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등으로 한국 현대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진면목과 핵심을 치열하게 연구해 온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를 출간하였다.
애초 기획은 8월에 나온 새 책에 관한 인터뷰였다. 하지만 진행하다 보니 조선왕조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의 한국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방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부터 각종 정치꾼, 협잡가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방대한 주제들을 다뤘다.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많다.
지금 시기 다시금 한 번쯤 기억되어야 할 인물, 김규식을 중심으로 정병준 교수와 나눈 다섯 시간의 대담을 몇 차례로 나누어 게재한다.
전통 한국인과는 '뭔가 다른 그 느낌'에서 시작한 10년 연구
박인규
인터뷰하려고 찾아보았다. 연구자로 글을 써 온 30년 동안 평전을 4권 출간했다, 10년 터울로. 1995년 몽양 여운형 평전, 2005년 우남 이승만 연구, 2015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그리고 2025년 김규식과 그의 시대. 첫 번째 책은 아마 30대 초반에 쓰신 것 같다.
정병준
정말 뭣도 모르고 썼다. (웃음)
박인규
그런데 이번 책은 세 권, 1800쪽이 넘는다. (웃음) 김규식 선생은 1881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돌아가셨는데, 이 책은 일단 1945년 해방 때까지만 쓰셨다.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와 함께 이른바 우익 3영수 중 한 명으로 3.1운동 때 가장 빛났고,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 1948년 남북협상이 유명한데, 오늘은 김규식과 그의 시대, 이 책에서 다룬 1945년까지만 여쭤보려고 한다.
뻔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첫 번째로 왜 김규식이라는 사람을 붙잡고 10년 이상 연구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다. 책에 따르면 처음 해방 직후사를 공부할 때부터, 구체적으로는 1990년대 김규식의 비서인 송남헌 선생을 인터뷰하면서부터 김규식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속된 말로 '꽂혔고' 2013년부터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정병준
김규식을 알게 된 건 해방 후 좌우합작과 여운형을 연구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김규식에 대해서 연구하고 써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가졌지만, 김규식은 사실 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중도 우파라고 하는 노선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미군정과 연계되어야만 설명 가능한 것인가, 도대체 이 노선의 연원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여운형은 그 스스로의 내러티브 구성이 가능한 사람이다. 반면 김규식은 우파의 임시정부 계통의 사람이긴 한데 임시정부 주류와는 해방까지 확실히 다른 노선이었다. 그러다가 1948년에는 또 김구와 같은 노선을 타기도 했다. 자료도 적고 분명치 않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방 후 표류하는 정국에서 이러한 면모를 가졌는지가 당시에는 제일 궁금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쓰고 난 다음에는 김규식 이야기를 한 번 연구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규식은 좌우합작 남북협상의 합리적인 중도파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엇보다도 한국적 정치인하고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 있었다. 이 다른 느낌, 조금 특이한 느낌, 뭔가 구별되는 느낌이 도대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컸다. 사실 김규식의 삶을 합리적이고 이상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당시 현실에서 양립 불가능했던 두 가지 가치다.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합리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상주의로 평가되는 실현되지 못한 노선이라는 말이니까. 성공과 실패가 분명하지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당시 기준으로 가장 많이 배우고, 세계도 잘 알고, 훌륭한 사람인데 왜 그런 삶의 길을 걸어갔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김규식 개인의 가족사와 성장기, 그리고 한국의 운명과 함께 결국 김규식의 정치적인 삶도 비감하게 끝났다는 측면이 있다. 나 스스로가 비극적인 스토리에 마음이 가는 편이다. 이런 성공하지 못한 실패, 노력은 열심히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삶에 대해서 조명을 하는 게 필요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정치적 추종자가 많지 않다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여운형 평전 쓸 때만 해도 '여운형맨'들이 많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추도식 같은 데 가면 이런저런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대구에 가면 특히 근로인민당 했던 분들이 많이 살아 계셨다. 그런데 김규식은 그런 사람이 전무하다. 그래서 '내가 이분 한 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인규
전통적인 한국의 정치인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국제감각일 수도 있고, 살아온 광경일 수도 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 가장 바람직한 행로로 좌우합작 또는 남북협상을 생각했는데 결국 잘 안 됐다. 그래서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김규식은 여운형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많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제목에도 있듯 김규식과 '그의 시대'라는 게 중요하다고 한 게 인상 깊었다. 김규식의 일생뿐만 아니라 개항에서 망국, 그리고 해방과 독립을 위한 한민족의 몸부림까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본다는 의미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개인의 평전이면서 동시에 한국 현대사, 또는 독립운동사로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 '요즘 세태가 민족주의를 반역과 퇴행의 담론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김규식의 시대는 국가와 민족이 유일한 의제이자 중심'이었고 '통일과 독립이 지상과제'였다는 표현도 있고, 서문 마지막에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해방 80주년 3월'이라고 했다. 당시 윤석열 탄핵 관련한 상황을 언급한 것인가?
정병준
우리가 만든 현대 한국의 시스템은 모든 한국인들이 정말 많은 피와 땀과 노력을 기울여서 만든 것이다. 87년 체제라고 하는 게 결국 권력 쟁취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 획득한다는 뜻이고, 수많은 피를 흘린 결과의 산물인데 친위 쿠데타라고 하는, 87년 레짐에서 도달한 최소한의 국민적 합의를 붕괴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명백하게 있었다. 그에 대한 구 정권 측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옹호를 보자. 이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한 것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다. 너무 엄청난 퇴행이고, 반동이라고 생각한다.
박인규
사실 박근혜 탄핵 때는 그래도 잘못했다는 자인이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는 태도다.
집필 마감 시기에 벌어진 '공화국에 대한 반역'
정병준
공화국의 반역자로 기억될 것이다. 평생 살면서 신문 칼럼 같은 걸 써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세 번이나 썼다. 이 사회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동의 합의,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약속한 바를 여지없이 부정하고 깨뜨리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건 사실 국가보안법으로 처단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국가보안법 생기고 북한의 간첩 등등이 한 걸 다 합쳐도 이번 범죄 행위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개인이 평생 검사로서 법적으로 처벌한 사람들의 죄의 무게나 형량을 다 합쳐도 저는 그가 행한 범죄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고 본다.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을 옹호하고 심지어 인권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고,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가와는 상관없이, 이건 공화국 체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한다.
공화국이나 법치 체제에 대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한 것도 문제지만 '윤 어게인' 하면서 공동체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위기감도 있다. 현실 인지 부조화의 상태로 지속되는 상태의 목소리가 사회 어딘가에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정치 지도자나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역시나 반역이다.
결국은 정리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동력이나 에너지와 노력이 사실은 이런 데 쓰일 게 아닌데, 소모되는 게 굉장히 안타깝다. 에너지 총량이 있는 것 아닌가.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어려운 것 아닌가?
박인규
그러니까 87년 민주화 이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고 여기에 대한 반성도 없는 이런 상황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인데 공감한다.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고, 아직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사실 국제부 기자를 오래 해서 그런지 어쨌든 '세계 속의 한국'의 시각으로 상황을 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1876년 우리가 이른바 서구 중심의 사회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걸 포함해 3번의 변곡점이 있다고 본다. 개항에 잘못 대응하다 보니까 식민지가 됐고, 1945년이라는 해방이라는 계기를 분단과 전쟁으로 끝냈고, 2001년 9.11 때부터 트럼프 시기인 최근의 사태를 보면 냉전 시대, 세계화 시대를 거쳐 이제 미국 중심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이 새로운 변곡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문의 문제의식이 중요한 것 같다. 민족 국가라는 것이 국제화와 세계화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고, 어쨌든 남한 단위에서 제대로 이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친위 쿠데타 같은 건 이 나라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책 이야기하기 전에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긴 하지만(웃음), 지금 한반도가 처한 상황은 어떠한가?
정병준
앞의 두 번의 변곡점에서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 또는 민족의 운명 결정권이 우리한테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 한국, 동북아시아, 세계의 제일 큰 위기는 예측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온다.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 안 하지만, 사실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두 체제는 서로 자기 체제에 대한 신념이나 확신이 분명히 있었다. 각자 '나는 통제력이 있고 내가 이 시스템으로 세계를 구원하겠다' 하는 복음주의적 사명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서는 복음주의적 사명이나 자기 체제에 대한 정당성 같은 게 없어졌다. 세계의 중심이 없어진 것 같다. 예전에는 우리가 '미국' 하면 생각할 수 있는 안정성이나 매력 같은 게 있었다. 그런 게 여지없이 붕괴되고 무너지는 상황이다. 다른 여러 나라를 포함해 한국도 마찬가지 같다. 예측 가능성이라고 하는 게 바꿔 얘기하면 안정성인데 지금은 세계 체제, 동북아시아, 한국에서 이것이 너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결국은 대충돌이나 상당한 파열이 눈에 보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상황이다. 세기말적인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박인규
어쨌든 우리가 12.3내란을 겪었고 지금 극복하는 중이기 때문에 좋게 보자면 또 뭔가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정병준
한국에서는 그렇지만 세계적 차원에서는 너무나 불확실성, 불안정성, 예측 불가능성이 커졌다. 세계정세와 한국 국내 정치가 밀접하게 결합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정말 예측하기가 힘들다. 불안정성은 결국 어떻게든 안정성을 찾으려는 지향으로 가게 되어 있고, 그게 충돌이나 파열로 이어진다. 역사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대충돌이 어딘가에서 분명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을 걱정하고 있다.
후진국 국민, 개발도상국 민중, 선진국 국민 정체성이 혼재하는 해방 80주년
박인규
따져보면 김규식이 태어나던 시기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아시아를 먹어 들어가던 시기였고, 당시 조선은 정말 힘이 없어서 미국, 러시아에 가서 살려달라고 하던 때였다. 적어도 15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한국의 상대적 지위가 상당히 올라갔고, 한국이 하기에 따라서 동아시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정병준
한국의 역량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다른 책에 쓴 내용인데, '후진국의 국민으로 태어나서 개발도상국의 민중으로 독재와 싸우고 경제적 성취를 위해서 노력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선진국의 시민들과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같이 사는 여러 세대가 누구는 후진국 국민, 누구는 개발도상국 민중, 누구는 선진국의 시민이라는 생각을 한다. 돌이켜보면 30~40년 사이에 한국이 크게 변해서 다른 나라가 됐다. 예고가 없었고 누구도 기획하거나 예측하지 못했지만, 그런 순간이 온 것이다.
이러한 성공이나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사실은 걱정되고 우려되는 바가 있다. 1970년대까지 북한이 한국을 바라보던 시각이, 지금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하고 똑같다. 여하튼 한국이 다른 국가와는 또 다른 성취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한다.
박인규
위험과 기회는 병렬한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 '김규식의 시대에는 통일과 독립이 지상과제'였다고 했는데, 지금 그걸 요즘 시대에 옮긴다면 '지금 시대에는 자주와 평화가 지상과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병준
자주는 참 어렵다. 평화는 현재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다.
조선에 사진을 도입하고, 대러 밀사로 파견됐다 고종에게 버림 받은 아버지 김용원
박인규
지금부터는 책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권은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이다. 김규식이 태어난 1881년부터 3.1운동 이전 1918년까지다. 일반적인 평전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김규식의 경우에는 정말 파란만장해서 그런지 다르게 느껴졌다. 김규식의 아버지, 김용원(1842-1892년)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도 새롭고 흥미로웠다.
중인 출신으로 열다섯살 때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철종 어진 작업 등에 참여했고, 개항 후에는 두 차례나 일본에 파견돼(1876년 수신사, 1881-83년 조사시찰단)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1879년 동래 수군 우후(정4품)로 임명됐으나 1885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러시아와의 수교를 위한 밀사 활동을 하다가 청, 일 등에 발각돼 6년간(1885-1891) 유배 생활을 한 후 1892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김용원이 잘 나가던 1881년 동래에서 태어났던 김규식은 1885년 아버지가 유배된 이후 친척들에게도 버림받고 졸지에 고아 신세가 돼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고아원 학교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영어도 배우게 된다.
정병준
김규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장 먼저 쓴 게 김규식의 부친, 김용원 이야기였다. 2014년도에 썼는데 가지고 있는 정보로 밀도 있게 글을 하나 써보니, 이렇게 블록을 쌓듯이 김규식의 일생을 조립한다면 얼마 만큼일까, 이런 것들이 그려졌다. 사실 처음에는 한숨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다 쓰나 싶어서. 그래서 10년이 걸렸다. 자료가 있는 건 정리하고, 없는 건 직접 발굴해서 정리할 수 있는 부분들부터 일단 써서 블록을 맞춰놓고 그다음에 비어 있는 모자이크를 채우는 식으로 쓰다 보니 10년이 걸렸다.
박인규
김용원, 이름을 바꿔서 김지성이 된 인물인데, 이것도 처음으로 밝힌 내용인가? 이 책에서 처음 밝혀진 내용이 많은 것 같다.
정병준
김용원의 이름이 바뀐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웃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부터 추적했다. 찾아보니 한국에서 사진을 연구하는 분들이 김용원을 연구했다. 최인진 선생님이 당시 일본 신문을 가지고 먼저 연구를 했고, 이광린 선생님도 쓴 게 있다. 그걸 보고 하버드에서 한국 족보 연구로 유명한 에드워드 와그너 선생의 제자인 유진 박 선생을 만났더니, 이 집안의 내력에 대해서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거다.
그 다음부터 제대로 추적해서 썼다. 이 집안은 중인 집안이었다. 그런데 형제가 다 벼슬을 했다. 관직이 있으니까 이름을 바꾼 것도 사실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고 이름을 바꿨다.
김용원은 도화서 화원,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조선통신사가 오갈 때 의궤나 행렬도를 그려야 되니까 화원이 따라간다. 그래서 일본에 수신사로 가게 되는데(1876), 거기서 '사진'을 처음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림은 더 이상 안 그리고 사진을 연구하게 된다. 당시에 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게 유리 평판, 그다음 감광제感光劑로 쓰는 은, 그리고 화학 기술이었다. 이런 게 필요하다니까 그걸 눈여겨보고 알아보고 돌아온다. 그러고 나니 고종이 그냥 도화서 화원이 아니라 일본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동래 왜관에 가서 일본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보고하라고 수군 우후를 시킨다. 원래 도화서 화원은 승품이 제한되어 있었다. 최고 실직이 현감이다. 현감이 끝나면 다시 밑바닥부터 취재를 시작하는 거였다. 이런 걸 보면 조선 시대가 좀 못됐다. (웃음)
이 사람이 동래에 있을 때 김규식이 태어났다. 어쨌든 그다음에 신사유람단이라는 조사시찰단에 11명을 보내는데 그중 개화승 이동인이 갑자기 사라진다. 그래서 그 자리에 김용원이 가게 된다(1881). 그래서 갔는데 김용원만 출신을 이유로 마패를 안 줬다. 신사유람단의 기록을 남겼는데 자기들 10명만 기록을 남기고, 김용원 이름을 빼버렸다.
박인규
반상 차별이 지금 우리나라 검찰이 하는 짓하고 비슷하네요.
정병준
이름 뺀 이야기는 책에는 없다. (웃음) 여하튼 그래서 일본에서 유학하고 은광銀鑛에 가서 일도 하고 화학술도 배우고 몇 년을 보낸다. 그 다음에 돌아오니 고종이 러시아에 밀사로 보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총독을 만나고 조러밀약이라고 하는 걸 체결해서(1885) 함대를 보내고 군대를 파견하고 통상 무역하는 걸 체결하고 왔다. 그랬더니 당시에 조선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청과 일본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고종을 강하게 압박해 김용원은 유배를 가게 된다. 양계초가 한 말인데, 자기 신하를 바둑돌 버리듯이 썼던 것이다.
정치범의 아들 김규식, 미국 선교사 고아원에서 살아나다
박인규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랬다는 거죠?
정병준
지엄한 외교의 일을 민간에서 마음대로 처리했다고 유배를 보낸 거다. 김용원은 그렇게 유배를 갔다가 해배도 늦게 되고, 돌아왔지만 곧 폐결핵으로 죽게 된다. 그사이에 어린 김규식을 아무도 안 돌봐서 다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 고아원에 맡겨진다.
처음에는 김규식이 굉장히 근대적이고 친미적이고 국제적이고 모던하다, 서양으로 경도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김규식 인생의 결정적인 대목은 근왕주의적인 고종과 관련된 부친으로부터 비롯했다. 본인도 의친왕과 관련돼서 미국에 가게 되고, 나중에 포츠머스강화조약 때도 그렇고. 역시 전통적인 근왕주의에서 비롯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출발점이 김규식 인생에 아버지 때부터 드리웠다는 생각을 한다.
박인규
1876년도에 개항했는데 불과 7년 후에 러시아 이야기가 나온 거라면, 외교를 통한 독립을 그때부터 시도한 것인가?
정병준
사실 고종이 가장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세력 균형이나 중립이었다. 조선이 힘이 없으니까 각국으로부터 일종의 안전 보장, 세력 균형을 이뤄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경흥부사였던 고종 측근 한규직이 '러시아는 대국이고 그 사람들하고 관계를 맺으면 당시 청이나 일본의 군사적이고 폭력적인 압력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용원이 가게 된 거다. 그런데 청나라와 일본에 밀약을 들키고 고종은 모른 척하니, 김용원 입장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거다. 조러 밀약 관련해서 통역했던 사람들 등은 뭔가 발설을 하면서 살려달라고 하는데 김용원은 그러지도 않는다.
박인규
근왕주의적 개화파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밀사 활동을 펼친 아버지의 활동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김규식 본인은 사실상 고아가 됐다, 이런 집안 내력이 김규식 일생의 출발 배경이 됐다. 김규식은 범죄자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그때 겨우 4살이었다.
정병준
결국은 정치범의 아들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삼촌도 안 돌봐주고 하니 언더우드 고아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고아원에서 김규식을 보니까 똘똘하고 영어도 잘하더란다. 이게 김규식과 언더우드 관계의 출발점이다. 언더우드는 김규식 생명의 은인이고 교육의 은인이지만, 그 때문에 김규식은 언더우드 손바닥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규식은 1913년 처자식을 버린 채 단신으로 중국 망명을 결행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나아가게 된다.
(②편에서 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