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11월 18일 밤, 혁명의 열기로 달궈진 파리의 한 선술집. 영국인 신사 한 명이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선언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모든 세습작위와 봉건적 신분구별의 조속한 철폐를 위하여!"
이 발언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화자의 신분 때문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영국의 세습귀족, 제5대 스마이스 남작 로버트 스마이스 경(Sir Robert Smyth, 1744~1802)이었다. 자신의 존재 근거인 '특권'을 스스로 부정하며 머리에 도끼를 내리찍은 이 사나이. 그는 광인(狂人)이었을까, 아니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을까. 23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기득권의 책임과 신념의 가치를 다시 묻는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침묵의 의원'
로버트 스마이스는 1744년 1월 10일, 잉글랜드 에식스주의 유서 깊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진 남작 작위와 막대한 토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보장된 '황금 밥상'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1774년, 서른 살의 나이로 하원에 입성하며 화려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의회 내에서 '침묵의 화신'으로 통했다는 점이다. 1775년 캐나다 관련 법안 토론 중 그는 "말하는 것 자체가 괴롭고, 듣는 이들에게도 즐거움을 주지 못할 것 같다"는 기묘한 고백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무능이 아닌 '성찰'의 결과였다.
그는 입 대신 투표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했다. 당시 노스 수상의 권위주의적 정책에 맞서 꾸준히 야당의 편에 섰고, 1783년에는 윌리엄 피트가 제안한 급진적인 의회 개혁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기득권의 중심부에서 기득권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에 힘을 보태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의 이방인, 토머스 페인을 만나다
1790년 의회를 떠난 스마이스는 안락한 노후 대신 혁명의 심장부인 파리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은행을 운영하며 사업가로 변신하는 동시에, 당대 최고의 혁명사상가 토머스 페인과 운명적인 우정을 맺는다.
『인간의 권리』를 쓴 페인과 영국 귀족 스마이스의 만남은 오늘날로 치면 재벌가 자제가 급진적 노동운동가와 동지가 된 격이다. 스마이스는 페인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급기야 1792년 영국 외무성 보고서에 "극렬한 민주주의자이자 공화주의 지도자들과 연결된 위험인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영국정부는 그를 향해 "머무는 동안 가능한 모든 해악을 끼칠 인물"이라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스마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일랜드 귀족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와 함께 자신의 작위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며 '시민 스마이스'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런던의 보수 언론들은 "제 발등을 찍는 멍청한 귀족"이라며 조롱 섞인 만평을 쏟아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혁명의 아이러니, 감옥에 갇힌 동조자
그러나 혁명은 낭만적인 대서사시로만 흐르지 않았다. 1793년, 프랑스는 '공포정치'의 늪에 빠졌다. 혁명정부는 외국인을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파리에 남았던 스마이스 역시 영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투옥된다.
자신이 응원하던 혁명의 손에 의해 차가운 감옥에 갇힌 이 아이러니는 스마이스 개인의 비극을 넘어, 모든 혁명이 직면하는 내부적 모순을 상징한다. 이때 그를 구원한 이가 바로 페인이었다. 페인은 프랑스당국에 간곡한 편지를 써서 "스마이스는 영국의 정치체제와 기후를 진심으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며 그의 진정성을 보증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스마이스는 이후에도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국의 보수적인 정치공기와 습한기후 모두를 거부했다. 1802년 4월 12일, 그는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혁명의 도시 파리에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230년 후, 한국 사회가 로버트 스마이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로버트 스마이스의 삶은 우리에게 몇 가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내부자'에 의한 개혁은 가능한가?
스마이스는 세습특권의 수혜자였지만 그 제도의 부당함을 가장 먼저 외쳤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재벌, 검찰, 언론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해당집단 내부에서 스마이스와 같은 '자기부정'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스스로의 이익에 반하는 신념을 가질 때, 사회는 비로소 한 발자국 나아간다.
둘째, '낙인찍기'라는 오래된 무기
18세기 영국 외무성이 스마이스에게 붙인 '극렬(Violent)'이라는 딱지는 21세기 한국의 '종북' 혹은 '극좌'라는 낙인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체제를 비판하는 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동원되는 언어의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수호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다.
셋째,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
혁명을 지지하다 혁명의 감옥에 갇힌 스마이스의 사례는 우리에게 '변화의 방향'만큼이나 '변화의 과정'이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가 또 다른 독재나 배제로 흐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완벽한 진보
로버트 스마이스의 아들 조지 헨리 스마이스는 아버지와 달리 매우 보수적인 정치인이 되어 가문의 전통으로 돌아갔다. 역사는 이처럼 흔들리고 회귀하며 전진한다.
스마이스는 세상을 바꾼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위대한 저서도 없으며, 그의 이름은 역사의 각주에나 간신히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위선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이 부당하다면 그것을 내던질 줄 아는 용기가 그에게는 있었다.
"체제가 싫으면 떠나라"는 말은 오늘날 '헬조선'을 외치며 이민을 꿈꾸는 청년들에게도 익숙한 문구다. 하지만 스마이스의 삶은 우리에게 말한다. 떠나는 것이 해방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싸움은 내가 발 딛고 선 곳의 모순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로버트 스마이스. 그는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진보란 완벽한 성자들이 일구어내는 기적이 아니라, 모순투성이인 삶 속에서도 조금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손을 뻗었던 불완전한 개인들의 발자취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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