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보수적이었던 대학생, 리영희를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나다

[다시! 리영희] 리영희·임헌영의 <대화>를 다시 읽으면서 리영희와 '대화'하다

김종철 선생으로부터 '리영희와 나' 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죄송하게도 극구 사양을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시대의 어른인 리영희 선생을 가까이서 2005년이던가? <대화>가 발간된 뒤 세종문화회관에서 강연회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책에 사인을 받아온 일이 아마 선생을 실물로 본 유일한 경험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엔 보기보다 소심한 나의 성격과 집에 처박히기 좋아하는 소위 대문자 I 경향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보다는 서울사람 아님의 영향이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활발해지기 이전엔 문화도 저항도 서울사람 중심이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내가 서울로 완전히 이주한 것이 2004년이니 그때는 이미 선생이 편찮으셨다.

나의 숨은 스승 리영희

리영희는 내게는 일종의 숨은 스승이었다. 숨은 스승이라 함은, 내가 책을 통해 그분을 스승으로 삼았을 뿐 실제로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던 먼 스승을 말한다. 모든 위대한 책의 저자가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작고한 저자들, 먼 나라 사람이어서 너남없이 실제로 만날 수는 없는 저자들 등은 적어도 한국의 청년에겐 공평하게 먼 스승일 뿐.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내가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더라면 분명 어떤 계기로든 만나고 가까이 모셨을 가능성이 있다. 요는 나는 당대의 청년운동에서 동떨어져 성장했고 그랬던 이유 중 하나가 서울에서 태어나거나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모든 것이 서울 또는 중앙 중심으로 흐른 지난 세기 우리 현대사가 내게서 앗아간 또는 베푼 그 무엇에 리영희도 있었다라고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리영희와 나'라는 기획 의도를 내가 너무 편협하게 해석한 탓도 있다. '노신과 나' '임화와 나' '김수영과 나' 같은 주제로 글을 쓰라고 했을 때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못쓴다"라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이런 주제의 글이라면 그분의 인간적 면모를 익히 알고 경험한 사람들이 쓰는 게 맞다는 나 혼자만의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책과 기사 조금 읽은 주제에 그분의 인품이나 영향력 등을 안다고 또는 "배웠다" "영향입었다" 등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러웠다.

전지구적인 안목으로 세계의 변방에 속한 민중의 삶과 혁명의 기운에 주목하면서 끊임없이 독재에 저항해온 선생을 추억하는 글의 서두치고는 한심한 이야기다. 하여간 그래서, 두어 달 사양한 끝에 '리영희의 책과 나'라는 좀 더 개방적인 주제로 쓰라고 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리영희의 책으로 말미암아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한데, 늘 구경꾼 비슷했던 내가 뭐라고 쓰려니 송구했다. 어떻든 나도 선생의 첫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가 인생 경로를 바꿔 버린 세대에 속한다. 그 이야기부터 하자.

처음엔 덤덤했던 <전환시대의 논리>

1977년 가을쯤이었던가? 나는 부산대학교 안의 부산중앙고/중앙여고 연합동아리인 영목회의 동기생 한 명으로부터 독서클럽을 하자는 제안을 들었다. 그즈음 나는 학교 후문 앞 책방 주인아저씨로부터 <씨알의 소리>와 <8억인과의 대화>를 소개받아 읽으려던 참이었다.(지금까지 그 책 이름을 <5억인과의 대화>라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발견한다. 아 이런!)

그 동기생은 리영희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부터 읽는 것이 좋겠고 그 책을 함께 읽는 모임을 결성 중이니 같이 하자라고 매우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자고 했지만, 곧이어 우리 동아리에 불어닥친 모종의 어려운 일 때문에 나는 결국 그 독서모임에 끼지 못했다. 가끔 그 동기생을 만나면 <전환시대의 논리>에 이은 다른 책을 소개받기도 했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다 보니 '읽었음'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인생관이 확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토로하는 동기생과 달리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첫 소감은 참 어려운 책이라는 유치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인식에 겨우 도달한, 늦틔는 중인 한심한 대학생이었다.

정치의식도 없었고 소위 순수문학에 기울어진 문학도였으며, 단지 내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폭력에 민감했던 정도? 그랬던 내게 <전환시대의 논리>는 의식을 깨워 주기보단 새로 심어준 책에 가까웠다. 아, 미국이 이런 나라구나! 라는 식의 깨달음은 미국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과는 좀 다른 감각이었을 것이다.

쇼킹했던 유인물 <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

이 책과 관련된 충격적 사건은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에 일어났다. 지금은 부림사건이라 불리고 있는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연루된 공안사건이 81년 벽두에 터진 것이다. 이 사건 연루자들 중에 영목회 출신들이 많았다. 아니 영목회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독서클럽이 문제의 조직이었다고 해야겠다.

나에게 독서클럽을 함께 하자고 권한 동기생을 비롯해서 우리 학번과 한 해 윗학번들이 모조리 쓸려들어갔다가 일부는 풀려나고 일부는 대공분실까지 끌려가 참혹한 고문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당시 나는 대학원 진학에 실패하고 조부모님을 모시고 서울 큰삼촌댁에 놀러 가 있어서 검거 명단에서 빠지는 행운을 누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건이 벌어진 줄도 몰랐다. 이들은 단지 불온하다는 딱지가 붙은 책을 읽은 죄로 끌려가서 혹독하게 당했던바, 나는 그 전말을 82년에 어떤 안기부 직원이 내게 가져다준 <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라는 유인물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81년 서울 간 김에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원래 내 목표는 동아일보사 기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언론통폐합 와중에 시험도 못쳐보고 대학원으로 진로를 틀었던 것인데, 서울 간 김에 친구의 지도교수님댁에 함께 놀러갔다가 전격적으로 소개장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전예원과 실천문학사로 이중근무였다. 실천문학사에서 일한 지 반년 남짓 만에 폐결핵이 의심돼 부산으로 돌아가 다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나는 중앙에서 부산대 대학원 학생회에 파견된 사람으로 둔갑돼 있었다. 인즉슨, 내 본래 성향이나 여건과 다르게 단지 서울의 실천문학사에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중앙에 몹시 가까운 중요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보당국이 주목하는 사람? 알고 보니 부림사건의 영목회 출신? 이런 이유로 82년 학기초에 내가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 삼아 천주교 교구청에 취업하자 안기부의 교구청 담당 직원이 수시로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살피러 온다는 것을 몰랐다. 대충 나를 파악했다 싶었는지 그 안기부 직원이 어느날 유인물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부림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발표한 문건이었다. 이 전말은 영화 <변호인>에 상당 부분 나온다.

사람의 손발을 묶어 굵은 나무 기둥에 매달아놓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거나 밑에 불을 피워 위협하는 등의 고문을 일명 통닭구이라 하는데 바로 그런 극심한 고문 끝에 부림사건의 피해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란 자백을 받아냈다고 폭로한 유인물이다.

그 글을 읽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정부가 발표하는 공안사건의 허구성을 환하게 깨달았다. 그 유인물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로 공안당국이 내민 책이 바로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였다. 저 책들을 읽고서 공산주의자가 된다고? 비록 그 독서클럽 회원들만큼 깊이 읽지는 않았어도 나도 열심히 읽은 독자에 속할 텐데? 내가 공산주의자인가?

나이가 이만큼 먹어 생각해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도 상당한 정도로 좌파에 기울어진 사회민주주의자쯤 될 것이다. 맹할 정도의 보수적 '아가씨'로 성장하다가 이른바 '불온서적'들의 간접적 세례를 받으면서 진도를 나간 '의식화'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나는 의식있는 젊은이였다기보다 보편성에 입각한 평등의식과 정의감이 조금 있는 편이었다. 공안당국의 눈에 걸려들었더라면 그게 그거였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시야의 넓고 좁음 차이에 불과했지만 하여간 나는 시야가 좁았다.

리영희의 책 중에 나와 가장 인연이 깊었던 초기의 두 권 <전환시대의 논리> 와 <8억인과의 대화>에 관해 쓸까 하다가 경로를 바꾸었다. 저 책들은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거의 50년? 가장 최근의 책인 <대화>조차 20년은 더 된 옛날 책이라 읽은 기억이 날 리가 만무하다. 이것 참, 큰 줄기만 남고 세부 기억은 몽땅 날아간 옛 책들을 가지고 '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쓰기로 했으니.

그래서 유일하게 서명을 받은 책이자 어느 정도 사회학적 안목이 생긴 이후에 읽은 셈인 대화를 다시 읽기로 했다. 읽다 보면 '리영희의 책과 나'라는 주제에 걸맞은 추억 또는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작 서명 받은 책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한참을 시간을 쓰다가 다시 샀다는 한심한 일도 털어놓아야 공정할 것 같다.

▲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임헌영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이제부터는 리영희의 책 <대화>와 나에 관한 이야기다. <대화>를 다시 읽으면서 내 안에서 리영희 사상의 흔적을 조금씩 재발견해나가는 경험을 했다. 리영희 선생은 문학도인 내게 정치적 사고의 중요성을 알려준 스승 중 한 분이시고, 무엇보다 우리집에 밀가루와 가루우유를 주던 나라, 나중엔 다이알로그 매거진(미국에서 발행됐던 미술 잡지)을 펴내던 나라 정도로만 생각하던 미국의 실체를 깨닫게 해준 분이다.

물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국의 시인이 미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기는 힘들어진다. 그러나 좀 더 비판적인 안목이 생겨난 것은 확실히 저 두 책(<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을 읽었던 덕분이다.

<대화>는 임헌영 선생이 질문하고 리영희 선생이 답하는 형식으로 쓰인 리영희 자서전이다.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된 선생이 글쓰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을 감안한 한길사 김언호 사장의 제안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고마운 책이다. "리영희와 나" 같은 글은 임헌영 선생 같은 분이 써야 할 듯하다.

치열함 자체인 리영희는 '태도의 스승'

그런데 나는 정작 <대화>에 서명까지 받아놓고도 한참 동안 읽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 강연회 겸 사인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005년 4월15일 저녁에 열렸고, 그때 나는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물론 비서관 자격으로 거기 참석한 것은 아니고 그냥 소위 '팬심'으로 간 것이긴 하지만, 그때는 엄청나게 업무량이 많고 읽어야 할 자료와 보고서와 신문과 그때 막 활발해지던 인터넷 토론사이트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48시간처럼 굴러가던 시절이었다. 즉, 제대로 책을 열어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 지나서였다는 이야기다.

그때쯤엔 나는 근대적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을 상당히 갖춘, 즉 '각성한 개인'에 가까워진 사람이어서 <대화>를 읽으면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놀라움보다는 근대사를 리영희의 입장에서 정리하는 정돈된 생각으로 받아들였다고 기억을 한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나는 나 자신의 생애와 관련된 새로운 발견을 좀 했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내가 정치의식이 부족했던 것을 일종의 시골사람콤플렉스로 설명해 왔었는데, 리영희의 생애에 견주어본 나의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치열함의 부족이었다. 취재하고 읽고 쓰고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점철된 리영희의 일생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면 "기자와 학자 사이에 걸쳐진 열정"이라고 쓰고 싶다. "사상의 스승" 같은 말로 그분을 부르는 후학들도 많은 줄은 알지만, 내게는 오히려 "태도의 스승"이라 불러야 할 듯하다.

<대화>는 일종의 인물사여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걸쳐진 선생의 투쟁이 선입견보다 훨씬 드라마틱해서 읽기 재미있었다. 글머리에 내가 의식부족의 얌전한 애기씨였던 이유가 부산에 살아 그렇다고 썼지만, 실은 이는 매우 반성이 필요한 말이다.

리영희 선생은 이북 출신에 공고를 나와 해양대학에 진학했으며 군 복무를 무려 7년을 한 바 있다. 요즘말로 하면 스펙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본인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어학실력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개척해 나갔고, 한국이 맞닥뜨리는 역사적 질곡의 고비고비에서 그 어학실력을 본인의 출세에 사용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한 투쟁에 바쳤다.

얼버무리고 적당히 타협하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태도라고 다소간 분노 섞인 어조로—활자인데도 그게 보였다—설파하는 이 책의 행간을 읽다가 면구해서 잠시 커피 마시고 와야 했다.

위에서 말한 부림사건 다음해 부산에서는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문부식과 김은숙을 기억하지만, 실은 저 영목회의 3~4기들이 많이 연루된 사건이다. 부림사건에 여학생들이 대개 일주일쯤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것에 비하면 부미방 사건에는 여학생들의 참여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이 나중에 부산 6월항쟁의 실무적 기둥 노릇을 한 천주교사회문제협의회의 멤버들이 된다.

이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게 되기까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리영희의 저작과 기사에서도 나왔을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 존 바에즈나 밥 딜런 같은 베트남전쟁 반대 예술인들을 통해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전환시대의 논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단지 전쟁 반대를 넘어 베트남, 중국 등 사회주의 진영을 이데올로기적 편견없이 바라보는 힘을 주었다. 국제적 시야라고나 할까.

말이 길어진다. <대화>를 다 읽고 나서 내가 한 생각은 약간의 후회다. 진작 읽었어야 했고, 옛날 책들은 거듭 읽었어야 했다.

책 안의 콕 짚고 싶은 대목 : 리영희는 동시대 시인인 김수영, 신동엽 등의 시를 높이 평가했지만 아쉽게도 직접 만나지 못한 채로 두 시인이 먼저 돌아가셨다. 요즘 김수영 연구에 빠져 살면서 <대화>를 읽다 보니, 60년대 지식인들 중엔 국제적 안목이 넓은 분들이 이렇게 총총했는데 요즘 우리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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