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전기왕이 될거야'? 식민지 조선에서 전기로 성공한 '오구라', 문화재도 욕심?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 ④ 문화재 반환 문제의 거물, 오구라 다케노스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이다. 하지만 한일 양국의 문화재 반환 문제 연구자나 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이 바닥의 '거물'이다. 조선 침략의 원흉을 말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인 것처럼 한일 양국의 문화재 반환 문제를 말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오구라 다케노스케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를 '문화재 반환계의 이토 히로부미'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생각한다.

'오구라 컬렉션'이라고 부를 만큼 그가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의 수량은 두말할 나위 없고 국보급·보물급에 해당하는 큰 가치가 있는 것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 문화재 반환 문제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 대흥전기회사 사장 시절의 오구라 다케노스케 ⓒ<대흥전기주식회사 연혁사와 발달사>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어떤 인물이길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가져갔을까?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어떤 유물들을 어떻게 긁어모았을까? 그리고 한일회담에서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가져간 '오구라 컬렉션'은 어떻게 논의되었을까? 제2부 두 번째 주제는 이와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거물'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그에 얽힌 문화재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오구라, 조선 땅을 밟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870년 8월에 치바현(千葉県)에서 태어나 1896년에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영법과(現 법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해운업을 하는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에 취직하여 해상법 관련 법률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그는 도쿄위생회사(東京衛生會社)의 뇌물 사건에 연루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회사 설립 과정에서 국회의원과 공무원들 사이에 뇌물이 오갔고, 여기에 그도 연루된 것이다.

이 회사는 도쿄시의 쓰레기와 오물을 처리하여 치바현 농가에 비료를 제공하는 회사였는데, 그의 아버지 오구라 요시노리(小倉良則)가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치바현(千葉県) 의회 의장, 자유당(自由党) 국회의원, 나리타 철도주식회사(成田鐵道株式會社) 사장, 나리타 은행(成田銀行) 책임자를 역임한 당시 정·재계의 유력 인사였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도 뇌물 수수 사건의 혐의자로 조사를 받았고 1901년에 위증죄로 금고 1개월 형을 선고받아 복역한다. 출소 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1904년 1월에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그는 대학 선배인 오쿠라 구메바(大倉久米馬)의 권유로 1903년 도쿄에 위치한 경부철도회사에 입사하여 회계 업무를 담당하다가 1904년 1월 조선 땅으로 건너와 경부철도회사 대구출장소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조선의 전기왕'으로 가는 서사(?)가 시작된 것이다.

오구라, 조선 땅을 사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월급의 대부분을 토지를 사들이는 데 사용했다. 특히 지인의 권유로 대구읍성 밖의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1903년 말부터 경부철도 공사를 위해 일본인들이 대구에 몰려들었는데, 이때 일본인들이 대구읍성 밖의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도 이에 편승한 것이다. 이때 사들인 토지의 가격 크게 오르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토지를 매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명의를 빌려가며 불법적으로 토지를 매입했고, 고리대부업으로도 조선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저당 잡힌 토지나 집을 헐값에 손에 넣기도 했다.

▲ <황성신문> 1906년 5월 14일 기사 중 오구라 다케노스케 관련 부분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오구라 다케노스케도 대구에서 이 방법을 이용하여 토지와 집을 사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1906년 5월 14일자 『황성신문』에서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사의 요지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정학서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1,200환 정도가 되는 집을 200환에 저당 잡았는데, 정학서가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자 집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다가 금지당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를 통해 오구라 다케노스케뿐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 들어온 많은 일본인들이 식민지로 전락해 가고 있던 힘없는 조선에서 고리대부업를 통해 조선인들의 토지와 집 등의 재산을 착취했다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대구에서 토지 매매를 통해 큰 돈을 벌어 들일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오구라, '조선의 전기왕'이 되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904년 10월 도쿄 본사로 이동했다가 1904년 12월 경부철도 완성을 계기로 1905년 초에 사직서를 내고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그는 그동안 사들였던 토지를 활용하여 농장, 과수원, 과자 가게 경영, 주류 판매 등을 하거나 1908년 11월에는 왕골을 이용하여 돗자리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사업이 부진한 가운데, 그는 전기사업에 주목했다.

1910년을 전후로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 사이에서 전기사업이 큰 주목을 받았는데, 원산, 인천, 부산 등지에서 전기회사가 속속 등장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 또한 당시 대구에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기도 했고, 경부철도가 대구를 통과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대구에서 전기사업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911년 8월에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하며 '조선의 전기왕'으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1916년에는 광주전기회사와 함흥전기회사를 설립했고, 1917년에는 대구전기회사와 함흥전기회사를 합병하여 대흥전기회사(大興電氣株式會社)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그가 '조선의 전기왕'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대흥전기회사 본사 ⓒ <대흥전기주식회사 연혁사와 발달사>

대흥전기회사 설립 이후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전기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1918년에 회령전기회사를 설립하고, 1919년에는 광주전기회사와 포항전기회사를 대흥전기회사로 합병했다. 대흥전기회사는 통영전기회사(1926), 전남전기회사(1930), 남원전기회사(1932), 영법전기회사(1932)를 차례로 합병하고, 1936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었던 13개의 전기회사들을 합병하며 사세를 더욱 크게 확장했다.

이후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937년 3월에 대흥전기회사, 남조선전기회사, 조선와사전기회사, 목포전등회사, 대전전기회사, 천안전기회사 등 6개 전기회사를 통폐합하고 사명을 남선합동전기회사로 변경하며 사장에 취임했다. 이와 함께 1939년 9월에는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으로서 조선전력 사장, 1939년 11월에는 북선합동전기회사 사장에도 취임하면서 '조선의 전기왕'이 되었다.

▲ 남선합동전기회사 본사. ⓒ <대흥전기주식회사 연혁사와 발달사>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의 전기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협력이 있었다. 이는 그가 『대흥전기주식회사 연혁사』의 서문에서 밝힌 회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전기사업은 최근 눈에 띄는 발달을 거두어 산업 문화에 공헌하여 온 바가 심대함은 지금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아시아 부흥의 대건설 도상에서 대륙병참기지 조선의 각종 산업 증진이 중요시되면서 전기사업의 사명은 더욱 중대해져 왔다.

돌아보면 지난날 대구에서 동지와 함께 전기사업을 일으킨 이래 30여 년의 성상을 보냈는데 그간 총독부 당국을 비롯하여 관계 지방 관민 여러분의 후원과 더불어 안으로 중역, 주주, 직원 여러분께서 협력해 주신 일은 깊이 감사해 마지않는 바이다.

마침 당국의 전기사업 통제 방침에 순응하여 1937년 남조선의 통제를 실현할 수 있는 때를 만나고 또한 북조선의 확충 나아가 중국 북부와 산시의 군 관리 전기사업에도 미력을 다하여 인문의 발전에 공헌할 기회를 부여받은 것은 전적으로 시세의 은혜라고 믿는 바이다. 기왕을 돌아보면 감개무량하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조선총독부 '당국의 협력'과 '전기사업 통제 방침'을 통해 전기사업을 추진·확장해 나갈 수 있었고, 1937년 3월에는 남선합동전기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남조선의 전기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당시 조선 남부와 북부 지역의 주요 전기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조선의 전기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구라, 식민지 조선에서 성공하다

지금까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의 전기왕'으로 올라선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봤다. 그는 조선에서 토지 매매와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고, 1911년에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1917년에는 대흥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지방의 전기회사들을 하나둘 흡수·통합하며 전기사업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1930년대 후반에는 남선합동전기회사, 북선합동전기회사, 조선전력의 사장을 역임하며 '조선의 전기왕'이 되었다.

그는 전기사업뿐만 아니라 선남상업은행 인수(1912), 대구상공은행 설립(1933), 대구증권회사 설립(1934) 등 금융업에도 뛰어들어 지역 금융계에 큰손이 되었고, 대구상공회의소 회장(1935), 상공은행장(1939)을 역임하면서 사업가이자 재력가로서 대구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기사업, 금융업 등 조선총독부가 실시했던 식민지 정책이 있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를 거점으로 '조선의 전기왕'이 되었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나는 해적왕이 될 거야!”라고 말한 것처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의 전기왕이 될 거야!'라고 공언하지는 않았겠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전기사업과 금융업을 통해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리는 성공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사업가이자 재력가였던 그가 왜 조선에서 수많은 유물들을 긁어모으는 수집가가 되었을까?

■ 참고문헌

배영순 <韓末·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正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8.

대흥전기주식회사·오진석 역, <대흥전기주식회사 연혁사와 발달사>, 2025.

이형식, <'조선의 전기왕'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조선사회>, 동양사학연구 Vol.145, 2018.

경상북도·(사)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2018.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오구라 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2014.

<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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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봉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엄태봉 교수는 정치학자로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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