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동북아 국제정세는 미중 경쟁의 격화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중 경쟁은 국제질서 내에서 자국이 차지하는 힘의 비중을 극대화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대결이자 AI,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의 전략적 자산을 둘러싼 기술경쟁이다. 러우 전쟁은 세계화 시대에 억눌렸던 지정학적 갈등이 분출된 사례로 유럽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안보 지형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을 둘러싸고 전방위적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러시아는 서방과의 전면적 대립 속에 중국, 북한 등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국제질서가 양분되는 양상이 더 명확해지고 있다.
이런 구도 속에서 북한은 자국의 체제 안전과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좌표를 유연하게 조정하고 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등거리 외교를 구사해왔는데, 특정 시기에는 중국과 밀착하고 또 다른 국면에서는 러시아와 관계를 심화하는 방식으로 외교적 공간을 넓혀왔다.
러우 전쟁은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높였고, 북러 관계는 군사·외교적 차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북한은 러시아에 포탄, 미사일 등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기술 및 우주기술 이전받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2023년 9월 김정은 위원장의 방러로 성사된 북러 정상회담 장소가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니치 우주기지였다. 우주 발사체 기술 부족으로 두 차례 위성 발사에 실패한 북한으로서는 우주 기술 이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과거 소련과 체결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협정'을 통해 핵 기술을 이전받아 핵 개발에 성공했듯, 러시아로부터의 첨단 군사 기술 이전이 현실화된다면 한국 안보에 심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2024년 6월 '포괄적 협력 동반자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 단계 더 제도화되었다. 이 협정에 1961년 체결된 조소우호조약에 포함되었던 '유사시 자동군사개입 조항'도 포함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에 대한 추가 제재 결의안 채택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이를 무력화하는 등 북한에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외교적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으로선 잠재적 안보 위협이 커진 결과를 맞았다.
북한을 전략적 완충지로 인식하는 중국도 북러 관계 밀착을 견제하며 북한을 통한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강대국'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므로 북한과 군사적으로 밀착하는 모습은 피하고 있지만, 북한이 급격히 불안정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북한 무역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에너지·식량 공급을 통해 북한 경제를 사실상 뒷받침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급감했던 북중 교역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고, 신압록강 대교 재공사, 훈춘 지역 세관 확충은 북중 무역 활성화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오는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승리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코로나 이후 사실상 외교 활동을 중단했던 북한의 첫 본격적 외교 복귀이자, 다자 외교 무대 데뷔다. 동시에 북중관계 복원, 북중러 협력 강화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북중러 3자 회담 성사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가운데, 이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대항하는 삼각 협력의 상징적 장면이 될 수 있으며, 북한으로서는 고립된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제적 협상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활용하여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는 전략을 취해왔다. 2018~2019년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김정은 위원장은 시진핑 국가 주석과의 연쇄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 카드를 확보한 협상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번 베이징 방문도 중국과 관계를 복원하고, 향후 북미 대화 재개 시 협상력을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경색된 한중·한러 관계, 교착된 남북관계가 맞물리면서 한국은 경제·외교·안보 전반에서 새로운 전략적 대응이 절실해졌다. 이러한 복합 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외교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첫째,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고 전략적으로 심화할 필요가 있다. 안보협력뿐만 아니라 나아가 반도체·에너지·AI 기술 등 경제안보 영역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협력이 필요하다.
둘째, 중국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협력 공간을 열어두어야 한다. 공급망, 기후변화, 보건, 교육 등 비정치적 영역에서 협력 채널을 복원하는 것은 한국 경제의 리스크를 줄이고,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건설적 역할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셋째, 러시아와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되 에너지·극동개발 등 전략적 분야에서 협력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한반도 평화구상 차원에서 한국은 북미 대화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며 북미 대화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남북관계를 진전시켜야 한다. 이는 한미 동맹의 틀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주도의 전략적 자율성과 중재 역량 강화의 차원에서도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피스메이커(peace maker)"로서 북한과의 대화를 요청한 것은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한국은 북·중·러 연대의 상징성을 과대평가하기보다 군사·경제적 실질 협력의 효과와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파급을 냉정히 분석해야 한다.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되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중·러와의 관계를 복원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한중·한러 관계의 단절은 북한을 견제할 지정학적 레버리지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강대국의 압력이 한반도에 직접 투사되어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지금 복합적 외교·안보 전략의 출발선에 서 있다. 한국은 기술동맹을 넘어선 외교 다변화, 신뢰 기반의 남북관계 재구축에 더하여 한국 외교의 전략적 확장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지정학적 긴장, 보호무역주의, 경제 블록화의 파고 속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를 발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가오는 10월 경주 APEC 정상회의는 국익우선 실용외교를 추구하는 한국 외교의 시험대이자 외교적 지평을 넓힐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복잡한 외교·안보 환경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전략적 레버리지를 확대할 기회도 맞이하고 있다. 미국·중국과의 실용외교, 동맹의 재구성,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복합적 전략을 통해 한국은 글로벌 핵심국가로서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가는 지금, 우리는 저성장 고착, 감염병 상시화, 기후위기 가속, 기술 패권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충돌, 민주주의 후퇴 등 복합 위기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위기는 일상이 되었으며, 단일 해법이나 전통적 전략만으로는 대응이 어렵다. 이 같은 격랑의 시대에 한국은 국제질서 재편의 교차점에서 복합적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은 글로벌 규범 형성, 전략산업 연계, 기후위기 대응, AI·디지털 전환 분야에서 국제적 협력을 넓히려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한국은 다자협력체와 지역 연대를 강화하고, 우호적 남북관계를 형성하고 북미 관계 개선의 다리 역할을 할 때 한국이 기술·안보·경제가 교차하는 접점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반으로 한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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