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고등교육 가치의 선언

[2025교육혁명행진②] 대학서열로부터의 해방은 가능하다

공화주의 고등교육 가치의 선언

[2025교육혁명행진②] 대학서열로부터의 해방은 가능하다

하상복 민교협 공동상임의장, 목포대학교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이-건동홍숙-국숭세단", 대학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듣고 있는, 참으로 슬프고 무서운 노래(?)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 또한 그러한 대학 서열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지만, 애써 위로하자면 그때는 '서울대-연고대'라는, 이른바 소수 명문대 리스트만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지금은 나머지 대학들도 철저하게 순위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노래 바깥의 대학들은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대학들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순위로 매겨지지 않는다. '인서울 대학'의 여부로 위상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울과 수도권 바깥의 대학들은 같은 랭킹인가? 그렇지 않다. 그 대학들도 지방거점대학과 그 주변의 대학들로 서열화되고 있다.

대학입시 관련 설명회를 가거나, 관련 방송(유튜브)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서열화 노래가 지겹도록 들린다. 대학입시 전문가들은, 그 위계화된 대학 구조에서 상층을 차지해야 한다는 주문과 더불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독창적' 작전을 부모와 학생에게 전달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너무 무시무시하다. 학생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장수가 되어, 남들이 지니지 못한 뛰어난 무기를 장착해야 한다는 명령을 듣는다. 정치사상가 홉스의 명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지금 나는 그 교육 전쟁의 전선 가운데에 서 있다. 아이가 현재 고3이다. 나는 존재론적 자기모순을 날마다 겪고 있다.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미래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자리에 종종 가게 되는 나는 여러 동료와 우리 교육의 난맥상과 무원칙과 극단적 경쟁주의와 절대적 승리주의를 비판하고 또 비판한다. 하지만 내 아이의 입시를 앞에 두고는 아이의 욕망을 꺾지 못하고, 아이가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온갖 정보를 듣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나는 왜 그 공모의 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가. 불행한 의식이다.

나보다 앞서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자 했던 동료를 만나면 모두가 나와 동일한 고민 앞에 서 있다. 잘못된, 문제가 심각한 입시 제도를 개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지옥 같은 경쟁의 굴레로 들어가 버텨왔다. '거대한 구조 앞에 서 있는 개인들은 무력하다. 구조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관행화된 경구를 참으로 오랜 시간 듣고 내면화해 왔다. 묘하게도 그 경구가 나와 우리의 자기 모순적 현실을 위로해 준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정당화의 논리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떡인다.

하지만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그 경화된 교육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 나는 크나큰 부끄러움을 끌어안고 그들과 연대 하고자 한다. 오는 10월 25일, 무상대학과 평준화대학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대학 무상화-평준화 국민운동본부>)이 모여 대행진을 한다. 우리 대학이 갇혀 있는 서열화 구조와 고비용의 구조를 개혁하고자 거리에서 소리 높여 외쳐온 용맹한 사람들이다.

'2025 교육혁명대행진'이 외치는 바는 명확하고 뚜렷하다. 대학의 위계화를 없애고, 모두가 등록금 내지 않고 다니는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대학 구조가 가능한가? 그렇다. 무상대학, 평준화대학을 운영하는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대학 구조는 바람직한가? 그렇다. 그들은 우리보다 행복한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 무상화-평준화 국민운동본부가 무상대학, 평준화대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새로운 교육 구조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몇 년 전 우리의 괴물 같은 대학입시 제도가 양산한 한 청년과 만났다. 카페가 떠나가도록 그 20대와 목소리 높여 싸웠지만 평행선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 청년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사람은 무임승차자였다. 자신의 성공과 승리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고등교육은 이처럼 경쟁주의와 승리주의를 철칙으로 삼아 들어온 청년들이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한층 더 확고히 한 채 사회로 나아가도록 방치하는 장소로 변질되었다. 우리 사회가 그야말로 승리와 패배의 양극화 속에서 야만의 상태로 전락하는 데 대학과 고등교육은 공모와 결탁 관계로 들어가 있다.

프랑스혁명의 경험은 우리에게 교육과 정치, 교육과 사회의 분리 불가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좋은 정치,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에 조응하는 좋은 교육을 만들어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은 공동체의 미래를 견인할 정치사회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한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보면, 우리 교육, 특히 고등교육은 아무런 공동체적 이념도, 가치도 내재하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 경쟁주의와 승리주의 교육 원칙은 결코 원칙일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대학-평준화대학이라는,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념 앞에서 나는 공화주의를 떠올리곤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가 거리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 구절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는 1919년 3·1 만세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은 임시정부를 태동시켰고, 임시정부는 독립으로 다시 찾게 될 나라는 공화국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명문화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공화국은 성, 재산, 신분 등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공화국이 될 것임을 임시헌장의 문서로 공표했다는 사실이다.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평등 공화국, 대한민국의 이상과 우리의 고등교육은 얼마나 잘 호응하고 있는가? 우리의 고등교육은 그 위대한 역사, 그 놀라운 상상력을 철저히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질적 불평등의 가치를 내재화한 청년들이 조밀하게 구축된 서열화 대학에서 배운 뒤 과연 평등의 공화국을 실천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가 통찰하고 있듯이, 모름지기 공화국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없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물질적 불평등으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만연한 자리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정치 공동체다.

오는 가을, 서울의 광화문에서 열릴 2025 교육혁명대행진은 서열화의 상층부에 올라가지 못하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고민하는 부모와 학생들의 넋두리도, 변명도 아니다. 그건, 우리가 이루지 못한 공화국, 20세기 벽두에 한반도 전체를 뒤흔들어 찬란한 국가적 비전을 세운 만세 혁명이 지향한 평등의 공화국을 향한 거대한 걸음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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