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출간한 역사학자 정병준과의 대담 ⑦

해방 후 신탁통치와 반탁운동의 전사, 1942년부터 있었다

박인규

이제 거의 책 내용의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책에 워낙 많은 내용이 있다 보니, 못 다룬 것도 있는데, 꼭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던 것 두 가지는 짚었으면 한다. 하나는 신탁통치의 일종의 전사에 관한 것이다.

보통 신탁통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1945년 12월 30일 모스크바 3상회의 때 갑자기 나왔다거나,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1943년도 카이로 회담에서 "인 듀 코스(in due course)", 이른바 "적절한 절차"라는 말이 나오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루스벨트가 30~40년의 기간을 이야기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미 1942년 2월에 미 국무부 외교관 윌리엄 랭던이 신탁통치안을 제기했고 그해 8월 경제잡지 <포춘>이 "신세계에서의 미국"이라는 특집의 "태평양 관계"라는 부분에서 그 내용을 다뤘다고 했다. 1942년에 미국, 영국, 중국 국민당이 이미 신탁통치에 관한 합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원봉, 한길수 간의 통신 내용 같은 것들을 다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 속에서 '한국인들은 통치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신탁통치안에 대해 김구, 조소앙 등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반대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해방 이후에 반탁운동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이미 1940년대 초반부터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신탁통치에 대단한 경계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박인규 프레시안 고문(좌)과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우). ⓒ돌베개 정지연

정병준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관련 내용은 세 가지다. 하나는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주목한다는 것. 그런데 '노예 상태'라는 것은 일본 통치의 가혹함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자치 능력이 없다는 것도 포함한 표현이었다. 그래서 자유와 독립을 'in due course'로 해결한다는 거다. 자유와 독립 이야기는 당시 중국 국민당이 주로 이야기했다. 물론 일반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에 자치 능력은 없고, 강대국의 이해는 교차하니까 신탁통치라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개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카이로 회담이었다. 1943년에 미국, 영국, 중국이 신탁통치로 합의하고 있었는데,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갑자기 전후 한국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이걸 전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토적 야심으로 이해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 문제는 지정학적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관련되기 때문에 특정 국가의 이익을 옹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제 분쟁을 야기한다는 거다. 그래서 미국은 '국제신탁'을 주장한다.

영국은 자기 식민지 문제가 있어서 한국 이야기는 되도록 회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만들어 낸 게 카이로 회담에서의 문구들이다. 가급적이면 모호하게 문맥을 마사지했다. 사실 문구만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중국(국민당)은 제일 걱정한 게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었다. 그래서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뜻을 따르긴 했는데, 신탁통치를 하는 순간 한국에 대한 독자적 영향력을 잃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미국은 중국을 억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결국 한국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 결과 1944~1945년에 미 국무부, 군부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후 UN을 이용한 신탁을 하고 독립한다, 는 코스를 만들게 된다. 이게 발표되었을 때 충칭 임시정부 인사들은 국제 공동 관리, 국제공관, 국제 공동 운영, 국제공영, 그리고 위임통치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보호'라는 것은 식민 통치 일환으로 보였다. 을사조약도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신탁, 보호, 후견, 위임이 다 똑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미국도 즉시 독립이 아니라 결국 신탁통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해방 후 반탁운동을 임정이 주도하게 된다.

사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미국은 즉시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라는 그 기사에는 지명과 인명 빼고는 어느 것 하나도 사실이 없다. 게다가 거짓말도 많다. 미국은 즉시 독립하라고 했는데 소련이 신탁을 주장했다, 한국 독립은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인의 국민투표로 하게 돼 있다, 이런 것은 다 거짓말이다.

박인규

그런 걸 가지고 반탁 시위를 한 건가.

정병준

실제로는 1943년 이래의 관성이 있었다. 즉시 독립이 아닌 것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다.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극장 카터 빈센트가 "미국의 대한 정책은 신탁통치"라고 하니까, 하지가 이걸 '거짓말'이라고 한다. 하지가 참 나쁜 놈이다. (웃음) 국무부 극동극장이 미 정부의 공식 정책을 말하는데 일개 장군이 그걸 개인 의견이라고 하면서 '한국인이 원하면 내가 독립을 주겠다'고 하고 다녔다. 별 3개 사령관이 그럴 능력이 어디 있었겠나.

박인규

우리가 알던 바와는 달리 이미 1943년도 정도부터 적어도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일제의 지배와 같지는 않지만 국제적인 지도, 감독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거기에 대한 대단한 반발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반동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그렇다면 오보가 나온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김구 등이 그렇게 반응한 것은 옳은 것이었나. OSS, CIA가 워낙 이런 프로파간다에 능하니까. 분명 뭔가가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 유명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기사. 사실상 제대로 된 사실이 거의 없고, 거짓 정보가 버무려진 의도적인 '마사지' 기사다.

미군정-한민당-이승만의 3중주,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

정병준

팩트로 보자면 <동아일보> 보도라는 게 그들이 만든 것은 아니다. UP에서 받은 걸로 되어 있다. UP 보도를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신조선보>, <조선일보> 등이 가져다 썼다. 그런데 UP에 이것의 원문이 없다.

예전에 <동아일보> 블로그였던 '동네방네'에 자기들 기사를 올려 놓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중요한 건 외신 단면으로 실은 게 아니라, 카더라, 추정한다 등의 내용으로 마사지해서 1면 톱 기사로 실었다는 점이다. 의도가 있었다. 내가 쓴 <1945년 해방 직후사>(2023년 발간, 김규식 평전 4부에 해당)에 있는 내용인데, 미군정이 들어와서 12월까지 한 게 '신탁통치 반대'다. '미군정 통제 하에 과도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거였다. 미군정 정무위원회, 현실 정치에선 이승만 중심의 정당 통일체인 독촉중협을 그래서 만든 거다. 독촉중협 회의록을 보면 이승만, 송진우, 조병옥 같은 한민당 엘리트들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 주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군정의 계획은 인민공화국은 안 되고 대신 한국인들이 임정을 모두 지지하니까 '임정을 봉대해야 한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반신탁 미군정 주도 과도 정부였다. 이와 다른 소리를 하고 다닌 하지는 사실 결정 권한이 없었다. 하지는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이 결정한 걸 현지 사령관인 자기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용을 가진 자였다.

달리 보면 일개 사령관인 하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할 수 있을 정도로 한반도가 방치되어 있었다. 이를 위한 액션플랜이 반탁운동이었다. 하지는 12월 31일에 김구 쪽에서 미군정을 접수하겠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반탁운동을 고무했다.

허위, 왜곡, 과장 보도가 어떻게 실릴 수 있었는가. 미군정 정책에서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용인된 것이다. 반탁운동이 처음에는 반소, 반공 운동이었으니까 미군정 입장에서는 고무할 만했다. 그런데 놔두니까 선을 넘어버린 상황이 벌어졌다.

박인규

미군정은 반탁으로 반소, 반공운동을 하되 자신들 통제를 벗어나지 않으면 좋다는 입장이었다.

정병준

이승만이 12월 26일에 굉장히 강한 반탁 성명을 낸다. 그런데 공산당을 비난한다. 한민당과 미군정 사이의 일련의 잘 조율된 시퀀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 <동아일보> 보도도 있다. 실질적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건 하지와 한민당, 이승만의 3자 커넥션이었다. 이들은 1945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강력한 반탁운동을 한다.

박인규

거기서 김구가 선을 넘는다.

정병준

그렇게 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반탁운동은 김구의 것이 돼버린다. 그 당시에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 진짜 진지하게 이것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 것인가, 단순한 반탁이 아니라 어떻게 전략을 짜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정치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원문을 본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떤 결정인지 정확히 파악한 사람도 없었다는 거다. 워싱턴 시간으로 12월 27일에 결정이 됐고, 한국 시간으로 28일이었다. 그때는 도쿄를 거쳐서 한국으로 소식이 왔으니까 29일에 하지가 결정서를 받아본 상황이었다. 하지는 30일에 한국 정치인들을 만났다. 신탁통치 내용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조선 임시정부 수립, 두 번째 5년 신탁이었다. 이 상황에서 송진우가 후견론을 이야기한 바로 그날 밤에 총을 맞는다. 그러고는 한국에서의 신탁 문제에 대한 대처는 끝난다.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마무리되어 버렸다. 에너지를 모아서 폭발시켰는데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목표를 타격한 게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에너지가 오도됐다. 반탁의 본류는 김구가 아니다. 미군정과 한민당이다.

박인규

요즘 국사학계의 전반적인 시각인가?

정병준

아니다. (웃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개는 김구가 주도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 '두 개의 반탁'은 전혀 다른 맥락과 결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가 반탁운동으로 대중의 지지와 후원을 움켜쥐지만 미군정의 비토를 받게 되고, 그래서 거기서 끝나는 거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강력한 지지가 있지만 대중의 지지가 없었다. 그래서 양자가 결합하는 게 민주의원이다.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 총리 김구의 서열이 만들어진다. <1945년 해방 직후사>에 지금 이야기들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⑧편에서 계속)

▲<1945년 해방 직후사>. <김규식과 그의 시대> 3권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1945년 8월부터 12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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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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