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상관면 깊숙한 숲길을 따라 들어가자 사람의 발길이 오래 닿지 않은 듯한 저수지와 옛 정수시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이어진 수변과 콘크리트 구조물, 일부 벽면에 남아 있는 한자 표기까지, 이곳은 단순한 폐시설이라기보다 시간의 층위를 간직한 공간에 가까웠다.
현장을 찾은 주민과 관계자들은 “오래된 시설”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취수와 정수, 송수의 흔적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점에서 근현대 상수도 유산으로서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곳 상관저수지 일대에서는 현재 ‘상관저수지 둘레길 및 힐링공원 조성사업’이 추진 중이다. 전주·완주 상생협력사업으로 2022년 선정된 뒤 2025년 10월 착공했으며, 2027년까지 총 193억 원(전북특별자치도 76억 원·전주시 58억 원·완주군 59억 원)이 투입된다. 계획에는 저수지 둘레 1.7㎞ 산책로와 함께 옛 정수장 부지에 야외무대, 어린이 놀이터, 야외수영장, 캠핑장 등이 포함돼 있다.
문제는 사업 초기 단계에 ‘노후 건물 철거’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철거 대상 시설의 건축 시기나 기능, 문화유산적 가치에 대한 종합 조사 결과는 현재까지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상관저수지와 정수시설의 기원은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을 기반으로 전주 지역 최초의 근대 상수도 공급이 시작됐고, 이후 광복과 산업화를 거치며 시설은 확장·변형됐다. 1990년대 정수 기능이 중단되기까지 약 70년간 전주시민의 식수를 담당한 핵심 기반시설이었다.
현장에서는 단일 시설이 아닌 ‘시스템’이 확인된다. 저수지와 취수 구조물, 정수시설, 송수 관련 흔적이 한 공간에 남아 있어 시기별 변화 양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시설에서는 일제강점기 사용 흔적으로 추정되는 표기도 관찰됐다.
특히 석축의 정수탑 상단에는 완공 당시 총독부 학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진호가 쓴 '용지수사민(用之壽斯民, 이 물을 써서 백성의 목숨을 구한다)'이 음각되어 있다.
이진호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3대 전라북도 장관과 초대 전라북도지사를 지낸자다. 그가 초대 전북도지사로 재임할 당시 이 시설을 착공한 인연으로 완공 당시 탑에 쓸 글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또 취수구에는 '청천불갈(淸泉不渴, 맑은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이라고 새긴 금석문도 확인된다.
이 같은 특징은 국내 다른 근대 상수도 유산과의 비교에서도 주목된다. 서울 뚝섬수원지 제1정수장, 부산 성지곡수원지, 군산 제1수원지 제방 등은 이미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특히 부산 성지곡수원지는 수원지와 정수 관련 시설이 비교적 넓은 범위로 보존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상관저수지 역시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학술조사나 문화유산 지정 검토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생태적 가치도 주목된다. 상수원 보호를 위해 오랜 기간 개발이 제한되면서 저수지 주변에는 원형에 가까운 숲과 수변 환경이 유지돼 왔다. 지역 주민들은 “사람 출입이 적었던 덕분에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전했다.
개발을 둘러싼 시각은 엇갈린다. 장기간 폐쇄됐던 공간을 주민에게 개방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반면 충분한 조사 없이 기존 시설을 철거할 경우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자산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장에서는 “캠핑장이나 놀이시설은 다른 곳에도 만들 수 있지만, 이 공간의 시간성과 구조는 대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보존과 활용의 병행’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기존 정수시설을 활용한 전시·교육 공간 조성, 상수도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 숲과 수변을 연결한 생태탐방로 구축 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울 선유도공원이나 뚝섬수원지 사례처럼 기존 시설을 재생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선례도 있다.
황태규 우석대학교 미래융합대학 학장은 “상관저수지와 정수시설은 저수·취수·정수·송수로 이어지는 근현대 상수도 체계의 변화를 한 공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며 “철거에 앞서 건축 연대와 시설 성격을 구분하는 전수조사, 문화유산 지정 가능성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193억 원 규모의 사업을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사를 통해 가치를 확인한 뒤 기존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며 “역사를 지우는 개발이 아니라, 역사와 생태를 살리는 방향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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