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하루 앞둔 날, 괜한 걱정을 한다. 내일 태극기를 달아야 하는가? 몇 년 전부터 광복절만 되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워 광화문에서 집회하는 사람들 기사를 접하면서 태극기 게양 문제로 고민을 한다.
태극기는 특정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날 만이라도 목숨을 바쳐 독립을 위해 싸운 선열들을 기억하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인 전라북도 부안의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1893~1986) 선생을 생각한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중국·러시아를 넘나들며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에 그는 공주형무소에 갇혀있었다.
평화가 온다
김철수는 어린 시절 지금 정읍시 이평면 말목의 서당에 다녔는데, 이곳의 훈장인 서택환 선생으로부터 선비정신과 민족의식을 배웠다. 그는 “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14년에는 친구 7명과 함께 사진을 찍고서 ‘곡귀단’(哭鬼團)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더라도 귀신이 되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울자는 뜻이 담겨 있다.
1915년에는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첫 비밀 결사인 ‘열지(裂指)동맹’을 결성하였다. 민족 문제로 고민하던 김철수는 식민지 시대에 겪는 고통의 근원을 일제의 강점(强占) 때문이라고 인식하여 민족의 독립에 온 힘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귀국 후 1920년에는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이것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 사상 최초의 결사였다.
김철수는 자신이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천성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고, 특히 걸인이나 어려운 자들을 보면 도와주는 집안 고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의 독립과 가난한 자들의 계급해방을 위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1924년 귀국한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역임한다. 6·10 만세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구속을 피하고, 하반기에는 책임비서가 되어 당 조직을 이끌었다. 1930년에 검거되어 출소한 후 1940년에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예방구금 되었다.
1943년에는 열악하기로 소문난 공주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면회 온 가족으로부터 손녀가 태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화래(和來)’라는 이름을 지어 보낸다. 곧 평화가 올 것이라는 희망의 이름이다. 엄혹한 감옥에서도 민족독립이라는 당위를 끌어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의 꽃동산
해방 후 정치에 손을 떼고 1947년에 고향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 돌아와서는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했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그의 화두는 통일이었다.
통일을 염원하면서 아래의 한글 시를 남겼다.
손꼽아 기대리는 甲子年은 만났지만
장난군을 몰아내야 꽃 東山 놀러가제
아히야 뛰어나가 나팔불고 징쳐라
甲子年 頭에 92세 지운 지음
여기에서 통일을 방해하는 장난꾼이 분명 있다고 보았고 통일의 그 날을 꽃동산으로 표현했다. 그의 집에 만든 정원의 꽃동산은 통일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정성으로 보인다.
만 가지 일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꾸준한 노력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다.
김철수가 1986년 전남대 부속병원에 입원한 2월부터 3월까지의 대화 기록이 남아 있다. 필담 노트에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어려운 현실이 남아 있다.
손자 소중(蘇中)은 노트에 아래와 같이 써서 할아버지에게 보였다.
광득이가 알아봤는데요, 2년 후에 통일이랍니다.
노트에 쓰인 ‘2년 후 통일’이라는 소식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김철수에게 여전히 큰 희망이고 기쁨이었을 것이다.
사후에 독립운동을 인정
김철수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고 친북 활동의 전력이 없었다.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과 1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면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은 그에게 해방된 조국에서는 사회주의 중심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안당국을 앞 세워 감시를 했다.
김철수의 후손들 또한 불행했다. 취직이 안 되는 것은 물론, 공안의 감시는 치밀했다. 먹고 사는 경제 활동을 못 하게 한다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독립운동가의 2세들에게는 ‘추억이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는 돌아가시거나 해방 이후에도 사상 문제로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자녀들은 “순사 온다”는 말에 위축이 되고 도망하여 숨는 일이 일상이었다. 김철수의 후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후(死後)에야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한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2005년 8월 15일에 추서했다. 세상을 떠난 지 20 년만의 일이었다. 조국은 그가 죽은 후에야 항일 독립운동을 인정한 것이다.
그에 대한 서훈은 우파 독립운동가의 활동만 가르친 우리 역사에서 비로소 반대쪽의 독립운동사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었다.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김철수의 출생지에 있던 집이나 초막을 지어 살던 대수리의 선산, 딸 용화가 살던 돈지의 삼성약방은 다 팔려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은 백산고등학교 앞의 추모비와 그가 대수리 선산에 살며 평교리까지 걸어 다녔던 그 길을 김철수의 호를 따서 ‘지운로’라는 이름을 붙여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제81주년 광복절을 앞둔 2026년 8월 14일 작성되어 기고됐습니다. 외부기고는 프레시안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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