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에서 열릴 미-러 정상회담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전 관련 협상 기준선을 제시한 유럽 정상들이 낙관론을 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10점 만점" 회의였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회담 뒤에도 러시아가 휴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회담 목적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포함한 후속 3자 회담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기대치를 낮췄다. 충성파 위주 인사 및 국가안보회의(NSC) 축소로 트럼프 정부의 외교 전문성이 떨어져 러시아에 말려들 경우 회담 전보다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미 CNN 방송, <로이터> 통신 등을 보면 13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등 유럽 정상들 및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화상 회의를 가졌다. 메르츠 총리와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 통화 뒤 공동기자회견에서 미-러 회담 관련 5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회견에서 설명된 5가지 원칙은 △후속 협상에 우크라이나가 포함돼야 하고 영토 교환을 포함해 평화 조건은 휴전 뒤 논의돼야 한다 △영토 협상을 배제하진 않지만 접촉선(현재 전선)을 영토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고 러시아 점령에 대한 법적 인정은 논의 대상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력한 안보 보장이 있어야 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권리도 침해될 수 없다 △이번 협상은 대서양 전략의 일부가 돼 뚜렷한 진전이 없다면 러시아에 대한 압박이 강화돼야 한다 등이다.
메르츠 총리는 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에서 이 원칙들을 이해했고 "진정 건설적인 좋은 대화를 나눴다"며 "변화에 대한 희망,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올 희망이 있다"고 평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관련 모든 사안 논의엔 우크라이나가 참여해야 한다는 점, 안보 보장, 3자 회담 필요성 등을 "지지"했다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의에서 "미국이 이번 알래스카 회담에서 휴전 달성을 원한다는 걸 매우 분명히" 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의해서만" 영토 협상이 가능하다는 점 또한 명확히 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러에 "심각한 결과" 휴전 압박하면서도 "2차 회담이 더 생산적일 것" 기대 낮춰
트럼프 대통령도 해당 회의가 "매우 좋았다"며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취재진에 "매우 우호적"인 "10점 만점"의 회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푸틴 대통령이 회담 이후 전쟁 중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매우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만 "두 번째 회담"을 언급하며 이번 미-러 정상회담 성과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기존 입장을 지속했다. 그는 15일 회담 목적을 젤렌스키 대통령을 포함한 신속한 후속 회담을 위한 "테이블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첫 회담보다 더 생산적인 두 번째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첫 번째 회담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자리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회담이 잘 진행되면 두 번째 회담이 곧 열릴 것"이라며 두 번째 회담의 형식은 3자 회담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거의 즉시" 이를 열고 싶다며 "그들이 내가 거기 있는 걸 원한다면 푸틴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과) 나는 빠르게 두 번째 회담을 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 대한 불신 및 영향력 한계 또한 드러냈다. 그는 취재진에 알래스카 회담으로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겨냥하는 것 막을 수 있냐는 질문을 받고 "아니다"라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푸틴 대통령)와 많은 좋은 대화를 나눈 뒤 집에 돌아가면 (러시아) 로켓이 요양원, 아파트를 타격해 사람들이 거리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그래서 내 대답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대화를 전에도 나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가 자국 요구 사항엔 변함이 없다고 밝힌 것도 합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요인이다. <로이터>는 13일 알렉세이 파데예프 러 외무부 정보보도국 부국장이 취재진에 휴전 관련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지난해 6월에 발표한 입장에서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전쟁 중단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루한스크·도네츠크·자포리자·헤르손에서의 철수, 나토 가입 포기 등을 요구했다. 이는 유럽이 제시한 협상 기준선과 배치된다.
전문가 없는 트럼프, 푸틴에 휩쓸릴 땐 '크렘린 복음 전파' 우려 여전
유럽 정상들의 낙관적 발언에도 막상 대면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는 여전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트럼프와 푸틴을 단둘이 방안에 두는 건 재앙을 불러오는 비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2018년 정상회담 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의혹 관련 자국 정보기관의 의견을 무시하고 푸틴 대통령의 편에 서 발언한 것을 지적했다.
신문은 "유럽 지도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비공개 회담 뒤 다시 한 번 크렘린(러 대통령궁)의 복음을 전파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고 짚었다. 신문은 백악관이 "듣기 연습"이라며 회담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것도 구체적 합의가 테이블 위에 없다는 신호라며 "푸틴은 여전히 트럼프에 크렘린에 최대 이익을 가져올 평화 협상 이미지를 형성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충성파 중심 인사 결과 백악관에 협상을 도울 노련한 러시아 전문가가 없다는 점도 우려 사항으로 꼽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 대통령을 비롯해 러시아에 외교 경험이 많은 인력들이 포진해 있는 가운데 미국은 경험이 없는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 스티브 윗코프 백악관 특사가 협상을 이끌어 왔다고 짚었다.
트럼프 1기 때 불가리아 주재 미 대사를 지낸 에릭 루빈은 "트럼프에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잘 알고 조언할 정책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봤다. 신문은 더구나 보통 정상회담 준비를 이끄는 국가안보회의(NSC)도 트럼프 2기 취임 뒤 대폭 축소돼 미국의 통상적 외교 정책 과정이 무너진 상태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알래스카 회담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절대 수락하지 않을 협상 조건에 설득되는 것이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라고 짚었다. 이렇게 되면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가 젤렌스키 대통령으 향해 미국의 우크라이나 정보 지원 중단 등 위협이 다시 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웠던 관세 위협도 푸틴 대통령을 움직일 정도로 강한 수단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빌 클린턴 정부 때 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낸 스티븐 파이퍼는 3천억달러(약 416조원) 규모 러시아 동결 자산을 우크라이나 몫으로 돌리거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신속한 무기 생산 및 지원 등 더 유효한 방법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관세 및 2차 제재 압박도 지난 8일 시한이 지났지만 정상회담에 묻히며 사실상 흐지부지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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