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8시, 환승 통로를 가르는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귀가 먼저 반응한다. 짧고 또렷한 8초가 지나가면 출근길의 시민들은 자연스레 흐름을 탄다.
공연장이 아닌 일상에서, 도시가 시민에게 건네는 아침인사는 음악이다.
기차 플랫폼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이어진다. 열차 출발 직전, 가야금의 맑은 선율이 좌석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는 이들의 호흡을 한 번 정돈한다.
누구는 “이 음악 어디서 들어봤지?”하고 누군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순간의 장면은 금세 지나가도 리듬과 멜로디는 뇌리에 남는다.
오늘은 환승의 8초와 KTX의 3분, 그 짧은 시간에 만나는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국악 : 환승과 출발의 풍경
서울 지하철 1~8호선의 환승 멜로디는 2023년부터 경기민요 「풍년가」를 모티프로 한 <풍년>으로 바뀌었다.
국립국악원이 ‘생활음악 시리즈 19집’으로 선보였던 곡을 리마스터링해 적용했고 서울교통공사가 시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최종 선정했다.
경토리 선율을 살리되 4박 구조로 간결하게 다듬어 혼잡한 환승 동선에서도 과하지 않게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이 장점이다.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8초간 들리는 멜로디가 반복될수록 “서울=국악의 도시 사운드”라는 인상이 차곡차곡 쌓인다.
부산도 도시철도 안내, 환승음에 퓨전 국악을 도입해 전체 노선의 청각 아이덴티티들 다듬어 왔다.
그리고 올해, 부산교통공사와 국립부산국악원이 ‘도시철도 환승역 배경음악 제작’을 포함한 문화협력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새 환승음악을 공동 제작해 연내 전 호선 적용을 목표로 하고 역사 내 국악 공연 및 전시와 홍보 콘텐츠까지 묶어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환승음'을 행정의 기술적 자산이 아니라 브랜드 자산으로 관리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광주 도시철도는 지역 민요 「돈돌날이」를 편곡해 출발·안내음으로 사용해왔다.
어디선가 익히 들은 듯한 친숙함이 안내 기능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인상을 만든다.
실제로 광주교통공사가 배포한 방송음원 항목에는 ‘돈돌날이’가 명시돼 있다.
대전은 종착 신호에 황병기「춘설」을, 출발 신호에 가야금 편곡 「터키 행진곡」을 들려준다. 과학도시의 날렵한 이미지에 서정적인 순간을 더하는 선택이다.
대전도시철도 이용 안내와 시민 기록에는 이러한 음악 정보가 꾸준히 공유되고 종착 음악을 직접 채보·업로드한 자료도 확인할 수 있다.
고속철도 KTX도 예외가 아니다. 플랫폼 대기 시간에 흐르는 대표 선율은 가야금이 주인공인 「몽금포타령」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철도공사 공식 계정은 이 곡을 실연한 ‘감성밴드 나봄’을 소개해 음악을 전면에 세우기도 했다.
일부 구간이나 상황에서는「Kiss the Rain」 등 대중에게 익숙한 레퍼토리를 가야금으로 편곡한 음악을 사용해 국가 교통 브랜드의 첫인상을 시각 로고가 아닌 악기와 음악으로 각인하게 한다.

도시는 왜 국악을 택할까? : 차별화, 친숙함, 공공성
도시가 공공재에 사용하는 음악을 국악으로 택하는 이유는 ‘구분되는 소리’가 필요하다는 배경이 깔려있다.
같은 8초라도 해금, 대금, 장구가 만들어내는 음색과 세마지, 자진모리와 같은 장단의 결은 서양 음악이나 대중 음악과는 다른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환승, 출발, 종착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되는 접점에서 같은 모티프가 재등장하면 시만의 뇌리와 기억에는 자연스럽게 도시의 ‘사운드 로고’가 쌓인다.
눈으로 보는 로고가 표지판을 책임진다면 국악 기반의 짧은 음악들은 공간의 분위기와 그곳의 정서를 함께 들려준다.
서울의 <풍년>이 익숙한 경토리 선율을 4박 구조로 간결하게 다듬어 혼잡한 통로에서도 또렷이 들리게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둘째, 친숙함이 주는 효율이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풍년가」나「돈돌날이」 같은 선율 한 구절이면 사람들의 몸이 먼저 반응한다.
복잡한 안내 문장을 읽지 않아도 ‘여기가 환승역이구나’하며 이동 동선이 부드럽게 풀리고 고령층이나 어린이, 관광객에게도 인식을 쉽게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익숙한 멜로디를 현대적인 템포와 편성으로 다듬어 계절, 행사에 맞춰 변주하면 일상의 소리가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한 혼란도 줄일 수 있다.
환승의 8초와 플랫폼의 3분이 ‘정보’뿐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것은 덤이다.
마지막으로 공공성의 설계가 중요하다. 공공기관이 국악 전문기관고 손을 잡고 음원을 함께 만들고 관리하면 품질과 저작권, 보관 및 배포 체계가 동시에 안정된다.
부산교통공사와 국립부산국악원이 올해 환승음악 공동 제작을 포함한 문화협력사업을 맺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 음원을 역사 내 공연 및 전시, 교육 콘텐츠와 연계하면, 환승음악 하나로 지역 연주자, 작곡가, 학생, 시민을 연결하는 창작 생태계로 확장할 수도 있다.
행정이 소리를 단순히 효과음이 아니라 도시의 문화 인프라로 대우하기 시작할 때 시민들의 하루 또한 조금 더 선명해지고 그 도시의 얼굴은 눈뿐 아니라 귀로도 알 수 있게 된다.
도시의 내일을 여는 소리 : 사운드 로고와 지역의 ‘소리지도’
이제 필요한 건 에쁜 배경음이 아니라 들리는 순간 도시가 떠오르는 짧은 테마다.
짤막한 사운드 로고가 환승과 출발, 도서관과 시청사의 안내음으로 자연스럽게 반복되면 시민들의 귀는 금방 학습한다.
계절과 축제에 맞춰 같은 모티프를 살짝 바꾸는 방식도 좋다. 봄이면 장구의 장단이 조금 더 화려해지며 피어나는 계절을 형상화하고 여름이면 대금의 시원한 청소리를 더 강조하는 식이다.
장소의 특징을 살리는 미니 테마도 상상할 수 있다.
과학관에는 별의 반짝임을 닮은 트레몰로, 미술관엔 해금의 가느다란 선율, 도서관엔 책장 넘기는 소리와 가야금의 아르페지오.
중요한 건 이 모든 소리가 도시의 일과 멜로디를 부담없이 묶어준다는 점이다.
안내문을 길게 읽지 않아도 같은 테마가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스스로 흐름을 찾아 움직인다.
필자가 살고 있는 대전이라면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연정국악원을 중심으로 지역 연주자와 학생, 작곡가가 팀을 꾸려 도시 사운드 로고를 만든다.
도시철도와 버스터미널, 과학공원과 시립미술관 같은 ‘반복 청취 지점’에 그 테마를 배치하고 QR 하나로 지금 들은 음원과 연결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저작권과 크레듯인 당연히 공동 창작물로 남긴다.
부산이 국립국악원과 교통공사가 손을 맞잡아 환승음악을 부산에 맞게 새로 만드는 것처럼 행정과 현장이 함께 설게하면 실행은 생각보다 단순해진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도시의 하루는 지도 대신 귀로 여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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