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포퓰리즘 정책을 관철하며 16년을 집권해 전세계 극우의 등대 역할을 했던 빅토르 오르반(62) 헝가리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폭 지원에도 12일(이하 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에서 패배해 물러나게 됐다. 유럽연합(EU) 내부에서 친러시아 의견을 피력했던 오르반 실각으로 헝가리와 EU의 관계가 개선되고 EU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헝가리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2일 치러진 총선 개표율 98.94% 기준 중도우파 야당 티서(TISZA)가 총 199개 의석 중 3분의 2가 넘는 138석을 확보했다.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 피데스는 55석 확보에 그쳤다. 나머지 6석은 극우 정당 우리 조국(Mi Hazánk)에 돌아갔다. 이번 선거 투표율은 77.8%에 달해 1989년 공산주의 붕괴 뒤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찌감치 패배가 확정되며 오르반 총리는 개표 약 30% 시점에 티서를 이끄는 페테르 머저르(45) 대표에 축하를 전하고 "선거 결과는 명백하고 고통스럽다"며 패배를 선언했다고 영국 BBC 방송이 보도했다.
<AP> 통신을 보면 머저르 대표는 12일 밤 지지자들을 향해 "우린 함께 헝가리를 해방했고 조국을 되찾았다"며 승리를 축하했다.
오르반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폭 지원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지난주 JD 밴스 미 부통령은 헝가리를 직접 방문해 오르반 총리 지원 유세에 나서기까지 했다.
러시아를 옹호하며 우크라이나 지원 노력을 EU 내부에서 저해해 온 오르반 총리 패배로 헝가리와 러시아, EU,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변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오르반 총리 아래 헝가리는 우크라이나 지원 관련 EU 내 만장일치가 필요한 사안에서 거부권을 행사해 이를 막아 왔다. 지난 2월엔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약 156조 원) 규모 EU 무이자 대출을 차단해 EU를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오르반 총리는 EU의 러시아 제재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주요 안보 위험으로 규정했다.
오르반 총리는 이번 선거에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적대감과 전쟁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전략을 펼쳤지만 통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피데스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헝가리에 대한 위협이며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러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을 약속한 오르반 총리가 패배할 경우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헝가리까지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거 기간 중 오르반 정부는 EU 논의 내용을 러시아에 유출해 왔다는 의혹도 받았다.
BBC는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서조차 야당이 피데스를 앞섰다"며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국이 전쟁에 휘말릴 것으로 보는 헝가리인 수가 최근 몇 년간 절반으로 줄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머저르는 의료, 경제, 물가, 대중교통, 정부 부패 등 내부 일상 문제에 집중했고 EU 및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오르반 총리와 각을 세웠다. 머저르는 이달 초 <A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선거가 헝가리가 오르반 아래서 러시아 쪽으로 계속 기울 것인지 아니면 유럽의 민주사회에 다시 자리잡을 것인지를 택하는 "국민투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오르반 정부의 EU 내 잦은 거부권 행사에 대해서도 국내 EU 회의적 유권자들에게 소구하고자 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비판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마르셀 메링거(21)는 "무엇보다 헝가리가 마침내 소위 유럽 국가가 되도록, 젊은층과 모든 국민이 이 나라를 조금이라도 통합하고 증오에서 비롯된 장벽을 허물기 위한 기본적 시민 의무를 다하기 위해" 투표한다고 <AP>에 말했다.
다만 머저르는 오르반 정부의 성소수자 탄압 정책이나 우크라이나 지원 등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선 입장을 밝히길 피해 왔다. 그는 <AP>에 자신의 정부는 러시아에 대해 "실용적" 입장을 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통신은 "머저르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오르반 비판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에 대한 지지가 항상 이념적 일치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머저르는 2002년부터 피데스당에서 정치 활동을 해 왔지만 2024년 아동보호시설 성범죄 은폐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인물 사면을 놓고 집권 세력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당과 결별했다. 거의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던 머저르는 피데스당 내부 부패를 비판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그가 이끈 티서당은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곧바로 30%를 득표해 유력 야당으로 올라섰다.
오르반 패배는 유럽 및 전세계 극우, 트럼프 지지층 마가(MAGA)에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EU에 대한 반기, 소수자·이민자·진보주의자 탄압 및 언론 자유 탄압을 지속하며 16년간 정권 유지에 성공한 오르반은 전세계 극우에 영감과 전략을 제공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선거가 "마가 운동과 전세계 극우의 회복력을 가늠할 시험대"로 여겨졌다고 설명했다.
EU는 환영을 표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부분 개표 결과 발표 뒤 소셜미디어를 통해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 유럽은 항상 헝가리를 선택해 왔다. 한 나라가 유럽의 길을 되찾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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