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연금개혁'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빈번하게, 그리고 가볍게 사용돼 왔다. 그러나 연금개혁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험료 인상이나 급여 수준 조정이 아니라, 연금제도의 근본적 목적과 설계 원칙을 재조정하거나 제도 간 역할과 구조를 재편하는 체계적 변화여야 한다. 다시 말해, 이미 오랜 기간 부분적 개선과 미세조정을 반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은 제도의 불합리성과 구조적 한계를 바로잡는 어려운 과정이 연금개혁이다. 이는 제도·계층·직역·세대·성별 간에 고착된 불공정과 비효율을 교정하고, 급변하는 사회·산업 구조에 부합하는 새로운 연금체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연금개혁'이라는 용어가 남용되거나 오용돼 왔다. 개별 연금법에 따라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재정검증 결과에 따른 보험료율이나 급여 수준 조정을 마치 대대적인 개혁인 것처럼 포장하거나, 기금 고갈 가능성을 과장해 국민의 불안을 자극하고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적·언론적 관행이 반복됐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사회의 연금제도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미성숙하다는 점을 보여주며, 연금체제 전반에 내재한 차별성과 불공정성, 비효율성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바로잡는 거시적 개혁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반복돼 온 연금개혁 실패의 구조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서 연금개혁이 실질적인 성과 없이 마무리된 원인은 비교적 분명하다. 무엇보다 연금체제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 인식과 개혁 비전이 명확하지 않았다. 개혁의 방향과 원칙, 절차를 사전에 합의하고 이를 법적으로 고정하는 틀이 부재한 상태에서, 정치 일정에 맞춰 논의가 급조되다 보니 실질적인 체제 개편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더불어 행정부가 연금개혁의 책임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논의의 부담을 국회나 사회적 대화기구에 전가하는 방식이 반복됐다.
문재인 정부는 행정부 주도의 연금개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관장하는 보건복지부 중심의 접근에 머물렀다. 이는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연금을 포함한 공적연금 체제 전반의 개편으로 확장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경우, 모든 공적연금을 포괄하는 '완성형 연금개혁'을 공약과 핵심 국정과제로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직후 이를 사실상 철회하고 국회에 개혁 과제를 넘겼다. 이는 개혁의 실패라기보다 개혁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내려놓은 결정에 가까웠다.
이재명 정부에 제기되는 과제
이재명 정부 역시 이전 정부에서 이미 책임성과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평가된 연금개혁의 구도와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연금개혁 논의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 맡기고, 행정부는 명확한 개혁 구상이나 책임 있는 역할을 제시하지 않은 채 관망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가 아니며, 연금체제 개편의 최종 결과에 대해 행정적·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도 아니다. 이러한 구조가 유지된다면, 이재명 정부의 연금개혁 역시 책임 주체가 불분명한 채 정치 일정에 쫓겨 급조된 '무늬만의 개편'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실패가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전가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연금제도는 사각지대 확대와 가입기간 부족으로 인해 노후 빈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고 있으며, 중산층조차 적정한 노후소득을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고용 구조의 불안정화와 인공지능·로봇 기술의 확산으로 노동시장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노인의 기본소득 기능을 담당해야 할 기초연금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 하위 70%라는 기준에 따른 기초연금 지급 방식은 세대 간·계층 간 연대를 강화하기보다 갈등과 불신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연금개혁 로드맵법의 필요성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연금개혁의 방향과 원칙, 절차를 먼저 법으로 명확히 설정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른바 '연금개혁 로드맵법'은 개별 연금제도의 세부 내용을 규정하는 법이 아니라, 공적연금 체제 전반을 조망하며 개혁의 기준과 경로를 제시하는 준거법이다. 이를 통해 연금제도 간 역할 조정, 체제 구조 개편, 국가의 재정 책임 범위와 기준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법적 틀이 마련돼야만 정권 교체와 정치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연금개혁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담보될 수 있다.
이 작업은 입법부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연금제도를 관장하는 부처와 연구기관이 다수에 이르고, 방대한 정책 자원과 조정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금개혁의 책임 주체로 나서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대통령 직속의 '연금개혁준비특별위원회(가칭)'를 상설로 설치해 연금개혁의 방향과 원칙, 절차를 담은 로드맵법을 먼저 마련하고, 이를 국회에 설치된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서 정당 간 합의를 통해 입법화하는 것이다.
일본 사례가 주는 시사점
일본은 1985년 공적연금 개혁을 통해 모든 공적연금이 기초연금을 공유한다는 원칙을 법으로 명확히 했다. 이후 직역연금은 기초연금 위에 부가되는 구조로 재편됐으며, 이 원칙은 30년에 걸친 단계적 개혁의 기준으로 유지됐다.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도 개혁의 큰 방향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개혁의 절차와 원칙을 먼저 법으로 고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연금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무엇이 선행돼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 책임 있는 개혁의 출발점
연금개혁은 단기성과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삶과 직결된 중대한 민생 개혁이자 국가의 핵심 내치 과제다. 개혁의 책임을 국회에 떠넘기는 순간, 연금개혁은 다시 한 번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무산과 윤석열 정부의 무책임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연금개혁의 방향과 원칙, 절차를 분명히 제시하는 로드맵법부터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형 연금체제(K-Pension System)'를 구축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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