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만 보기 아까운데!'
책 <들판에 텐트 치는 여자들>(김하늬·김지영·윤명해 지음, 해냄출판사 펴냄, 296쪽)을 쓴, 2021년부터 여성의 아웃도어 모험을 돕는 커뮤니티 '우먼스베이스캠프(WBC)'를 운영하는 저자 중 하나가 WBC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꽤나 직관적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캠핑 중 '나만 보기 아까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그런데 누구랑 가지?", 함께 떠날 여자 친구들이 필요한데 "자연에서 몸을 움직일 여자 친구들,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은 저자들이 WBC를 만든 과정부터 운영, 이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았다. "여자들이 모험을 떠났다가 언제든 돌아와 충전하고 다시 모험을 지속할 수 있는 장소"의 이미지로 시작한 WBC는 산행, 캠핑 등 여성들에게 아웃도어 경험을 제공하고 매년 여름 여성 1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캠핑 축제(리트릿 캠프)를 연다.
WBC의 첫 공식 캠핑 축제였던 2022년 리트릿 캠프의 주제는 "당신의 두려움, 그것을 쫓아가라(Follow your fear)"였다. 저자들은 책에서 이 문구를 채택한 이유를 "나의 진짜 욕망은 늘 두려움 뒤에 존재하는 법", "결국 모험은 내가 해보지 않아서 두려운 그 무엇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문구를 비롯해 저자들이 에세이엔 잘 해내지 못할까봐, 실패가 두려워서 한발 더 내딛기를, 모험을 망설이는 여성들의 등을 밀어주는 힘 있는 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WBC를 '커뮤니티'라고 소개하는 저자들은 참여자들 간 관계 맺음도 주의 깊게 살핀다. 이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새로운 우정"을 발견했다고 한다.
'새로운 우정'은 몸을 움직이는 활동 자체에 기반한다. 여성들의 공감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대화만으로 이뤄진 관계는 존속과 재생산이 생각보다 어렵다. "가만히 마주 앉아 납작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손쉽게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맨얼굴과 가벼운 옷차림, 흙이 묻은 손바닥"으로 "자신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몸을 부대끼는 경험은 여성들에게 생경하지만 신선한 관계의 단초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막연한 개념 같던 '연대'가 실체화 된다. 책엔 백패킹 모임에 참여한 한 회원의 후기가 인용돼 있는데 그는 "언제부턴가 연대'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지만,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을 불편해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등산 중 후발대를 챙기고 음식을 준비하고 서로 속도를 맞추는 모습 등을 보며 이게 "연대의 모양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사람과 부대끼기 싫어한다고 확고하게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활동을 통한 관계 맺음이 전통적 관계 혹은 역할 속에서 자신을 "사람과 부대끼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쉬운 여성들의 자기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강렬"하게 만나지만 "적당한 거리감"을 존중하고 활동이 끝나면 "언제고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는 점은 오히려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된다. 참여자들은 "캠프파이어에서 연인, 가족, 심지어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깊은 이야기"를 털어 놓곤 한다. 이 커뮤니티가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 선후배 등 "자로 잰 듯 명료하게 범주화된" 인간관계의 경계를 넘어 "서로에게 친정 같은 아지트를 내주고 듬직한 모험의 동료가 되어주곤, 또 언제고 담담히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느슨하고도 다정한", "든든한 제3의 관계망"이 돼 준다는 것이다.
책은 "그저 누군가가 한마디 제안했을 뿐인데 이렇게 진심인 여자 친구들이 나타났다면 이런 동료들이 필요한 여자들과의 커뮤니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건 아닐까?"라며 여성들이 "더 넓은 연대와 안전망"을 바라왔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저자들은 WBC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여성들만으로 커뮤니티를 꾸려가는 이유'라는 주제를 책의 마지막 챕터에 배치했다. 저자들은 WBC를 만들기 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아웃도어를 즐겼던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책의 앞부분에서 한 저자는 거의 남성으로 구성된 바다 수영 모임에서 들었던 말을 적는다. "왜 화장을 안 해요? 집에서 요리는 잘해요? 여자분이 수영도 잘하고 바다 수영도 좋아하고, 오타쿠 같아요!" 평범하게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지만 남성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여성은 "유별난 여자애" 취급을 받는다.
뒷부분에선 또 다른 경험이 제시된다. 단체 아웃도어 활동 때 남성의 수가 더 많을 뿐 아니라, 학창시절부터 운동장을 독점해 온 경험 등으로 인해 남성들이 이 활동에 능숙한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효율적" 활동을 위해 남성들이 여성들을 "자연스레 배려"하며 산행 등이 진행된다. "고마웠지만" 분명 '모험'에 발을 디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환경에선 여성들이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 그리하여 성장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다.
이 두 경험, '배척'과 '보호'는 언뜻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 공통점이 있다. 소수자에게 적용되고 결과가 '배제'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 이 상황에서 소수자는 주류에 섞일 수도, 주류에 올라설 수도, 주류를 바꿀 수도 없다.
"그래서 스스로 감당해 보기로 했다. 여자들만 함께 가는 백패킹은 그래서 필요했다. 온전히 나 자신의 한계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
저자들은 다만 그 길에서 오히려 "준비 과정에서의 세심한 배려, 뒤처지는 친구를 챙기는 다정한 손길, 사소하지만 필요한 돌봄들"을 만나며 "서로 기대면서 함께 나아가는 법, 연약한 나를 받아들이고 타인을 감싸안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닌 "섬세하고 다정한 연대의 힘을 실험해 보기 위해 먼저 여성들과 함께한다"고 설명했다.
WBC는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명확하고 커뮤니티성을 갖고 있지만 비영리 단체는 아니다. 저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지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방식이 소비"이기에 소비의 방식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영향력을 가지고 지속 가능하게 퍼지길" 바란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빛나는 야성을 품은 여자들을 불러 모을 우리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실 분, 연락주세요! 세상을 바꿀 모험, 함께 만들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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