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실시된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에서 끝내 극우파 공화당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가 58.17%를 얻으며 당선됐다. 중도우파 기독교민주당부터 중도좌파 '민주사회주의' 연합, 급진좌파 공산당, 확대전선까지 아우른 칠레 역사상 가장 광범한 반극우연합이었던 '칠레를 위한 단결(UpCh)'의 후보 히아네트 하라(소속은 공산당)의 득표율은 카스트에게 크게 밀리는 41.83%를 기록했다. 이로써 칠레는 1980년대 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가장 '피노체트주의'적인 대통령을 맞이하게 됐다.
여론조사에서 계속 1위를 달리던 하라 후보는 11월 16일의 총선(대선 1차 투표, 하원 총선, 상원 일부 선거를 동시에 실시)에서 예상대로 1위(26.85%)를 했다. 그러나 2위를 한 카스트(23.93%)와 표차가 크지 않았다. 카스트를 비롯해 또 다른 극우파인 '국민자유지상주의당'의 요하네스 카이저 후보(13.94%), 정통우파 '독립민주연합'의 이벨린 마테이 후보(12.47%)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하라 후보의 득표율은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인민의 당'의 프랑코 파리시 후보가 거둔,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성적(19.71%)이 주목받았다. '인민의 당'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고 자처하면서 자유주의 경제학자 파리시의 개인적 인기에 기대는 정당이다.
1차 투표 결과든 결선 결과든, 그간 칠레에 주목하던 전 세계 좌파, 사회운동 세력에게 다시 한 번 거대한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팬데믹 직전인 2019년 말, 칠레에서는 공공요금 인상 정책에 항의하며 무려 36명의 사망자를 낸 시위가 전개됐고, 이 시위를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피노체트 군부독재로부터 이어받은 낡은 현 헌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2021년 대선에서는 이 기회에 진보적 헌법안을 통과시켜 칠레의 오랜 신자유주의 시대를 끝내겠다고 공약한 확대전선-공산당 단일후보 가브리엘 보리치가 카스트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러한 지난 몇 년의 과정은 신자유주의 실험이 처음 펼쳐졌던 그곳(칠레)에서 그 사망을 공식 확인하는 드라마가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전혀 달랐다. 물론 보리치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보리치의 최대 공약이었던 헌법 개정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대선을 '정권 심판 선거'로 설명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이 큰 그림을 채우는 이야기는 생각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선거 결과 표 속의 '숨은 그림' 때문에 그렇다. 앞에서도 득표율을 열거했지만, 이 수치에만 주목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의 이면이 있다. 가령 하라 후보는 이번 대선의 패배자이지만, 하라가 결선에서 받은 지지의 절대치(약 522만 표)는 2021년 대선 결선 승자인 보리치가 받은 지지(약 462만 표)보다 60여만 표가 더 많다. 하라가 패배한 것은 상대편인 카스트가 지난 번 득표(약 365만 표)의 두 배에 달하는 지지(약 726만 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토록 엄청나게 지지를 배가할 수 있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착잡한 이야기와 마주해야 한다.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의 역사적 패배
5년 전만 해도 칠레의 헌법 개정 과정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 했다. 정치권이 먼저 헌법 개정을 합의하고 나서 개헌 필요성과 구체적 방식을 물은 2020년 10월 국민투표에서 투표자 다수는 기존 헌법과 가장 거리가 먼 방향에서 새 헌법을 제정하길 바란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방향을 과감히 선택했다. 전체 유권자의 과반이 참여(50.98%)한 국민투표에서 78.28%가 '개헌'에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개헌 방식에 관해서는 78.99%가 '기존 의회가 전혀 참여하지 않는, 새로 구성된 대의기구가 헌법안을 심의하게 한다'는 선택지를 지지했다.
이 국민투표의 결과로 헌법안 입안을 책임지게 된 '헌법개정회의'의 구성 역시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에 있었다. 2021년 5월 15-16일에 칠레 하원 선거방식과 같은 정당(또는 정당연합)명부 비례대표제에 따라 헌법개정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 확대전선 등의 선거연합인 '존엄에 찬성표를'이 2위(18.78% 득표)를 기록하면서, 정통우파와 중도좌파가 양분하던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게다가 여기에 급진 사회운동가들로 이뤄진 '민중 명부'(3위, 16.2%)의 의석이나 선주민에게 특별 할당된 의석까지 합하면, 헌법개정회의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세력들의 활약을 위해 마련된 무대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 뒤에 실시된 2021년 말의 총선 역시 이런 인상을 굳혔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대선 결선에 기존 양대 정파 아닌 세력들의 후보들이 진출했고, '존엄에 찬성표를' 연합이 낸 보리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보리치 대통령이 이끄는 급진좌파 정부와 헌법개정회의가 쌍두마차 격으로 탈신자유주의-탈피노체트 방향에서 개헌을 완수하리라는 기대가 무르익었다.
다만, 이때부터 이미 이런 낙관적 전망에 그늘을 드리우는 새로운 위험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대선 결선에 정통우파 대신 극우파 카스트 후보가 진출하면서 카스트 돌풍이라고나 할 현상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위험은 그토록 고대하던 진보적 헌법안이 발표되고 난 다음에 오히려 더 압도적인 규모와 형태로 칠레 사회를 엄습했다. 2022년 5월에 처음 발표된 새 헌법 초안은 민주적-진보적 헌법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후 칠레 국민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느냐와 별개로, 2022년 칠레 개헌안에는 다른 나라 좌파, 사회운동 세력에게 영감과 시사를 줄만한 내용이 적지 않았다. 노동은 물론이고, 여성, 소수자, 선주민 등의 권리를 가장 현대적으로 정식화한 '21세기 사회국가' 헌법이라 할만 했다. 내용이 이러한 만큼 칠레 좌파는 노동, 여성, 소수자, 선주민 등의 광범한 지지를 통해 새 헌법이 무난히 제정될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선주민 관련 내용을 이유로 들며 개헌안을 지지하지 못하겠다고 나왔고, 선주민은 여성, 소수자 관련 내용을 들먹이며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이것은 사태를 너무 단순화한 문장이다. 그러나 주로 이런 방식을 활용해 민중 집단들을 분열시키고 개헌안 반대 여론이 증폭되게 부추긴 기득권층-범우파 정당-우파 시민사회의 선전 활동이 '눈부시게' 전개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이 특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선주민 관련 내용이었다. 칠레는 페루, 볼리비아와는 달리 유럽계 이주민이 다수이고 선주민은 소수다. 그러나 어쨌든 마푸체족 같은 선주민 인구집단이 존재하며, 이들은 오랫동안 칠레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억압받는 계층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격렬한 사회운동의 주체가 됐고, 선주민 권리 보장이 헌법 개정안 심의 과정에서 핵심 쟁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이에 대한 새 헌법안의 답은 '칠레는 다민족(plurinational) 국가'라는 새로운 자기 규정이었고, 이에 따라 선주민 공동체에 강력한 자치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이 헌법안에 담겼다.
개헌안 반대 블록은 바로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다민족 국가'라는 규정이 칠레를 갈가리 찢어놓으려는 음모라 규탄했고, 선주민 공동체의 자치 권한 강화가 그러한 국가 해체의 증거라 몰아세웠다. 이 논리는 강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지어는 상당수 선주민 밀집 지역에서조차 선주민 운동가와 대중을 분리시키며 개헌안 반대 여론이 다수가 되도록 만들었다. 개헌안 반대 진영은 칠레 사회에 잠복해 있던 인종주의 정서를 시끄럽게 깨워냄으로써 좌파, 사회운동 세력이 머릿속에 그리던 '개헌안 지지 다수자연합'을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2022년 9월 4일에 실시된 개헌안 국민투표 결과는 참담했다. 어느 정도 결과가 예상됐던 이번 대선은 이때에 비하면 '충격'이라 할 수도 없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헌법안 '찬성'은 38.13%에 그쳤고, '반대'가 무려 61.87%에 이르렀다. 몇 달 전부터 대략 '찬성' 45% 대 '반대' 55%로 뒤집히기 시작한 각종 여론조사 결과들보다도 더 안 좋은 수치였다. 칠레 안팎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탈신자유주의-탈피노체트 개헌은 이렇게 좌절되고 말았다.
의무투표제의 충격이 던지는 물음
이때 칠레에서 벌어진 일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득표율만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득표수도 봐야 한다. 개헌안 찬성표가 40%도 안 됐다는 보도만 보면, 그간 칠레에서 좌파를 지지하던 유권자 가운데 상당수가 개헌안에 등을 돌렸으리라 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1년 전 대선 결선에서 보리치에게 투표한 유권자는 약 462만 명이었고,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유권자는 약 486만 명이었다. 기존 좌파 지지층에서 일정수가 빠져나가기는커녕 조금이나마 지지가 늘어났던 것이다. 한데 도대체 왜 보리치 득표율이 55%가 넘던 사회에서 1년만에 개헌안 찬성표가 고작 38%가 나왔는가?
답은, 투표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2021년 대선 결선투표 참여자는 약 827만 명이었다. 그러나 2022년 개헌안 국민투표 참여자는 약 1302만 명이었다. 1년 사이에 투표자가 무려 500만 명 가까이 늘어났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의무투표제 도입 때문이었다.
2012년 전까지 칠레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권자가 스스로 등록해야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일단 등록한 유권자는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했다. 겉으로는 의무투표제이지만, 아무리 봐도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유권자들이 등록 자체를 꺼리도록 만들어서 이들의 투표 참가율을 낮추려는 제도였다.
그러다가 2012년에 의무투표제를 폐지했다. 정확히 말하면, 피노체트 정권이 만들어놓은 제도를 정반대로 바꿨다. 법정 선거권자가 자동으로 등록되게 했고, 등록된 유권자가 투표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조항은 없앴다. 전반적으로, 한국과 비슷해졌다.
이런 제도 변경으로 투표수나 투표율에 어떤 차이가 나타났는가? 의무투표제가 실시되던 2010년 1월 대선 결선투표 참여자는 약 720만 명이었고, 제도가 바뀌고 나서 치러진 2013년 12월 대선 결선투표 참여자는 약 569만 명이었다. 등록 유권자 수는 과거 800만 명 언저리에서 약 1357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의무투표제가 사라지자 투표율이 40% 대로 주저앉아 투표자 총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한데, 2022년에 투표 제도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번에는 자동 등록제를 그대로 둔 채 의무투표제를 다시 도입했다. 50% 안팎에 그친 지난 10년간의 낮은 투표 참여율이 새 헌법안 논의 과정에서 뜨거운 쟁점이 됐고, 그래서 1300여만 명이 넘는 법정 선거권자 전체에 대한 의무투표제를 새롭게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 개헌안 국민투표는 이 새 제도에 따라 실시된 첫 번째 투표였다.
자동 등록제가 없던 시기부터 의무투표제가 사라진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투표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던 500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개헌안을 놓고 참으로 오랜만에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결과가 개헌안 '부결'이었다. 1년 전 보리치 투표자가 모두 국민투표에 참여해 '찬성'표를 던졌다고 전제한다면, 500여만 명 중 고작 20여만 명 정도가 개헌안 지지 입장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500여만 명 중 대다수는 개헌안 반대 진영의 논리에 공감하며 개헌안 부결의 핵심 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숨어 있던 민중이 좌파, 사회운동 세력에게 1973년 9. 11 쿠데타보다 더한 역사적 패배를 안겨준 셈이었다.
물론 2022년 이후 투표장에 나타난 민중의 정체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런 분석을 참고하지 못한 채 쓰였기에 커다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500만 명'이 극우파 지지층으로 굳어졌다고 무턱대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령 1차 개헌안이 부결된 뒤에 극우파 주도로 입안된 2차 개헌안(이민이나 임신중지의 제한이 주 내용이었던)을 놓고 2023년 12월 17일에 실시된 2차 개헌안 국민투표에서는 '반대' 55.75%(689만 명) 대 '찬성' 44.24%(547만 명)가 나와 역시 개헌안이 부결됐다. 2차 국민투표에서는 찬반을 놓고 좌우의 입장이 1차 때와는 정반대로 바뀌었으므로, 이 결과는 '새로운 500만 명' 중 상당수가 진보적 개헌안뿐만 아니라 너무 심한 퇴행적 개헌안에도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500만 명 = 극우파'는 분명히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번 대선 결선에서 하라 후보가 4년 전 보리치가 얻은 것보다 더 많은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고도 카스트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지형 자체는 2022년 1차 국민투표의 유산인 것만 같다. 이번 결선투표에는 3년 전 국민투표 참여자 수보다 좀 적은 1248만 명이 참여했고, 이 중 40% 가량이 하라에게, 60% 가량이 카스트에게 투표했다. 개헌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대략 4 대 6으로 나왔던 구도의 판박이다.
물론 개헌이 총체적으로 실패한 뒤에 이를 반전시킬 만큼 뚜렷한 정치적 실적을 보여주지 못한 보리치 정부의 오류와 한계를 지워버린 채 2022년과 2025년을 곧바로 연결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보리치 정부의 실정이라는 요소는 주로 대선 1차 투표에서 하라 후보가 예상만 못한 성적을 거두고 파리시 후보가 약진한 결과와 더 직결된다고 봐야 한다. 이는 그간 좌파에 투표하다 보리치 정부에 실망한 유권자층이 파리시 후보 쪽으로 이동한 결과였다. 결선을 앞두고 파리시가 하라 후보 지지를 공표하지 않았음에도 파리시 표의 대부분이 하라 후보에게 간 사실을 통해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즉, 이번 대선 결선투표에서 기존 좌-우 유권자의 진영 간 이동은 거의 없었다. 승패를 결정한 것은 의무투표제가 재도입된 2022년 개헌안 국민투표 이후 정치적으로 실체화한 '새로운 500만 명'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이 극우화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차 개헌안 국민투표가 이들에게는 향후 장기간 지속될 정치적 선택의 바탕을 형성한 '정초 선거'였던 것이다. 그때 선주민 자치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일단 틀이 잡힌 이들의 정치적 상식이 이번에는 베네수엘라 출신 이민자 문제 등을 놓고 '카스트 지지'로 발현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새로운 민중과 대면하지 않은 희망의 무력함
그렇다면 칠레의 교훈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0여 년 전의 패배, 즉 '야만'적 군부 쿠데타로 인한 인민연합 정부의 붕괴는 처참한 비극이었지만, 그럼에도 칠레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좌파, 사회운동 세력에게 자부심의 근거가 됐다. 끝까지 민주주의를 지키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때의 칠레가 겪은 패배는 비참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뜨거운' 교훈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반세기만에 다시 겪은 이 패배는 어떠한가? 여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통해 피노체트주의 정부를 다시 불러들인 이 경험, '야만'으로 시작된 한 시대를 새 헌법 제정이라는 지극히 '문명'적 절차를 통해 끝내겠다던 포부의 이 좌절은 세계인에게 50여 년 전 9. 11보다 더 아픈 상처로 다가온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일론 머스크 같은 새로운 지배자뿐만 아니라 전에 보지 못한, 낯선 새 민중을 탄생시킨 것은 아닌가?
아니, 성급한 결론은 금물이다. 칠레 내부의 분석조차 이제야 막 시작되고 있고, 더구나 칠레 사회의 지형과 우리의 그것은 또 다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신자유주의가 낳은 새로운 민중과 대면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전망이나 전략의 문제만은 단호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즉, 과거에 '혁명'이 차지하던 자리에 막연히 '제헌' 혹은 '전면 개헌'을 채워 넣는 구상은 이제 재검토되어야 한다. '개헌'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극히 실제적이고 단계적인 개헌의 정치는 한국을 비롯한 21세기 민주 국가에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마치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환상 속 민중이 삽시간에 '제헌'의 주체로 나서리라는 기대는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신자유주의가 훑고 지나간 뒤의 현실과 대면하는 모진 단련을 이겨낼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500만 명'의 칠레인과 마주쳤던 이 무서운 이야기는 바로 우리 옆 이웃의 모습으로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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