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 방석 위의 고아 소년 "존"
박인규
책은 양반집 자제와 같은 단정한 옷차림에 호피 방석에 앉아 있는 영민한 모습의 어린 김규식 사진으로 시작된다. 정 교수는 올해 1월에 이 사진의 출처를 처음으로 확실하게 특정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어린 김규식이 이런 사진을 찍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정병준
1987년 서문당에서 조풍연 선생 해설로 낸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이란 사진첩이 있었다. 개항기 조선의 모습을 담은 일본의 사진첩을 번역 출판 한 것인데, 여기에 어린 김규식 사진이 실려 있었다. 조풍연 선생은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6살 때 사진. 고아로 언더우드 집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만 썼다.
하지만 이 사진이 언제, 어디에서, 누가 촬영했는지, 그리고 어디에 소장돼 있는지와 같은 정보는 없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김규식의 아버지가 촬영 사진술을 배웠으니까 직접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연도가 안 맞는 거 같아서, 그럼 일본 사진관에서 찍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다 2023년 말에 원고를 거의 다 쓰고 검색하다 위키피디아에 누가 그걸 걸어놓은 거다. 그런데 그 이미지 아랫부분에 그 정보들이 있었다. 스미소니언에 소장돼 있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예전에 미주한인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선생이 김규식의 따님, 김우애(폴린 킴Pauline Kim)로부터 '스미소니언 헐버트컬렉션에 그 사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예전에 스미소니언 헐버트컬렉션을 샅샅이 뒤졌는데 못 찾았다. 목록에도 안 나온다. 그런데 그걸 디지털라이즈한 걸 누가 찾아가지고 올려놓은 것이다. 깜짝 놀란 마음으로 올해 1월에 스미소니언에 가서 그 사진을 결국 찾아냈다. 정말로 있었다.
호피 무늬 방석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다. 아마도 어딘가 집인 것 같았다. 서양식 오크 의자였고, 미국식 벙어리장갑에, 호피가 깔려 있고, 뒤에는 여덟 폭 화조도 병풍이 있었다. 그런데 사진 뒤에 "Protege of Rev. H. G. Underwood, JOHN", 즉 언더우드 목사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 존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호머 헐버트 컬렉션이라고 되어 있었다. 깜짝 놀랐다. 이를 바탕으로 찾아보니 선교사 헐버트가 한국에 와서 수집한 물건을 스미소니언에 팔았고, 거기에 이 사진이 끼어 들어가 있었다. 장로교 선교본부가 크리스마스에 활동 보고를 위해 발행하는 카드에 표지로 쓴 거였다.
완전히 귀족 자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름조차 김규식도 아닌 그냥 "존"이다. 결국 '우리가 이런 훌륭한 일을 많이 하니까 세계선교를 위해서 헌금 많이 내고 지원해 달라'고 하는 데 쓰인 거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관광용으로 쓰는 사진 엽서에는 또다른 김규식의 사진이 "동자"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사진들은 굉장히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부평초처럼 살았던 거다.
사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인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조선에 관한 여러 회고록을 써서 뉴욕에서 출판했다. 거기에 챕터를 할애해서 어린 시절 김규식의 이야기를 썼다. 그래서 불행했던 유년이 서양 사람의 기록에 아주 꼼꼼하게 남은 건 김규식 단 한사람뿐이다.
박인규
거기에 김규식이라고 이름이 나오나? 아니면 그냥 존?
정병준
"존"과 "본갑이"다.
박인규
호피 방석에 앉아 있는 아주 영특하게 생긴 그 어린 동자 모습은 이미 다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그게 언더우드가 찍어서 헐버트가 갖고 있다가 스미소니언으로 갔다는 걸 밝힌 것이다. 찍은 곳은 언더우드 집이고 찍은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사진가 오가와 이스신이다. 이번 책에서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이 이야기인 것 같다. 이번에 언론에 많이 소개되었다.
1권 책 내용을 추려보면, 1891년 해배된 아버지와 1년을 살았다. 아버지는 이듬해 결핵으로 사망하고 다시 또 언더우드 집에 왔다. 릴리어스의 통역을 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잘했다. 그리고 1896년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신문에서 잠깐 근무를 하다가 1897년에 16살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상당히 일찍 간 건데, 의화군(의친왕)의 시종으로 갔다. 의친왕은 1896년부터 1905년까지 해외를 떠돌았다. 당시 의화군은 일본에 있었는데, 박영효 유길준 등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어 그를 멀리 보내려 한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정병준
그 당시에 궁중 내 권력 암투라는 게 대단한 것이었다. 의친왕은 고종의 직계 왕자 중에서 가장 '정상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적통은 아니지만. 순종은 당시에 '바보'에 '천치'라고들 했다.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민비와 의친왕 사이가 안 좋았는데, 나중에는 잘 후대를 한다.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미상이다. 어쨌든 1895년 민비 사후에 의친왕이 일본에 복수하겠다고 생각을 했고, 고종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해외로 내보내게 된다.
처음에 일본으로 보내는데, 시간이 지나니 더 위험한 인물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박영효, 유길준 등등 당시 고종 입장에서 '역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당시 아무런 직업도 없었고 현실이나 미래를 개척할 방법은 궁중에서 뭔가 하는 것이니, 의친왕 주변으로 와서 '당신이 왕이 되면 우리가 나라를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 좋게 보면 개혁이고 개인적으로 보면 권력을 잡는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의화군이 국내에서도 소행이 난잡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일본으로 간 순간 정치적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부추기는 거다. 불나방들이 모여들어, 요리집 데려가고 기생집 데려가고 한 거다. 온갖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게 이게 다 국내에 보고됐다.
그러니 고종이 의친왕을 일본에 둘 수가 없었다. 국내에는 못 들어오니 미국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의친왕은 미국 가서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신뢰하는 사람을 붙여야 했고, 거기에 언더우드를 보낸 것이다. 돈을 보내서 부채 청산하고 미국 가는 배 편 수속을 시킨 것이다. 그러려면 시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을 데려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의친왕은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와서 나를 직접 따라오겠다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고,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 2명만 데리고 가고, 김규식은 박용규라고 하는 외교관 동생과 함께 따로 따라가게 되었으니, 갈 수 있는 곳이 뻔했다. 워싱턴 공사관에 들려서 거기서 소개해 준 로녹대학으로 가게 되는 거다.
의화군의 시종으로 시작한 미국 로녹대학 6년 유학
박인규
하여튼 의화군은 10년이나 망명 생활을 했고 미국에서 이른바 여색 행각으로 보도도 많이 됐다. 1년 정도는 또 김규식이 의화군을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들었다. 김규식은 로녹대학에서 예과 공부하고 본과 다니고, 6년을 공부한다. 김규식 앞에 서병규라는 사람이 로녹대학을 나왔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를 받았다.
정병준
서병규가 당시 김규식의 롤모델이었다. 당시에 유학을 가면 아무래도 선배가 했던 것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서병규가 한 대로 학교생활도 하고, 웅변 클럽에도 참여했다. 어학 능력이나 학습 흡수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은 공부를 그만두고 들어오게 되는데, 김규식이나 서병규는 코스워크를 마쳤다. 최초로 미국식 인문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른바 '남부의 환대' 속에서 아마 김규식 일생 중에서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였으리라 싶다. 뒤에 3.1운동 때 나올 윤치호는 사실 미국 밴더빌트와 에모리에서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했다. 윤치호가 귀국해서 굉장히 친일이 된 가장 큰 이유가, 자기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까 자신이 황인종이라고 너무 멸시하고 하숙집도 못 얻고 온갖 일을 다 당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차라리 일본이 낫다고 한 것이다.
박인규
윤치호가 유학 간 시기는 언제인가? 그 시기에 이승만, 윤치호, 김규식의 미국 유학 경험이 다 달랐던 것 같다.
정병준
그렇다. 윤치호가 가장 먼저고, 그 다음이 김규식, 이승만이 이들 중 가장 나중이다.
박인규
김규식의 대학 시절을 보면, 굉장히 연설을 잘했다고 한다. 상도 받고 토론서클 회장도 했다. 주제들을 보면 스페인 전쟁, 흑인 차별 등 재미있는 게 많은데 그중에 이런 게 있다. "러시아는 아시아의 곰이고 일본은 문명의 빛이다."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존재하는 것 같다.
정병준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100년 동안 싸우니까, 서구권의 시각이 미국에도 만연했다.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대학에서 퍼져 있는 생각이었다. 영일 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런 것들의 가장 큰 이유가 결국 러시아에 대한 공포증(phobia)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로 아시아에 진출하면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할지 모른다. 이걸 저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군사력은 일본뿐이다'라는 거다. 이런 우려를 영국과 미국이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이 개항시키고 근대화시킨 국가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크다. 그 당시 시점에서도 '일본을 저렇게 만들어 낸 게 누구야? 메이지 유신을 만든 게 우리야!'라고 미국이 생각했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의 주류적인 의견이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바가 있다. 김규식도 미국 젊은이들의 기본적인 상식이나 소양 수준에서 일본을 이해했다.
박인규
러시아를 난폭한 침략자로 인식하는 것들이, 예를 들면 2015년도 아베의 2차 대전 70년 담화를 보면 러일전쟁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것처럼, 아직까지도 뿌리가 깊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정병준
김규식만 그런 게 아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직전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보면, 핵심이 러시아 반대였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군사 교관, 한러 은행 같은 걸 반대한 거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는 물러났고 이제 일본과 러시아가 있는데, 당시에 문명 개화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나 개화파의 기본적 시각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 이른바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이었다. 이런 게 만연한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영향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레이트 게임에서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투사되었다. 일반적인 선교사들의 인식도 그랬을 것이다.
박인규
김규식은 로녹을 졸업하고 서병규처럼 프린스턴에 가서 석사까지 하려다, 러일전쟁이 발발해서 1904년 귀국했다. 관비 유학생이라 돈이 없어서 그런 걸까?
정병준
돈도 없었고, 사실 유학 기간이 너무 길기도 했다. 김규식의 일생은 등을 기댈 데가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한테 의지할 수 없는 인생이어서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아남아야 된다는 강박이 굉장히 심했고 그게 성격적으로는 약간 차갑고 냉담한 면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관직에 등용된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하고 연계돼서 기독교 선교사로, 기독교 학교와 문화단체에서 일하게 된다.
언더우드 개인 비서 김규식, '조선 선교'의 기대주 이승만
박인규
정치 활동을 안 한 건가? 못 한 건가? 미국 선교사들의 방침 때문인가?
정병준
정교분리를 이야기했던 언더우드 때문이라고 본다. 돌아와서는 기본적으로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였다. 김규식이 미국 유학생이고 영어도 잘하고 그래봤자 언더우드 손바닥 안이었다. 새문안교회 20대 장로, 장로교 총회 총대, 경신학교 교감이나 총교사가 돼도 활동의 자유가 없었다. 그리고 와서 보니 일본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현실과는 전혀 달랐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과 조선에서 실제로 행하는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박인규
쑨원 등이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는 선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다. 조선도 먹고 중국도 침략을 한다. 김규식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1905년 포츠머스강화조약 당시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포츠머스에 가려고 상하이까지 가 3개월 동안 기다렸으나 결국 포츠머스에는 못 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어쨌든 포츠머스에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다. 그 직전에는 헤이 국무장관, 딘스모어 상원의원도 고위 인사들과도 만났다. 이게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른바 '외교 천재 이승만' 신화가 시작된다.
정병준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 전체를 통틀어 1905년 같은 대성공이 없다. 미국 상원의원, 국무장관, 대통령을 만났다. 사실 이승만이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윤병구 하와이 한인 대표가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루스벨트가 아무나 만나주는 게 아니다. 이승만이 한국 대표여서 만나준 게 아니다. 자기가 보낸 육군 장관 태프트가 소개장을 써줘서 만난 것이다. 당시에 하와이 한인들이 태프트에게 은제 담뱃갑을 선물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루스벨트 면담에서 대표는 윤병구이고 이승만은 통역 자격이었다.
그런데 웃긴 일이 벌어진다. 사실 이승만이 평생 가장 미워한 게 고종이다. 자기를 감옥에서 죽이려고 했으니까. 탈옥 미수여서 사형당할 뻔했다. 이승만은 늘 고종이 무능하다고 말하고 다녔다. 독재자들이 원래 자기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철천지원수로 여긴다. 박정희가 제일 미워한 사람이 이승만이다. 해방 후 숙군 때 죽이려고 했다고. 어쨌든 가서 보니까 루스벨트를 만나야 되는데 하와이 한인 7천 명이라는 대표성으로는 부족했다. 당시에 이승만은 한규설이나 고종의 측근들이 보낸 밀사 자격도 있었다. 그런데 고종을 싫어해서 고종 대표성도 부정하고 하와이 7천 명은 규모가 부족하니까, 거기서 자기가 당시 민회였던 일진회 대표라고 주장한다.
이승만은 우리는 황제의 밀사가 아니라고 했다. 구조적으로 보면 고종의 밀사가 맞다. 고종이 그 당시에 온갖 사람을 여기저기 다 보냈다. 프랑스, 미국, 영국, 프랑스, 모스크바, 독일 등등에 고종이 밀사와 함께 밀서를 보냈다. 그런 일환으로 간 건데 이승만은 개인 정치를 했다.
당시의 유명한 사진이 있다. 이승만이 포츠머스 갈 때 실크 연미복 입고 찍은 사진이다. 대표 윤병구는 그런 사진 안 찍는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게 기회니까 이런 걸 찍어야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박인규
이승만이 현실 정치를 잘 안다는 말이다.
정병준
그렇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프로모션해야 되는지를 알았다. 사실 소개장 때문에 만난 윤병구, 이승만을 루스벨트는 그냥 '알았어' 하고 '공사관 통해서 공식으로 문서를 보내' 그렇게 돌려보낸다. 이게 '끝'이다. 이미 판이 다 결정된 상황 아니었겠나? 근데 이승만이 와서 당시 대리공사 김윤정한테 (포츠머스강화회담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보장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써달라고 한다. 김윤정이 본국에 연락했지만 이미 일본 손아귀에 넘어간 상황인데 그런 걸 써주겠나. 그 얘기를 듣고 이승만이 공사관에 불 지르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이런 소식을 국내에 있는 이승만 지지자인 정순만이 <황성신문>에 투고(기서)로 알린다. 뭐라고 썼느냐면 '나라를 망쳐 먹는 것은 외교관들이다. 이들이 일을 안 해서 우리가 강화회의 방청권을 얻었는데 문서를 안 받아 못 가게 됐다. 나라를 살리려고 하는 건 아무런 지위도 없는, 의기남자 청년 이승만이다.'
국내에서는 이승만이 국왕도 못 가고 대신도 못 가고 외교관도 못 가는 포츠머스 강화회담 자리에 갈 기회를 얻었다고 선전됐다. 외교 천재 이승만 신화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이후에 이승만이 해방될 때까지 미 대통령, 국무장관을 만난 적이 없다. 만난 것 자체가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게 이승만 신화의 출발점이다.
박인규
<우남 이승만 연구>를 보면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선교의 중심으로 보고 감옥에서 5년 7개월 동안 필요한 책을 다 보게 해줬다고 한다. 미국 선교사들과 이승만의 관계, 언더우드와 김규식의 관계는 좀 다른 것 같다.
정병준
언더우드와 김규식이 굉장히 개인적인 관계였다면, 이승만의 경우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선교의 지도적 인물로 키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 유학 갈 때 공사였던 알렌만 빼고 스물 몇 명이 추천장을 써줄 정도였다.
이승만 사진들을 보면 눈빛이 다 다르다. 당시 감옥에 있을 때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까 나올 때 보면 눈빛이 그렇게 선량할 수가 없다. (웃음) 진짜로 그렇다. 미국 유학 때 사진, 하버드나 프린스턴 때 사진을 보면, 특히 졸업 사진을 보면 확실히 달라져 있다. 이른바 '셀프 이스팀self esteem'이 굉장히 높아졌다.
아이비리그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지위,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만나서 대표성 있는 역할을 한 사람이 됐다는 것에 대한 자기 자신감이 아주 충만해졌다.
박인규
이승만이 윌슨하고 개인적으로도 아는 사이였나?
정병준
윌슨한테 배웠으니까 알았을 것이다. 이승만 주장은 윌슨의 둘째 딸하고 자기가 하와이에서 약혼했다는 것이었다. "인게이지먼트 링engagement ring"(약혼반지)이 있다고 자랑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그리고 윌슨 둘째 딸이 결혼할 때 청첩을 하와이에서 두 사람 받았다는 거다. 하와이 당시 준주 총독하고 이승만 자기가 받았다는 거다. 그만큼 관계가 밀접하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박인규
그러니까 왕족의 후손,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이승만과 사실상 고아였던 김규식은 자신감 차이가 있었겠다.
정병준
김규식 본인은 자기를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회에 갔을 때, 자신의 계급을 쓰는 란에 '사족'(士族)이라고 했다.
망명 시대의 시작
박인규
김규식이 조선에 들어와서 1904년부터 1913년까지는 YMCA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새문안교회 20대 장로를 하고, 경신학교에서 교육도 하고, 특이하게도 한글 문법서도 썼다. 굉장히 다재다능한 사람이 맞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로 그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1913년 4월에 중국으로 망명한다. 부인도 있고 어린 자식도 있는데, 다 놔두고 대단한 결단을 했다. 그때 일본 총독부가 일본 내지에 교수 겸 제국대학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를 뿌리치고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 그는 호주에 인삼 팔러 간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더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책에서는 그의 망명 이유를 일제로부터의 탈출, 중국 신해혁명 동참, 언더우드로부터의 독립으로 설명했다. 혹시 김규식이 당시 심경을 밝힌 기록은 없나?
정병준
전혀 없다. 1950년에 쓴 자필로 쓴 한문, 영어 이력서에 내용이 나오긴 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다. 어린 아들과 부인이 있는데 모든 걸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헤아려보면 1913년까지 김규식이 30년 넘게 너무 많은 개인적 풍파를 겪으면서 오직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면서 살았다. 개인적 비극과 국가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의 삶은 너무나 억압되고 제약당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갈등이 굉장히 심했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풀려나서 정말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니까 정치 활동, 사회 활동에서 자유를 얻고 싶다는 욕망이 굉장히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어디에 가서 활동해야 되느냐, 미국이냐 일본이냐 중국이냐 따져보고 중국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스며들 수 있고 사라질 수 있고 온갖 자유를 가질 수 있으니까. 신해혁명 이후 중국 혁명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3.1운동 때까지 김규식의 이름이 일본 정보 보고서에 안 나온다. 중국에서 동제사 조직도 하고 여러 가지에 관여하지만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한국에 있는 언더우드나 교회나 자기가 은혜를 입은 쪽에 폐를 끼치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을 거라고 본다. 김규식이라고 하면 말이다. 이승만이면 그냥 멋대로 하고 유명해지려고 했을 텐데.
중국 망명하는데 왜 호주에 인삼 팔러 간다는 여권은 왜 만들었을까. 그것도 명분이 필요해서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 호주나 남양, 중국으로 홍삼, 고려 인삼 팔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좋은 핑계였던 것이다.
(③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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