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그 무엇보다도 심층까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한 명의 인간이다. 만일 예술가가 인류가 느끼는 모든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예술가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희생할 때까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가 마법의 붓을 내려놓고 억압자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는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다." (디에고 리베라. 1886~1957)
"하하하". '멕시코 벽화의 심장'인 예술궁미술관(Museo del Palacio de Bellas Artes)에 전시된 디에고 리베라의 대작 '인간, 우주의 통제자'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 그림을 보고 미국, 아니 세계 최고의 자본가 집안 록펠러 가문을 대표해 그림을 의뢰했던 존 록펠러의 손자 넬슨 록펠러가 놀랐을 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이건 빨갱이 레닌 아냐?" 1933년 록펠러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대형 벽화를 그리기로 하고 2만1000 달러(단순하게 인플레만 계산하면 현재 400만 달러)에 리베라에게 의뢰했다.
완성된 그림 '교차로에 선 인간'에는 레닌이 가운데 아래쪽에 그려져 있었다. 록펠러는 레닌을 지워달라고 했지만, 리베라는 거절했다. 록펠러는 레닌을 지우지 않으면 더 이상의 대금지불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리베라는 굴복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추방됐다. 록펠러센터는 리베라 그림을 부수고 다른 그림을 그려 넣었다. 다행히 조수가 사진을 찍어 놓아서, 리베라는 록펠러의 돈으로 제목을 바꿔 같은 그림을 예술궁미술관에 그렸다.

'멕시코 벽화의 황제'인 리베라는 유태계이지만 다인종적 배경을 가졌다. 그는 3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살에 멕시코미대에 들어간 천재로, 국비로 스페인과 파리로 유학을 갔다. 비슷한 또래인 모딜리아니, 피카소와 친했고, 새로운 사조인 큐비즘 등에 빠졌다. 멕시코혁명(1910~1920년)이 성공하자 정부는 그의 귀국을 종용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거쳐 귀국하며 르네상스 벽화에 매료됐다.
보수적 학생들의 방해에 권총으로 무장하고 명문 국립예과대(NPS)에 벽화를 그렸고 공산당에 가입했다. 작업 중 프리다 칼로를 만나 1929년 22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첫 결혼은 파리에서, 두 번째는 귀국 후 했고, 칼로는 세 번째 부인이다). 리베라는 180cm가 넘는 키에 130kg이 나가는 거구인 반면 칼로는 158cm에 45kg도 되지 않아, 주변에서는 둘의 결혼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놀렸다.

그는 정부 여러 부서로부터 의뢰받아 의욕적으로 벽화를 제작했다. "예술은 가장 효과적인 전복수단의 하나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혁명투쟁'이라고 생각했다. 1929년 반정부 시위 참가를 거부했다가 주변에서 '사이비혁명가', '기득권백만장자예술가'라는 비판이 일자, 당 서기장이었던 그는 자기 자신을 제명했다.
"프레스코는 교회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살아있다.", “진짜 고미술품은 로마가 아니라 멕시코에서 찾을 수 있다." 리베라는 멕시코의 지방을 여행하며 풀뿌리 전통문화를 발견하고 식민지 이전 멕시코를 미화하기 시작했다. 식민주의와 서구중심주의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같은 경향은 인신공양 등 식민지 이전 사회의 문제점에 눈을 감는 '인디오주의'라는 비판을 들었다.
'멕시코의 역사'는 높이 9m, 길이 70m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으로, 1부는 고대 아즈텍을, 2부는 식민지 정복으로부터 멕시코혁명에 이르는 멕시코역사를, 3부는 멕시코의 미래로 '공산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 중 1부에는 이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이 대작을 보기 위해 국립궁전을 방문했지만, 예약이 필요하고 매주 하루만 개방한다고 해서 결국 보지 못하고 말았다.


"맑스는 이론을 만들었고 레닌은 이를 대규모 사회조직에 응용했다. 그리고 헨리 포드는 이를 사회주의 국가의 작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리베라는 1932년 포드의 초청을 받고 포드자동차 조립라인에 의한 대량생산체제(포드주의)를 보고 매료됐다. 그는 2만 달러를 받고 디트로이트미술관에 이에 대한 벽화를 그렸다(지난해 미국 역사 답사 때 디트로이트를 방문해 직접 본 그림은 압도적이었다). 록펠러센터 파동 후 미국에서 추방됐다.



30년대 후반부터 공산당이 주도하던 '운동 주류'로부터 고립됐고,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레온 트로츠키(1879~1940)가 만든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937년 트로츠키의 멕시코 망명에도 주요 역할을 했다. 결혼 후에도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리베라는 선을 넘고 말았다. 프리다의 여동생과 바람을 폈다가, 이혼을 당했다. 화가 난 칼로는 트로츠키 등과 맞바람을 폈다.
1년 뒤인 1940년, 트로츠키가 암살을 당해 경찰이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자, 그는 차 트렁크에 숨어 미국으로 도주했다. 미국으로 칼로가 찾아와 '잠자리를 하지 않고 재정적으로 독립하며 서로 독립적인 삶을 산다'는 조건으로 다시 결혼했다. 집도 '핑크 집'과 '파랑 집'을 나란히 지어서 각자 작업하고 생활했다(이 집은 이제 '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 저택 스튜디오 박물관'이 됐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변적으로 변했다. 1953년 '전쟁과 평화'를 그려 중국에 선물했고, 1954년 다섯 번째로 공산당에 재입당 신청을 해 드디어 허락을 받고 재입당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리베라, 프리다 칼로, 시케이로스 등이 공산당에 집착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시는 '복지자본주의'가 자리 잡기 전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병폐가 극심한 반면 소련 등 현존 사회주의의 문제점이 전면화되기 전이었다. 또 소련이 2차 대전에서 나치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식민지 해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믿었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칼로를 정말 사랑했지만, 그가 죽자, 리베라는 바로 자신의 비서와 4번째로 결혼했다. '프리다 칼로 재단'을 만들고 카사 아줄을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칼로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인 1957년 칼로를 따라갔다. 자신의 재를 프리다 칼로와 섞어 개인묘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멕시코 정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신은 없다." 말년(1947년) 작품인 '알라메다 공원 토요일 오후의 꿈'은 노동자, 농민 같은 민초로부터 수많은 멕시코의 역사적 인물들을 그린 걸작이다. 특히 자신을 키 작은 어린이로 그리고 그 뒤에 칼로를 그린 것이 유명하다. 문제는 19세기 멕시코의 유명 지식인 이나시오 라미네즈가 신을 부정하는 팻말을 들고 있도록 그린 것이다. 멕시코시티 중심가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 미술관'에서 이 그림 앞에 서면 우선 그 엄청난 크기에 놀라게 된다.

그 그림을 보고 있자, 그 팻말로 가톨릭이 지배하는 멕시코에 어떤 소동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판적 여론 때문에, 그림은 창고에 갇혀 있어야 했다. 9년 뒤,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리베라는 눈물을 머금고 팻말을 지웠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부인하고 나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이야기했듯이, 리베라는 "나는 무신론자고 종교는 '집단노이로제'라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디에고 리베라 미술관은 이름과 달리 이 작품 이외에는 볼만한 작품들이 별로 없었다. 리베라의 다양한 벽화들을 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벽화 박물관(Museo Vivo del Muralism)'을 가야 한다.

미국 남녀 자본가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닮은 조각이 있는 테이블에서 현금계산기 영수증 같은 것을 쥐고 앉아 있는 '월스트리트의 향연', 농민군 앞에 부자들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고 그 앞에 발가벗은 매춘부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집단난교(Orgy)', 농민군을 배경으로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만찬을 즐기고 있는 '자본가의 만찬'이라는 '자본가 3부작'은 리베라 벽화 중 처음 봤던, 익숙한 그림들이라 너무 반가웠다.



많은 민초들이 하얀색, 오렌지색, 파란색 리본들을 돌리며 춤을 추는 전통축제를 그린 '리본댄스'로부터 다양한 노동자들의 힘든 노동과정을 그린 노동 시리즈, 혁명 영웅 사파타 등 멕시코혁명에 대한 그림들, 아즈텍 등 전통 멕시코사회에 대한 벽화, 노동조합, 파업, 협동조합, 지본가의 죽음 등 다양한 주제의 벽화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 같은 20세기 멕시코 벽화운동의 뿌리인 마야 등 고대 멕시코의 벽화를 조망한 진열실도 매우 흥미로웠다. 벽화들을 즐기고 있자니 시간 가는 줄을 몰라, 다음 일정을 잊고 말았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벽화 화가, 아니 최고의 화가로, 서구의 '이젤 미술'을 비판하고 멕시코의 전통에 기초해 '민중을 위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그는 멕시코역사로부터 민중의 삶, 지배층의 위선, 미래사회 등 다양한 주제를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마르지 않은 석회에 물에 갠 안료를 그리는 기법으로 안료가 벽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오래 간다)을 통해 마야의 오랜 스토리텔링 방식과 강렬한 색채로 거대한 크기의 대작들을 무수히 만들어 냈다, 멕시코 정부는 그의 작품들을 '역사 유적'으로 지정했고, 그의 유화 '라이벌'은 2018년 라틴아메리카 작품으로는 최고가인 9800만 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인디오주의'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운 것 같다.
"반은 '예술의 신'이었지만, 반은 '짐승'이었다." 리베라 벽화 순례를 끝내고 박물관을 떠나려는데 문득 내가 몇 년 전 피카소에 대해 쓴 글이 떠올랐다. 피카소는 하반신은 인간이지만 상반신은 황소인 그리스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자주 그렸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화가이자 진보적 사회운동가였지만 수많은 여성 편력으로 여성들을 고통으로 몰고 간 가부장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반신반수'였다. 리베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자를 사랑할수록 고문하는 성향이 있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프리다 칼로다."
프리다 칼로가 답한다. "내 생애 가장 불운한 사고는 전차와 디에고였다. 그중 최악은 디에고였다." 디에고 리베라, 그의 반은 '벽화의 신'이었지만, 또 다른 반은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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