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여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허정훈(許正勳, 1934~) 항목의 부제가 모든 것을 압축한다.
"재심 대상 판결 제조기."
박정희(1917~1979) 정권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 589건 가운데 그가 1심에서 판결한 것이 40건. 단연 가장 많았다. 거기에 재일한국인 간첩조작사건 10여 건까지 더하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재심대상 판결의 숫자가 한국 사법사를 압도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판결이, 3년 뒤 김대중(1924~2009)의 사형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적 토대가 됐다.
1934년 경남 진양 출생, 변호사 아버지를 둔 마산고 출신
허정훈은 1934년 8월 30일 경상남도 진양에서 변호사 허수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산고를 거쳐 동아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제9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3년 4월, 서울대생들의 군정연장 반대 침묵시위 사건에서 검찰이 세 차례나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두 차례 모두 다른 판사들에게 기각당했다. 세 번째 영장이 그에게 왔을 때, 그는 "조용한 분위기 아래서 한 정상을 참작"해 구속은 부당하다고 기각했다. 초기에는 그도 영장 남발에 선을 그었던 셈이다. 그러나 유신 이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세계사 속의 동류, '판결문을 베껴 쓴' 법률기술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가 떠오른다. 소련 대숙청 시기 일부 지방재판소는 검찰기소장을 거의 그대로 판결문으로 전환하는 '컨베이어 벨트' 방식의 재판을 했다.
1977년 김정사 사건 판결문이 정확히 이 패턴이다. 책은 명확히 적었다.
"피고인들에 대한 선고내용을 담은 주문인 맨 앞부분과 법률적용을 설명한 맨 뒷부분을 빼면 판결문은 검찰 공소장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검찰의 '공소사실'이 판결문에서 단어만 '범죄사실'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975~1978년, 긴급조치 9호 40건, 가장 많은 '정량 형량'
허정훈의 반헌법 행위의 첫 번째 정점은 긴급조치 9호 시대다.
술자리에서 "김일성이나 박정희나 똑같은 놈"이라고 소리친 무직자, 손금을 봐주다 "박 대통령은 1인 독재"라고 말한 점술가,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복사해 배포한 대학생들, 그 모든 사람에게 그는 실형을 선고했다.
최연소 피해자 이하영은 만 17세 재수생으로, 김지하 탄압을 시로 표현했다가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1년 4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한 그는 공황장애와 편도암 4기로 평생을 고통받았다. 2013년 재심 무죄 판결에서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그동안 고생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1976~1978년, 재일한국인 유학생 10여 명에게 중형
허정훈의 반헌법 행위의 두 번째 정점은 재일한국인 간첩조작사건들이다.
김종태, 허경조, 김원중, 김오자, 이동석, 이철, 이수희, 강우규 등에게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자백을 그대로 유죄의 증거로 인정했다.
이철: 사형
김오자: 사형
강우규: 사형
강우규와 함께 기소된 김기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자살을 시도했고, 그의 고향 후배 김문규는 고문 후유증으로 1982년 실제 자살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수십 년 뒤 재심에서 무죄가 됐다.
1977년,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든 그 한 줄
허정훈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큰 것은 1977년 김정사 사건이다.
재일한국인 유학생 김정사와 유영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그는 판결문에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 "북괴와 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된 반국가단체"라고 서술했다.
근거는 자수간첩이라 주장하는 윤효동의 일방적 증언과 부실한 영사증명서뿐이었다. 강령도, 규약도, 실제 활동도 검토하지 않은 채 내려진 이 판단이, 3년 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서 김대중을 "반국가단체 수괴"로 규정해 사형을 선고하는 법적 토대가 됐다.
내란음모죄의 최고형은 유기징역이었기에, 사형을 선고하려면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반드시 필요했다.
책은 이를 시적으로 표현한다.
"허정훈의 김정사 1심 판결은 가을에 핀 국화꽃을 예비하기 위한 봄밤의 소쩍새 울음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인천지방법원장
허정훈은 1980년대 초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로 승진해 무림사건 항소심, 학림사건 1심, 이철희·장영자 사건, 명성그룹 사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처리했다.
그 공로로 제주지방법원장, 인천지방법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인천지방법원장 재직 중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 문귀동을 고발한 권인숙(1965~)에게 유죄가 선고돼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소련식 '컨베이어 벨트 판결'은 가장 위험한 사법부패로 평가된다.
검찰의 기소를 그대로 판결로 옮기는 순간, 법원은 더 이상 정의를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의 결정을 사후 승인하는 도장 찍는 기계가 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허정훈의 그 판결문을 떠올렸다.
한 줄의 법적 허구가 3년 뒤 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토대가 됐다는 것. 그 연쇄작용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2』,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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