단의 청구를 기각했다. 동상 건립 무렵 대구시에 고가교 사용권과 관리권이 있었다는 이유다. 이 판결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정리한 것은 아니다.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1905~1946)는 신간회에서 활동하고 신문사 지국장을 지낸 항일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1946년 10월 구미에서 경찰의 총에 숨졌고 오랫동안 좌익폭동 주도자라는 낙인을 안고 있었다. 구미시가 연 30억 원 규모의 박정희 기념재단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반대 의견도 나오는 지금, 항쟁 희생자들에게 국가가 어떤 기억의 자리를 마련할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셋째, 특별법에 무엇을 담을지다. 행사위원회 임성종 공동대표는 국가차원의 조사, 유족의 명예회복과 사회적 치유, 재발방지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국가의 사과, 제대로 된 역사 기록과 교육, 국가기념일 지정을 요구했다. 김상숙 박사는 발제문에서 여기에 조사범위를 전국과 한국전쟁기까지 넓히고 연좌제와 사찰피해도 함께 살피라고 제안한다.
기간이 정해진 위원회가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면 한 번 쌓은 조사성과가 이어지기 어렵다. 조사가 끝난 뒤에도 추모, 유해발굴, 역사교육을 지속할 재단 같은 기구를 법에 두는 방안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민할 만하다. 학생들이 세계의 학살사는 배우면서 우리 땅의 학살은 잘 모른다는 유족회 채영희 이사장의 지적도 교육과정에서 되짚어야 한다.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시간은 한정돼 있다. 80주년을 지나기 전에 국회가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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