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아마 대부분은 "처음 듣는데?" 할 테지만, <캣츠>라는 뮤지컬은 알 것이다. 바로 그 고양이들의 정신적 아버지가 이 양반이다.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이 사내가 어쩌다 영국 문학의 거목이 되어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고, 심지어 노벨문학상(1948년)까지 거머쥐게 됐는지, 그 기묘한 여정을 함께 들여다보자.
조국을 버리고 영국 신사가 되다
엘리엇은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런데 1914년 유학차 런던에 갔다가 그만 영국에 "홀딱" 반해버렸다. 1927년에는 아예 영국시민권을 취득하고 미국 국적을 버렸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인이 미국 가서 "역시 미국이 최고야!"를 외치며 귀화하는 격인데, 당시 미국인들 입장에선 배신감이 꽤 컸을 것이다.
더 가관인 건, 이 양반이 영국 성공회 신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영국 성공회 고교회파"라고 선언했다는 점이다. 미국 출신이 영국 왕실을 떠받들며 보수주의의 화신이 된 셈이다. 이쯤 되면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다운" 코스프레가 아니라 진심이었던 것 같다.
<황무지>로 세상을 충격에 빠뜨리다
1922년, 엘리엇은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를 발표했다. 434행짜리 이 괴작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폐허가 된 유럽의 정신적 공황을 그려낸 작품이다. 문제는 이 시가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산스크리트어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까지 온갖 언어를 섞어놓고, 신화와 종교와 역사를 뒤죽박죽 버무려놓았으니 말이다.
당시 문학계는 난리가 났다. "이게 시야, 암호문이야?" 하는 반응부터 "천재다!" 하는 찬사까지. 하지만 이 난해한 작품이 20세기 영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전쟁으로 모든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의 허무와 불안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평가로서 문학계를 재편하다
엘리엇의 영향력은 시인으로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출판사 페이버 앤 페이버(Faber and Faber)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작가들을 발굴했고, 비평가로서 영문학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의 평론 <전통과 개인의 재능>(1919년)은 문학 창작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그는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 존 던(John Donne, 1572-1631)이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같은 시인들을 재평가하면서 영문학사를 다시 썼다. 당시까지 별 볼 일 없다고 여겨지던 이들을 "이게 진짜 시다!"라며 끌어올린 것이다. 엘리엇의 입김 하나로 문학사의 서열이 재편되는 진풍경이 벌어진 셈이다.
고양이 시로 대중문화 아이콘이 되다
평생 난해한 시와 무거운 철학을 다루던 엘리엇이 1939년 <고양이에 관한 노인의 실용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라는 동요집을 냈다. 손자손녀들을 위해 쓴 이 귀여운 시집이 훗날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 1948-)의 손을 거쳐 뮤지컬 <캣츠>(1981년 초연)로 재탄생한다.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이 관람한 이 작품 덕분에, 난해한 모더니즘 시인 엘리엇은 "고양이 아저씨"로 대중의 기억에 남게 된다. 본인이 살아 있었다면 어이없어하면서도 은근히 뿌듯해했을 것 같다.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 보수주의의 문화적 보루
엘리엇의 영국 사회 기여(?)는 다양하다. 우선 그는 1922년 문예지 <크라이테리언>(The Criterion)을 창간해 17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며 유럽 지식인 사회의 허브 역할을 했다. 이 잡지를 통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 W. H. 오든(W. H. Auden, 1907-1973)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소개됐다.
하지만 엘리엇의 정치·사회적 입장은 논란거리다. 그는 자유주의와 세속주의를 비판하며 기독교 중심의 보수적 사회질서를 옹호했다. 1930년대에는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전체주의에는 반대했지만, 그의 엘리트주의와 보수주의는 당시나 지금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보수주의자가 문학적으로는 가장 급진적인 실험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전통을 찬양하면서도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 모더니즘의 선봉에 섰으니 말이다. 마치 한복을 입고 힙합을 추는 격이랄까.
이방인이 된 제국의 마지막 시인
엘리엇은 미국인으로 태어나 영국인이 됐고, 모더니스트이면서 보수주의자였으며, 난해한 시인이면서 대중 뮤지컬의 원작자였다. 이 모순덩어리 같은 인물이 20세기 영미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그가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영문학의 언어와 형식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둘째, 비평을 통해 영문학사를 재구성하고 후대 작가들에게 지침을 제공했다. 셋째, 기독교 보수주의의 지적 토대를 마련해 전후 영국 보수파에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의 정치적 입장과 일부 발언은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문제가 많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버리고 영국으로 건너간 이방인이 영국 문학의 마지막 거장이 됐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제국의 황혼을 상징하는 우화가 아닐까.
오늘날 누군가 <캣츠>를 보며 즐거워한다면, 그들은 알게 모르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의 작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 탈을 쓴 엘리엇이 무덤 속에서 씩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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