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고분 도굴품 곡옥(曲玉)을 사들인 오구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수집한 유물들 가운데 도굴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상당하다. 그 예로 가야 고분에서 도굴된 곡옥(曲玉)을 들 수가 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이와 관련한 이야깃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고령 일대의 가야 고분을 도굴한 김영조라는 도굴꾼이 있었다. 그는 김준철, 구금도라는 자와 함께 무려 300여 기의 가야 고분을 도굴했고, 그 유물들을 모두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곡옥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나는 토기를 많이 만져 본 사람인데, 내가 갖고 있던 것은 전부 대구에 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지금은 한 개도 없습니다. 오구라에게 토기뿐만 아니라 매장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가서 팔았는데, 비취곡옥(翡翠曲玉)만 해도 아마 두 되 이상은 될 것입니다. 일정(日政) 때 얘기지만, 우리가 '굼벵이'라고 불렀던 비취곡옥을 그때 돈으로 오구라는 한 개에 2엔씩 쳐 줍디다.
곡옥은 '굽은 옥', '곱은 옥'이라고도 하며, 두툼한 머리 부분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끈 등으로 꿰거나 금장식을 씌워 사용하는 장신구이다. 옥이나 금, 유리, 수정 등을 재료로 만들고 크기는 1㎝ 내외부터 10㎝ 내외이다. 금관, 목걸리, 귀걸이 등의 장신구에 사용되며, 그 모양은 초승달, 알파벳 C자, 쉼표 등과 비슷하다. 도굴꾼 김영조는 이 곡옥이 몸을 반 정도 만 굼벵이의 모양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굼벵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곡옥은 금관총, 천마총, 서봉총, 황남대총 북분(北墳)과 같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목걸이에서 장신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래의 이미지는 1921년에 발굴된 경주 금관총 출토 금관이다. 이 금관은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의 크기로 1962년에 국보 제87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머리에 쓰는 관테와 관테 앞쪽의 날 출(出)자 모양의 장식, 좌우의 사슴뿔 모양 장식에 모두 곡옥이 달려있으며, 관테의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드리개의 끝에 달린 드림도 곡옥으로 장식하는 등 57개의 곡옥이 금관에 달려있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도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그 수는 적지만 곡옥이 달려있다.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45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가야의 금관은 높이 11.5㎝, 지름 20.7㎝의 크기로 1971년에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호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금관의 관테에 곡옥이 달여 있고, 금관과 함께 출토된 장신구의 윗부분이 곡옥으로 장식되어 있다.
오구라 컬렉션의 곡옥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에는 수십 개의 곡옥이 포함되어 있다. 길이는 가장 짧은 것이 1.0㎝, 가장 긴 것이 8.5㎝로 1.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하고, 재료도 경옥(硬玉, 비취), 벽옥(碧玉), 금, 금동, 수정, 유리, 마노석(瑪瑙石), 호박석(琥珀石), 사문암(蛇紋岩), 흙 등으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전(傳) 경상북도 경주 금관총', 즉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곡옥이 한 개 포함되어 있다. 이 곡옥은 길이가 4.7㎝이고, 연두색의 경옥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 부분 앞쪽에 세 줄의 음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오구라 컬렉션에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곡옥 한 개만 남겨져 있지만, 실제로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당시 좀 더 많은 곡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에 발간한 <경주 금관총과 그 유적>이라는 보고서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제1장 서설-제4절 발견 유물의 종류와 수량'에서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장신구와 기타 장식구' 부분에서 곡옥은 경옥 54개, 수정 1개, 호박 1개, 벽옥 1개, 유리 1개로 총 59개의 수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출토 목록을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발견 당시 흩어져 없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이 고분 출토품으로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곡옥 십 수개가 개인 소유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다"라는 각주를 달고 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곡옥이 어떤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인데, 오구라 컬렉션에 금관총 출토로 추정되는 곡옥이 있는 것을 봤을 때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십 수개의 곡옥'을 사들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오구라가 도굴꾼에게 사들인 곡옥 수량은 얼마나 될까
도굴꾼 김영조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먹은 곡옥의 대략적인 개수를 먼저 무게로 추정해 보자. 경상도 지역에서 말하는 쌀 한 되가 보통 1.6㎏에 해당하는데, 쌀과 곡옥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한 되에 1.6㎏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도굴꾼 김영조가 곡옥의 무게를 쟀을 때 최소 3.2㎏에 해당하는 곡옥들을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것이 된다. 해당 곡옥의 크기와 무게를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필자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곡옥 전문가 강윤기씨의 도움을 받아 그가 직접 제작한 비취곡옥의 정보를 받았다. 해당 비취곡옥들의 크기와 무게(가로/세로/두께/무게)는 각각 1.0㎝/2㎝/0.8㎝/3g, 1.4㎝/3㎝/1.1㎝/8g, 1.7㎝/4㎝/1.3㎝/16g, 2.0㎝/5㎝/1.5㎝/22g, 2.3㎝/6㎝/1.6㎝/34g이며, 그에 따르면 기술력의 차이로 인해 금관총 출토 금관의 비취곡옥과 같이 예전에 제작된 것이 요즘 것보다 무게가 약간 적게 나갈 것이라고 한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한 되 1.6㎏ 당 각각 약 533개, 200개, 100개, 72개, 47개이고, 최소 '두 되' 3.2㎏으로 할 경우 각각 약 1,066개, 400개, 200개, 144개, 94개가 된다. 도굴꾼 김영조가 도굴한 곡옥들은 길이와 무게가 달랐겠지만, 2㎝짜리라면 약 1,066개, 6㎝짜리라면 94개를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것이 된다.
그리고 여러 길이의 비취곡옥들을 한 되에 무작위로 담았다고 할 경우 정확하게 2㎝짜리 몇 개, 6㎝짜리 몇 개라는 것을 알 수 없지만, 2㎝부터 6㎝의 비취곡옥들을 한 되에 담았고 위의 개수들의 평균값이라고 가정하면 약 380개가 된다. '두 되 이상'의 '두 되'가 380개라고 한다면, 금관총 출토 금관에 57개의 곡옥이 달려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도굴꾼 김영조는 최소 금관총 출토 금관 약 6.6개에 달려있는 곡옥들을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것이 된다.
다음으로 도굴꾼 김영조가 도굴한 곡옥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않고, 나무로 된 상자 모양의 되에 곡옥을 퍼담아 팔아넘겼을 경우의 개수를 계산해 보자. 그가 사용한 되의 크기를 알 수 없지만, 국립박물관에서 설명하는 되의 크기(17.7cm/17.7cm/9.0cm)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AI를 사용하여 한 되에 ① 가로/세로/높이 17.7cm/17.7cm/9cm 크기의 나무로 만든 되에 가로/세로/두께/무게가 1.0㎝/2㎝/0.8㎝/3g, 1.4㎝/3㎝/1.1㎝/8g, 1.7㎝/4㎝/1.3㎝/16g, 2.0㎝/5㎝/1.5㎝/22g, 2.3㎝/6㎝/1.6㎝/34g인 비취곡옥이 몇 개 들어가는지, ② 서로 다른 크기의 비취곡옥을 혼합해서 넣었을 경우 몇 개가 들어가는지에 대해 답을 구했다.
그 결과 ①은 각각 약 1,570개, 545개, 284개, 168개, 114개, ②의 경우 빈공간을 최소화하여 대형 비취곡옥 사이의 공간을 중소형 비취곡옥이 메우는 형태로써 최적의 개수로 약 757개(소형 약 630개+중형 약 99개+대형 약 28개)가 나왔다. 도굴꾼 김영조는 최소 '두 되'의 비취곡옥을 팔아넘겼기 때문에 해당 개수는 ①의 경우 각각 약 3,140개, 1,090개, 568개, 356개, 228개, ②의 경우 1,514개가 된다. 이는 금관총 출토 금관에 달린 곡옥의 개수와 비교하여 ①은 각각 약 4배, 6.2배, 9.9배, 19배, 55배 ②는 26배나 더 많은 개수이다.
위와 같이 필자 나름대로 도굴꾼 김영조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곡옥의 개수를 필자 나름대로 추정해 봤다. 계산 결과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두 번째 방법으로 계산한 것 중 어느 것이 그가 팔아넘긴 곡옥의 최소 개수에 조금이나마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되에 쌀이나 곡식 등을 담아 파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보통 곡식더미에 되를 푹 담고 들어 올린 뒤 되의 윗부분을 평평하게 해서 '한 되'로 팔았다. 도굴꾼 김영조도 고령 지역의 300여 기의 가야 고분에서 도굴한 곡옥들을 쌀자루나 나무상자 등에 넣어 보관하다가 여기에 되를 푹 담은 뒤에 '두 되 이상'이 되는 곡옥들을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겼을 것이다.
오구라는 왜 곡옥을 사들였을까
그렇다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왜 그렇게 많은 곡옥들을 사들였을까? 그의 조선 유물 수집 동기와 아래의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의 설립취지서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곡옥은 이전에는 야마토 민족 특유의 장식품으로, 다른 민족에게는 유례가 없다고 했다. 확실히 194년 내가 처음 조선에 건너갔을 쯤에는 조선에서 곡옥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1921년 경주에서 대발굴(금관총 발굴: 필자주)이 있었고, 황금 왕관 외에 대량의 고미술품이 출토되었는데, 그 왕관은 51개의 곡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후 경주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곡옥이 출토됨에 따라 오늘날에는 일본과 조선 중 어디가 (곡옥의: 필자주) 본가인지 의문을 품어도 지장이 없기에 이르렀다. 그 외 거울, 토기, 복식에 이르기까지 한일문화교류의 증거는 현저한 면이 있다. (중략) 이로써 조선 문화의 자재(資材)는 일본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재료라고 믿는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조선 유물 수집 동기로 '일본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조선의 고미술품 등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곡옥 또한 일본의 역사, 그리고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었고, 그의 말대로라면 이를 위해 고령 지역의 가야 고분에서 도굴한 곡옥, 그리고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곡옥들도 사들였던 것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이와 같이 고령 지역의 가야 고분을 파헤쳐 도굴된 수많은 곡옥들을 사들였다. 현재 오구라 컬렉션에는 47개의 곡옥밖에 없는데, 그가 사들였던 '두 되 이상'의 곡옥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일본의 역사와 문화 연구를 위해 제대로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넘긴 것일까?
도굴꾼 일당은 생계를 위한 물질적 만족을 위해 가야 고분 속에 잠들어 있었던 수많은 곡옥들은 도굴했고, 오구라는 자신의 수집 목적을 위한 정신적 만족을 위해 도굴된 곡옥들을 사들였다.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귀뜸해 줄 곡옥은 그렇게 일본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고, 앞으로 영원히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시,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보고서(국역)>,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2006.
국립민속박물관, 〈읽어주는 박물관-홉, 되, 말〉, 202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편, <오구라 컬렉션-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정규홍 편저,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경상북도·(사)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18.
이경희, 〈오쿠라(小倉) 컬렉션의 行方〉, <월간 조선> 27권 5호, 2006년 5월.
국가유산지식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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