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투쟁을 겪은 한국, 이스라엘 학살 저지에 함께 해야

[장석준 칼럼] 보편성의 자리에 서서 '가자'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자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과 봉쇄가 끝날 줄 모른다. 이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하려는 집단행동도 분출한다. 대학가 등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가 더 빈번히 개최될 뿐만 아니라(지금 미국에서는 이것만으로도 혹독한 탄압을 받을 빌미가 된다), 유럽 여러 나라 항만 노동자들이 이스라엘로 무기를 수송하는 선박의 출항을 막는 행동을 벌이고 있다. 급기야는 그간 팔레스타인인들을 테러리스트 취급하던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등이 부랴부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나섰다.

이런 와중에 9월 23일 미국 뉴욕에서는 유엔 제80차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콜롬비아의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슬로베니아의 나타사 피르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준엄히 비판하면서 국제사회의 긴급하고 효과적인 개입을 호소했다. 반면에 9월 한 달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을 맡은 대한민국의 이재명 대통령은 연설에서 가자 학살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유엔 193개 회원국 중 4분의 3(9월 현재, 158개 국)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데도 여전히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의 태도에 '어울리는' 연설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게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한 험난한 상황에 과연 '어울리는' 처신일까? 관세협상, 북핵문제 등만 해도 제 코가 석자이니 괜히 이스라엘이나 미국 정부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이나 행동은 삼가는 게 한국 정부에게 최선의 방도일까? 물론 현재 가자 상황은 인류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그 자체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주제다. 하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 정부의 근시안적 태도, 그리고 이에 따라 작금의 전 지구적 혼란을 헤쳐 나갈 한국 사회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비겁함과 어리석음에 관해 짚고 싶다.

▲2025년 8월 21일, 가자시에서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로이터

미국이라는 정박지를 떠나 항해에 나서야 할 대한민국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이재명 정부가 맞이한 가장 커다란 시련이 미국 트럼프 정부와 벌이는 관세협상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요구는 점입가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한국의 대미투자액으로 이야기가 오간 3500억 달러(490조 원)를 현금으로 선지급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거의 한국 외환보유고 전체(올해 7월 현재, 4113억 달러)에 육박하는 금액을 그야말로 미국에 즉각 바치라는 이야기다. 자본주의 역사상 아무리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우방국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한 적이 있나 싶은 상식 밖 행태다.

이쯤 되면 트럼프 정부에 도대체 장기 비전이라 할 만한 게 있는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가 그만한 비전도 없이 관세협상으로 기존 질서를 이토록 뒤집어 놓을 리는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많은 전문가는 지난 몇 개월간 트럼프 정부의 행보를 합리적으로 설명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시지포스의 노동임이 드러나고 있다. 보호무역과 투자 유치를 통해 정말로 미국 제조업을 부흥시키는 게 목표라면, 이런 식으로 '깽판'을 칠 수는 없는 법이다. 트럼프 대통령 요구대로 단번에 현금 3500억 달러를 챙겨갈 경우, 이것은 미국 사회를 '구호'하는 한국판 '마셜플랜'이 될지언정 애초에 이야기가 오가던 제조업 투자일 수는 없다.

아무리 추리해 봐도 트럼프 대통령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다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내년 11월에 있을 중간선거 때까지 반드시 업적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상원, 하원 모두 공화당이 지배하는 덕분에 거칠 것이 없지만, 중간선거에서 이 균형이 무너진다면 대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파시즘적 국내 정책을 완강하게 밀어붙이는 만큼, 중간선거 '패배'를 계기로 닥칠 역풍 또한 미국 정치사에서 유례없는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트럼프 진영으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간선거에서 여대야소 구도를 지켜내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왜 트럼프 정부가 미국 내 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온갖 표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제조업 투자 유치나 생산 설비 구축과는 상관없는 행보를 보이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트럼프 정부에게는 단지 중간선거 때까지 미국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실적'이 필요할 따름이다.

이제 막 뼈대를 짓고 있는 미완의 공장이나 아직 눈에 띌 만큼 많은 인력을 고용하지 못한 채 가동을 준비 중인 설비 따위는 그런 '실적'이 될 수 없다. 성미 급하고 방향 모를 분노에 들떠 있으며 제조업이 무엇인지 망각한 지 이미 한, 두 세대 지난 트럼프 지지 성향 미국인들에게는 확실히 그렇다. 이들에게 '실적'이라고 자신 있게 내밀만한 것은 밉살스런 무역수지 흑자국에 매겨진, 충분히 '가혹'해 보이는 관세율이나 미국 바깥 어딘가에서 노획해온 현금 더미다.

여기까지 추리하다 보면, 트럼프 대통령 머릿속을 지배하는 또 다른 생각이 무엇일지도 가늠해볼 수 있다. 즉각적인 '실적'을 만들어내고자 혈안이 된 패권국의 폭압적 지도자가 지금 세계 지도를 펼친다면, 가장 눈길을 둘만한 곳이 어디이겠는가?

중동? 거기에는 골치 아프고 답도 없는 현안들만 있을 뿐이다. 토니 블레어한테나 맡기는 게 좋겠다. 유럽? '취임 후 24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공언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앞으로 24개월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판이다. 게다가 실속은 없으면서 능구렁이 같기만 한 유럽 국가들을 뜯어먹는 것은 수고롭기만 하다. 주요국 지도자들이 다 이탈리아의 극우파 조르자 멜로니 총리 같은 고분고분한 인물로 교체될 때까지 일단 놔두는 쪽이 낫겠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남는 곳은 중국과 대치한(미국이 보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이다. 일본, 한국, 대만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만만치 않은 나라인 일본조차 미국에 대해서는 늘 저자세였다. 이번 관세협상에서도 일본은 스스로 나서서 불리한 협상안을 넙죽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 나라 모두 미국이 중국에 맞서 펼쳐놓은 핵우산과 미군 기지에 과거보다 더 비싼 '보호비'를 납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게다가 이 나라들 가운데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특별히 써먹을 카드가 하나 더 있다. 6년 전에 한 번 낭패를 봤던 북미협상 카드가 그것이다. 중동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휴전 성사보다 더 수월하게 북미협상을 진전시킨다면, 트럼프 대통령 자신에게 훌륭한 '실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노고'의 명목으로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챙겨갈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북미협상을 추진하려는 '선의'의 트럼프가 따로 있고, 3500억 달러를 날로 뜯어가려는 '악당' 트럼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단 한 사람의 폭군이 있을 따름이다.

이런 그물에 지금 한국 사회가 걸려 있다. 이재명 정부는 말도 안 되는 관세협상을 놓고 당장 다음 대답을 어떻게 내놓을지 고뇌에 빠져 있다. 그런데도 정부 내 상당 부분도 그렇고 심지어는 미국 정부의 횡포에 맞서 다시 반미투쟁에 나서자고 촉구하는 이들까지도 트럼프 대통령이 시도할 두 번째 북미협상 가능성에 잔뜩 기대를 건다. 관세협상은 북미협상과는 별개이고 트럼프 정부의 세계정책도 알 바 아니며, 한반도에 평화의 기회를 열기만 하면 된다는 투다. 세상에 이런 '공상'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온 세상이 불바다인데 이곳에만 '평화의 기회'가 열린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런 '공상'에 스스로를 마취시키며 미국이라는 '불타는' 정박지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적어도 내년 말 미국 중간선거 결과가 나올 때까지라도 이 정박지 밖의 먼 바다로 나아가 전에 미처 시도하지 못했던 외교정책을 펼치며 우방국들과 함께 생존을 도모하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중견국'이라고 자처만 할 게 아니라 최소한 유럽 국가들이 하는 만큼은 '중견국'다운 행보를 보임으로써, 트럼프 정부와 함께 공멸하는 최악의 운명을 피하고 봐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며 미소짓고 있다. ⓒ연합뉴스

보편성의 자리에 서서 '가자'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자

이런 역사적 상황에 처한 한국 사회에게 '가자'는 결코 피해가면 좋을 머나먼 낯선 땅의 문제일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 석상에서 민족해방투쟁과 광주항쟁을 경험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점을 밝히면서 가자 봉쇄 해제와 학살 중단을 촉구했어야 했다. 그리고 더 늦지 않게, 한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가자 문제 자체만 두고 보더라도 유엔 회원국인 대한민국이 마땅히 취해야 할 최소한의 태도이자 조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운명을 개척하는 차원에서도 역시 중대한 출발점이다. 지구자본주의의 패권국이 이제껏 뒤집어쓰고 있던, 보편적 이상과 규범의 가면을 훌훌 벗어버릴 때에 한국 같은 나라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많은 나라들의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내며 활로를 열어나갈 가장 중요한 수단은 무엇인가? 내동댕이쳐진 그 '보편성'의 자리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그럴만한 역사적 자원이 이미 풍부하게 존재한다. 소니 픽처스가 한국 문화를 소재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주기만 기다릴 필요가 없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36년의 역사는 결코 약소국의 구질구질한 기억만이 아니다. 지기만 하는 것 같았던 이 외로운 투쟁은 제국주의 국가들까지 끼어 있던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정상회담에서 유독 한국의 독립을 명기하는 합의를 이끌어낼 만큼 '보편적'이었다. 45년 전 봉쇄됐던 저 도시, 광주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한강 작가의 소설을 통해 전해진 광주 이야기에서 세계인이 본 것은 변방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절규가 아니라 폭력과 절망을 넘어 전진하는 인류의 '보편적' 형상이었다.

이 보편성의 자리에서 이제 한국 사회는 그간 비겁하게 미뤄왔던 결정을 뒤늦게나마 과감히 내려야 한다. 자신들의 지난 역사를 근거 삼아 국제 여론을 선도하는 것이 아일랜드만의 특허일 수는 없다. 대한민국 역시 민족해방투쟁의 결실로 건국된 나라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권과 자결권을 옹호해야 하고, 민주화투쟁을 겪으며 성숙한 나라로서 이스라엘군의 학살을 저지하는 데 함께 나서야 한다.

보편성에 호소하지 못하는 하소연은 늘 무력하고 무능할 뿐이다. 포스트-트럼프 시대에 대한민국이 우선 확보해야 할 '진지'는 인류에게 호소할 근거가 되는 보편성의 자리다. 트럼프 정부의 경제적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루한 협상을 끌고 갈 힘도, 한반도 평화의 숨통을 틔울 기회도 이 진지에서 비롯될 것이다. 벌써부터 자국민 절반 이상과 대치하고 있는 패권국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는 곡예가 아니라 말이다.

▲2025년 6월 19일, 가자시의 알시파 병원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반응하고 있다. 이들은 전날 북부 가자지구에서 구호 물자를 찾던 중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팔레스타인인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이는 가자 보건부의 발표에 따른 것이다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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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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