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은 때로 '성공'과 '승리'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출간한 역사학자 정병준과의 대담 ⑧·끝

김구, 이승만과 미군 무선통신으로 연락하고 혹하다

박인규

이승만의 복권에 관한 이야기도 잠시 나누고 싶다. 1925년에 탄핵된 이후로 1933년까지는 그야말로 끈 떨어진 신세였는데, 1941년에 김구가 최종적으로 워싱턴 대표로 세워주면서 임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미주 교포들이 엄청나게 반대했다.

정병준

1930년대에 국제연맹에 가면서 복권됐다. 그 후 이승만은 간헐적으로 국무위원을 하다, 안 하다 했다. 실질적인 부활은 재미한족연합회가 만들어지면서였다. 이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이승만이 당시 하와이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있었으면 아무것도 안 됐을 거다. 없으니까 국민회, 동지회가 연합하여 태평양전쟁 전에 재미한족연합회를 만든다. 임정 후원, 미국의 외교 및 국방 후원, 미국 상대 외교라는 세 가지를 목표로 했다. 후원은 돈 내는 거였다. 외교 관련 사항을 이승만, 국방 관련 사항을 한길수가 맡게 되는데, 한길수가 반발한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이 1919년과 똑같이 행동한다. 자기 개인 명성을 위해 혼자 외교하고, 한미협회라는 걸 만들어서 독단적으로 공적인 일들을 주무른다. 그러니까 미국 내 교포들, 40대와 50대의 사업하는 사람들이 반발한다. 그러니 또 이승만이 역할을 거부한다. 이승만은 자기 권한 침해하는 건 무조건 거부했다.

결국은 재미 한인사회가 분열하고, 임정에 돈을 안 보내기 시작한다. 1943년도에 이걸 임정이 해결하겠다면서 10분의 7이 모여서 그중 10분의 7의 동의로 개편하면 승인하겠다고 하고, 이승만을 빼는 걸로 결정됐는데, 김구가 이러한 재미 동포들의 결정을 비토한다. 민주적 결정을 묵살한 것이다. 비토한 가장 큰 이유는 김구가 충칭 임정에서 '킹스톤'이라는 암호명으로 미군용 무선통신망을 통해 워싱턴의 이승만과 교신해보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전신인 정보조정국(COI)에서 팀을 만든다. 이들이 대일전을 위해 충칭에서 첩보 미션을 수립하고, 이걸 아이플러가 이끈다. 여기에 이승만이 보낸 장석윤이 따라간다. 이들이 충칭에서 국민당 사람들, 김구, 조소앙 등등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김구가 이승만과 무선을 주고 받게 된다. 당시 미국으로 전보 보내는 게 엄청나게 비용이 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 이승만의 대표가 미국 특수공작부대와 같이 충칭에 나타난 거다.

박인규

완전히 혹했을 것 같다.

▲박인규 프레시안 고문(좌)과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우). ⓒ돌베개 정지연

정병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거다. 충칭 임정에서는 이승만이 미국 정보, 군사 당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과대평가였다. 어쨌든 이 사건은 충칭에서 미국 외교는 역시 이승만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됐을 것이다.

이 결정적인 시점에서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임시정부를 후원했던 재미 한인과 충칭 임시정부의 관계가 단절된다. 이승만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이후 직접 정부 조직, 정당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 재미 한인사회와 이승만의 관계도 끊어진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간판을 쓰게 된다. 그래서 해방 후에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리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충칭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민당과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감없이 사용한다. 임정이 실제로 들어온 후에는 그 간판을 버린다.

미국은 1942년도 OSS 한인대원 50명 모집을 이승만에게 청탁한다. 굿펠로우가 부탁했다. 이승만이 독단으로 명단을 만들어줬고 그중 일부가 가담한다. 후에 재미한인들이 이를 알고 공적인 부탁을 왜 사적으로 처리하느냐고 지적하면서 문제가 된다. 결국 OSS가 이승만이 자신들과의 연계를 명성을 높이는 데 사용한다고 판단하고 공적인 관계를 중단하게 된다. 나중에 OSS가 국내 진공작전인 냅코 작전을 실시할 때 재미한인, 이승만과의 연계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게 되는 이유다.

박인규

OSS라는 게 사실은 지금의 중앙정보국(CIA)이다. 도노번, 덜레스 등 미국의 엄청난 상층부들이 관계한 곳이다. 지금 소위 '딥스테이트'의 원조인데, 거기의 부국장 굿펠로우와 이승만의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이승만의 미국 내 인맥이 상당히 깊은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이승만의 본래 원천은 결국 미국 내 상층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승만이 1905년에 루스벨트 대통령, 헤이 국무장관을 만난 경험이 결국 '미국에서의 성공과 입지를 위해서는 미국의 고위층, 이른바 하이 소사이어티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정병준

그런 커넥션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굿펠로우는 원래 언론인 출신이다. 공작하는 일을 했다. 언론인과 공작이 잘 연결이 안 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랬다. 1950년대 덜레스가 CIA 국장일 때 굿펠로우는 칠레의 구리광산 커넥션에도 관련된다. 이건 커밍스의 연구다.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회의 자리에서 만났다고 한다. 둘을 연결해 준 건 게일과 같은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이 '코리아 잘 안다, 전문가 있다'하는 식으로 연결해 준 거다. 회의에 가서 이승만은 자신을 프린스턴대학, 임정 대통령, 교육자, 기독교 목사라고 소개한다. 이후 굿펠로우가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둘은 일종의 공생관계가 된다.

박인규

이승만이 미국에서 약 40년을 체류하면서 결국 한국 대통령이 된 과정을 보면 1954년 미국에 의해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발탁된 고딘디엠이 떠오른다. 한국이 미국의 세계 경영에 참 중요한 교과서 역할을 한 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정병준

이승만이 1차 대전 후에 미국에서 기독교 한인 친우회 같은 걸 한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도 선교사 자제들과 미국 내에 네트워크를 만든다. 생각해보면 역사상 한국의 정치인 가운데 이런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이 없다. 김구도 중국 내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없었다.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1940년대 한국에서 근무했던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쫓겨와서 이승만의 네트워크에 가담한다. 이들은 하나 같이 미래의 한국 지도자는 이승만이라고 했다.

그런 건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체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이승만이 그런 지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인규

어쨌든 해방의 시기 김구는 냅코, 독수리작전에 참가하고 있었고, 김규식은 <양자유경>이라는 시를 서재에서 쓰고 있었다. 그게 당시의 처지였다. 여기까지가 책 본문의 이야기이다. 그 이후에 미소공위가 끝나는 과정 전후로 김규식은 좌우합작에 나서고, 남북협상에도 나선다. 안타깝게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해방 이후의 김규식에 관한 글도 집필할 계획인가? 김규식의 일생을 평가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탈세계화가 다시 이야기되고 국가의 중요성이 논의되는 시기, 김규식으로부터 배울 게 무엇이 있을까?

▲김규식이 해방 후 남긴 휘호. "만리붕정 일주위공."

정병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일단 1945년 8월에서 집필을 마무리한 건 힘에 부쳐서 당장은 더 쓸 수가 없어서였다. 필요하신 분들은 <1945년 해방 직후사>와 3권에 부록으로 실린 '버치 문서를 통해 본 김규식의 1946~1947년 정치 활동'을 참고해주셨으면 한다.

박인규

부록 논문이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다.

김규식이 남긴 역사적 유산

정병준

아쉬운 마음이 있어서 부록을 수록했다. 지금 내지 않으면 그 전에 내가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서 일단 1945년까지의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웃음) 해방 후 이야기는 은퇴 전후로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버치 문서 같은 걸 보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디테일들이 많다. 예를 들어 여운형이나 김규식은 당시에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에 관한 해석들. 아마도 자신의 잠재적 서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의 운명을 쥐고 있었던 미국과 소련은 각기 미래의 잠재적 지도자 서열을 갖고 있었고, 당사자들도 자신의 위치를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결국 김규식에 대해 왜 썼는가 생각을 해보면, 사실 한국에서는 승패가 분명하고 장악력이 강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크다. 이승만, 김구, 박헌영, 여운형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규식 같은 경우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기 어렵고, 어떤 정치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고독한 개인이자 플레이어로 살다 간 사람이다. 그래서 잊혀졌다.

하지만 나는 역사에 남은 그의 유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물, 그들의 역할이 있었던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는데, 마치 없었던 것처럼 기억하는 건 너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인생을 써야겠다는 결심, 일종의 소명의식이 있었다. 쓰다 보니까 읽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이 되긴 했다. 그래도 연구자로서 내가 이러한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잘 읽히고, 간편하고, 축약이 있고, 재미있는 책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있어야 할 책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고,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의무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규식을 조명하는 글을 썼다.

역사가 과연 정해진 직선의 길로 왔느냐, 그러니까 성공한 길이 다 정당한 것이냐, 성공했다면 그 사람은 승리자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역사학자로서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역사에는 다양한 가능성과 분기점이 있다. 그 분기점이 어떤 결정과 어떤 판단에 의해서 처음의 굉장히 미묘하고 작은 차이가 나중에는 큰 분기가 됐는지 설명하는 게 역사학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

이 시대에 직접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박인규

원래 하고 싶은 건 이유가 없다. 그냥 하고 싶은 거다. (웃음) 국제부 기자를 오래 한 입장에서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현실 인식을 비판적으로 보자면 2개의 큰 단점이 있는데, 하나가 북한맹(北韓盲)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국제치(國際癡)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끝에서 일본의 지배, 미국의 영향력 속에서 세계를 보게 된 한계로 선진국이라는 말을 하는 지금도 세계 인식 속에 북한, 중국, 일본, 미국이 전부인 측면이 있다. 반병률 교수 이야기인데, 독립운동 지도자 중에 김규식만큼 국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유럽, 파리, 중국, 몽골, 러시아, 미국을 다 가봤고 세계를 경험해 봤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충칭 임정에 돌아와서도 외교를 담당하지 못한 그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의 국제감각 같은 걸 활용하지 못한 건 비극이다. 당대 한국인들, 특히 정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정병준

한국 주류에 용납되거나 인정되거나 체화되기는 어려웠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너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미군정이 입법의원을 운영할 때 김규식을 좋아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코리안과 달리 얘기가 된다'는 거였다. 문제는 김규식이 '다른 많은 코리안'들과 공명할 수 있는 눈높이를 스스로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시국에는 이승만처럼 선동하고 한쪽으로 몰고 일종의 정치 책략을 쓰는 사람들이 성공했다.

박인규

다극화가 이야기되는 시기, 김규식과 같은 사람이 가졌던 국제감각, 균형 감각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쪼록 건강 잘 지키셔서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바란다. 통사 책도 하나 써주시면 좋겠다. 이것으로 긴 인터뷰 마치도록 하겠다.

정병준

긴 시간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

▲해방 80주년을 맞이하여 정병준 교수가 쓴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그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구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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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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