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창] 양성평등을 말하는 도시, 대전은 어디쯤 와 있나

인식은 앞서가고, 삶은 여전히 뒤따른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 않다. 공공정책의 언어로도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양성평등’은 이미 당위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적어도 말로는 우리는 더 이상 설득이 필요 없는 단계에 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대전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 당위가 과연 삶의 조건으로까지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최근 대전연구원 산하 대전여성가족정책센터가 실시한 '대전광역시 양성평등 실태조사'는 이 간극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낸다.

조사에 따르면 대전 시민 다수는 양성평등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노동과 돌봄, 가사와 안전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성별에 따라 역할과 부담이 갈리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었다. 문제는 ‘의식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의식이 바뀌어도 구조가 쉽게 따라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문제의식은 감각이나 인상의 문제가 아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과반 이상이 임금과 고용 안정성, 승진 기회에서 남성이 더 유리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최근 일자리를 그만둔 이유로 여성 응답자의 경우 출산·육아·가족 돌봄을 꼽은 비율이 남성보다 현저히 높게 나타났고 맞벌이 가구임에도 가사와 자녀 돌봄의 주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했다.

안전 영역에서도 이 간극은 분명히 드러난다. 성희롱·성추행·강간 등 성폭력 전반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는 응답은 48.8%, 온라인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도 47.6%가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반면 피해 발생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나 기관을 알고 있다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낮아 불안의 크기에 비해 대응 체계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사 결과에서 드러나는 시민들의 태도는 단순하지 않다. 성 역할 고정관념이 약화됐다고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고용 안정성이나 소득, 승진 기회에서는 남성이 유리하다고 답한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는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응답이다. 생각은 바뀌었지만 제도와 환경은 그대로라는 의미다.

이러한 간극은 노동시장과 돌봄 영역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경력단절의 이유로 출산과 육아, 가족 돌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라기보다 돌봄을 둘러싼 책임이 여전히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는 구조적 신호에 가깝다.

맞벌이 가구에서도 가사와 자녀 돌봄이 여성의 몫으로 남아 있는 현실은 ‘함께 일하지만 함께 돌보지는 않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안전에 대한 인식과 불안의 체감 사이에도 뚜렷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같은 조사에서 대전 시민의 82.2%는 ‘대전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살기에 안전한 지역’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성폭력이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가 불안을 느낀다고 답한 것을 감안하면 ‘도시 전체는 안전하다고 인식하면서도 개인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불안을 느끼는’ 이중적 인식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이번 조사가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대전의 양성평등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를 설득해야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시민들은 이미 필요성을 알고 있고 공감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제는 양성평등이 하나의 선택이나 선언이 아니라 삶의 기본 조건으로 작동하도록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점이다.

양성평등 정책이 늘어났다고 해서 곧바로 양성평등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상의 시간을 어떻게 바꾸고 노동과 돌봄의 무게를 어떻게 재배치하는가다. ‘정책이 있다’는 사실보다 ‘삶이 달라졌다’는 체감이 중요하다.

대전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인식의 변화 이후,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실태조사는 그 질문을 피하지 말라는 신호에 가깝다. 양성평등을 말하는 도시에서 이제는 말보다 생활의 변화가 먼저 보이기를 기대해 본다.

문상윤

세종충청취재본부 문상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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