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알도 역사의식도 없다? 대체 대만인들은 왜 일본을 미워하지 않나

[이웃 나라 타이완] 반일 감정이 없는 나라, 대만

대만 사람들은 일본을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긴커녕 일본을 가장 좋아하고 신뢰한다. 일본과 이미 가장 친한데도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대만에 살면 너무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면 이런 통계가 있다.

일본 '대만교류협회'라는 기관이 있다. 외교관계가 없는 두 나라 사이에서 주대만 일본대사관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이들은 2008년부터 정기적으로 대만인들이 선호하는 국가를 조사해 발표해왔다. 해마다 1위를 차지하는 일본에 대한 선호도는 2위 국가와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

▲ 대만의 총통 관저. 1919년에 지어진 일본의 대만총독부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2022년 기준 1위 일본 60%, 2, 3위인 중국과 미국이 각각 5%, 4%였다. 2025년 올해는 일본 선호도가 76%로 최고치를 찍었다. 한국이 2위로 올라섰지만 4%에 불과하고, 3, 4위인 중국, 미국이 모두 3%였다. 일본 기관이 주관한 설문조사라고 무시할 수준의 차이가 아니다.

대만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중국보다 일본 느낌이 난다고 말하곤 한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건물들은 낡았지만, 거리는 깨끗하고 단정하다. 중국어 특유의 성조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질서를 잘 지킨다. 사람들은 모두 라인 메신저를 사용하고 라인페이도 많이 쓴다. 토요타 등 일본 자동차가 거리에 즐비할 뿐 아니라, 편의점, 백화점, 택배, 약국 등도 일본 브랜드가 활약하고 있다.

남녀노소를 떠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영어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외국어는 언제나 일본어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일본을 여러 번 다녀온 경우가 많다. 동일본 대지진처럼 일본에 큰 재해가 생기면 대만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성금을 모은다. 반대로 대만에 지진이나 태풍 피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일본이 지원한다. 이런 게 큰 뉴스가 되고 대만 사람들은 이를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일본에 대한 대만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특히 한국에게 너무나 이상해 보인다. 한마디로 '우리처럼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나라가 왜?'라는 궁금증이다. 우리처럼 오래 고생을 안 한 걸까? 오히려 우리보다 15년이 더 긴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강제징용 같은 피해가 없었나? 아니다. 중일전쟁 당시 대만인 약 21만 명이 징집되어 중국군과 싸웠고, 일본군 '위안부'로 전락한 대만 여성의 숫자도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대만인들은 일본을 미워하지 않을까? 한국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든다. 조상들이 일제 치하에 받은 핍박과 설움을 잊은 것인가? 대만 사람들은 배알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는가?

한국인에게 뿌리 깊은 '반일감정' 그리고 대만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친일감정'은 말 그대로 '감정'이다.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한국인과 대만인이 만나서 일본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다 보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왜 저렇게 일본을 미워하는지, 어떻게 일본을 좋아할 수 있는지 도저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은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배경에 대한 추론은 가능하다. 대표적인 설명은 제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이 첫 번째 식민지 대만 경영에 공을 들였다는 설이다.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대만섬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했다.

한창 서구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국력을 쏟던 일본은 '우리도 식민지 경영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했던 말을 보면 그러한 의지가 느껴진다. “만일 우리가 대만 경영에 실패한다면 일장기도 빛을 잃을 것이다.”

청일전쟁을 통해 얻은 막대한 배상금을 일본은 대만 식민지에 투자했다. 마침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 할양을 포기하는 대신 보상금을 더 높여 받았다. 이 보상금이 철도, 항만, 도로, 치안, 통신, 교육 시설 등 근대적인 사회 인프라 구축을 위해 작은 대만섬에 쏟아졌다.

▲ 대만대학교 교사관(敎史館). 1935년 타이베이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의 총도서관 건물로 지어졌다. 서울대학교가 해방 후인 1946년을 개교로 기념하는 것과 달리, 국립대만대학교는 1928년 타이베이제국대학 개교를 기념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또 다른 가설 역시 경제적인 관점에서 대만과 한국의 식민경험 차이를 설명한다. 당시 식민 조선은 대만에 비해 영토는 여섯 배, 인구는 네 배 정도였다. 대만은 식민지로서 작고 효율적이었다. 저항도 적었다. 대만총독부는 담배, 아편, 장뇌(樟腦)* 등의 전매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렸고, 설탕산업 등 세금수입원도 충분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대만총독부는 이미 재정자립을 이뤘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인구 일인당 세출과 비교했을 때 대만총독부의 일인당 세출이 열 배가 넘었다고 한다. 즉, 식민지 대만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았다.

*장뇌(樟腦): 녹나무를 증류하여 얻는, 특유한 향기가 있는 화합물. 필름의 제조에 쓰이거나 방부제, 구충제, 강심제 따위를 만드는 데 쓰인다. 플라스틱이 개발되기 전까지 고소득 상품이었다.

일본제국의 쇼케이스였기 때문이든 규모가 작고 재정에 여유가 있어서든, 일제 입장에서 대만의 식민지 경영이 더 성공적이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일본 지배 전 청나라 시절보다도 일본 식민지 시대가 더 살기 좋았다는 게 대만인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대만과 한국인의 전혀 다른 감정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한국인 중에 '일제 강점기에 먹고 살기가 더 좋았으면 일본을 증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결정적인 차이는 양 국민의 정체성 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만은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다. 요컨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식민 통치는 수천 년 이어온 '나라를 빼앗긴 것'이었던 반면, 대만인들에게는 기존 청나라가 쫓겨나고 '다른 지배 세력이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대만은 신대륙에 건설된 영국 식민지가 영국 대신 프랑스 지배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프랑스 지배를 받을 때 더 살기가 좋았다. 조선의 경우는 국력이 쇠퇴한 영국 본토가 프랑스 지배를 받은 셈이다. 그 감정이 결코 같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조선의 저항은 대만의 저항과 차원이 달랐다. 조선은 몽골 간섭기를 거치고 사대(事大)와 조공(朝貢)을 했을지언정 최소 천 년 이상 같은 나라로 존재했다. 그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나라를 빼앗긴 수치심도 컸다. 그만큼 더 끈질기게 저항했다. 한국인에게 반일은 거대한 민족감정이다.

대만의 역사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400년 남짓이다. 서로 다른 시기, 중국 본토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대만 원주민들과 섞여 살았다. 우리처럼 민족국가 개념으로 바라보고 민족감정을 요구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요컨대 대만인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적이 없다. 청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 2백년 넘게 지배하던 섬을 빼앗겼던 것뿐이다. 대만에서도 일본에 의해 고통받은 개인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대만인의 감정은 민족감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연민이다. 게다가 그런 아픔은 청나라 통치기에도 국민당 정부하에서도 존재했다.

대다수 주민들이 중국 본토에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인의 정체성은 중국인과 전혀 다르다. 미국인들의 정체성이 유럽인들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에 대한 이런 관점은 대만에 대한 가장 큰 미스터리이며, 현재 대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누구에게도 감정을 강요할 순 없다. 세상에는 반일 감정으로 가득한 한국도, 반일 감정이 없는 대만도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 쑹산 문화창의공원(松山文創園區)의 중앙정원. 화산1914가 일제 강점기 지어진 맥주공장 건물인 것처럼, 쑹산 문화창의공원은 일제 강점기 지어진 담배공장 건물이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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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글쓰는 일을 하며 대전, 무주, 광양, 제주 등 전국을 떠돌았다. 제주도에서 바람도서관이라는 이름의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6년 첫 타이완 여행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2024년부터 타이완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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