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엥겔스 혁명이론의 숨은 공저자, 리지 번스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철학자를 가르쳤던 혁명이론의 뿌리

역사책을 펼치면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이름이 금빛으로 빛난다. 하지만 그 빛나는 이론의 뒤편, 맨체스터의 매캐한 공장 굴뚝 아래에는 한 아일랜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지 번스(Lizzie Burns, 1827-1878). 세계를 뒤흔든 혁명 이론의 진짜 저자는 어쩌면 그녀였을지 모른다.

공장 소녀가 철학자를 가르치다

1843년, 부유한 독일 방직공장 주인의 아들 엥겔스가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공장을 관리하러 온 스물셋 청년은 묘한 취미가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것이다. 귀족 자제들이 사냥과 승마를 즐길 때, 이 청년은 빈민가 골목을 배회했다. 그곳에서 그는 메리 번스(Mary Burns, 1823-1863)를 만났고, 메리를 통해 동생 리지를 알게 되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온 번스 자매는 하루 14시간씩 방직기 앞에 섰다.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일했고, 먼지로 폐를 망가뜨리며 살았다. 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잠깐 쉬려다 감독관에게 걸리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공장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삶. 이것이 19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찬란한 이면이었다.

그녀들은 책으로 배운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착취를 이야기했다. 엥겔스는 그녀들의 안내로 빈민가 뒷골목을 걸었고, 공장 노동자들의 숨 막히는 현실을 목격했다. 하수구가 넘쳐흐르는 골목, 한 방에 열 명씩 누워 자는 쪽방, 일곱 살 아이들이 석탄을 나르는 광산. 대학 강의실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산교육이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자본가의 아들이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한 역작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1845)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노동자 여성들 덕분이었다. 엥겔스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는 리지와 메리에게서 나왔다. 교수는 자본가의 아들이었지만, 진짜 선생은 공장 소녀들이었던 셈이다. 혁명이론서는 서재의 책상이 아니라 공장 바닥에서 태어났다.

15년의 기다림, 그리고 병상 결혼식

메리가 1863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리지는 엥겔스의 반려자가 되었다. 둘은 15년을 함께 살았다. 런던과 맨체스터를 오가며,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동안 리지는 그의 곁을 지켰다. 엥겔스가 <자본론>(Das Kapital) 출판을 위해 마르크스(1818-1883)에게 돈을 보낼 때, 리지는 그 옆에서 살림을 꾸렸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공장 노동자 출신 아일랜드 가톨릭 여성과 독일 철학자의 관계는 '결혼'이라는 이름을 얻기 어려웠다. 엥겔스의 사교계 친구들은 리지를 가정부쯤으로 여겼다.

엥겔스는 평생 계급철폐를 외쳤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반려자와는 15년을 함께 살면서도 결혼하지 않았다. 물론 리지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변호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결혼 제도는 여성을 억압하는 낡은 굴레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리지 자신의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엥겔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 타협이었을까?

1878년, 리지가 병으로 쓰러지자 엥겔스는 부랴부랴 병상 결혼식을 올렸다. 죽음을 앞둔 여성에게 마침내 주어진 '부인'이라는 호칭. 15년을 기다린 끝에 받은 결혼증명서. 혁명가가 평생 반려자에게 준 '공식적 인정'은 그것이 전부였다. 리지는 결혼증명서를 받은 지 며칠 만에 쉰한 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진보적 이론과 개인적 실천 사이의 간극.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씁쓸한 질문이 아닐까.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는 이들도 결국 자기 집 안에서는 구태를 답습한다.

보이지 않는 공헌, 지워진 목소리

리지는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쓸 수 없었다. 당시 공장 노동자 아이들에게 학교는 사치였다. 일곱 살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먹고살 수 있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는 증언이었다. 엥겔스가 묘사한 비참한 노동 현실, 어린이 노동의 참상, 빈민가의 절망, 전염병이 창궐하는 노동자 거주지—이 모든 것은 리지와 같은 이들의 삶이었다.

혁명 이론은 서재에서만 탄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굴뚝의 검은 연기 속에서, 피와 땀이 밴 작업복에서, 빈 배를 움켜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서 태어난다. 리지는 그 현장을 엥겔스에게 보여준 안내자였고, 증언자였으며, 어쩌면 공동 저자였다. 그녀의 경험 없이 엥겔스의 저작은 공허한 관념론에 그쳤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은 전 세계 대학 교재에 실렸지만, 리지 번스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녀에게는 저서도 없고, 연설문도 없고, 심지어 제대로 된 초상화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역사는 대개 글 쓸 줄 아는 자들의 것이 되어왔다. 펜을 쥘 수 있었던 자들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약 리지와 메리가 없었다면 엥겔스는 노동자 계급의 진짜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공장에서 장부나 들여다보고, 노동자들을 숫자로만 파악하는 자본가의 아들로 남지 않았을까? 혁명 이론의 뿌리는 지식인의 머리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에 있었다.

우리 시대의 리지들에게

2025년 오늘,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리지 번스'가 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배달을 시작하는 노동자, 치매 노인을 돌보며 허리를 망가뜨리는 요양보호사,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하는 노동자, 빌딩을 청소하며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미화원, 그들의 땀과 노동으로 세상은 돌아가지만, 정작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리지 번스는 평생 가난했고, 제대로 된 인정도 받지 못했으며, 역사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세계 노동운동의 이론적 토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없었다면 <공산당 선언>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쳤을 것이다.

다음에 누군가 "역사를 만든 위대한 사상가"를 논할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 사상가의 뒤에는 누가 있었는가? 그들의 이론은 누구의 삶에서 나왔는가? 누구의 고통이 그 책의 문장이 되었는가?"

리지 번스(1827-1878),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 여성. 하지만 그녀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를 쓴 사람이었다. 다만 펜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리지들이 우리 곁에서 역사를 쓰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역사의 각주에 머물렀던 이들이야말로 본문이어야 한다."

▲리지 번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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