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지 않나"
지난주 수해 대비 현장 점검 회의에서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말은 재난 대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부문에서나 늘 자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사실 많은 경우 그것은 '우선순위'와 '정치적 의지'의 문제다.
산업재해는 그 중 대표적인 사례다. 2022년 SPL 평택공장, 2023년 샤니 성남공장에 이어 지난달 SPC삼립 시화공장까지. SPC 계열사에서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 고 김용균 노동자에 이어 또다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고 김충현 노동자의 비극이 벌어진 이유, 매일같이 일하고 퇴근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업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전 예방보다 사후 보상이 비용 측면에서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그렇게 '떨어짐', '깔림', '끼임' 등과 같은 '재래형' 산재 사망이 반복된다.
여기에 복잡한 하청구조가 더해져 하청 노동자들은 안전 사각지대에 놓이고, 사고가 나도 책임 소재는 흐려진다. 어렵게 만든 중대재해처벌법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며 경영자에게 실질적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은 여전히 안전관리체계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유수의 법무법인에는 막대한 비용을 쏟는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세계 각국의 국민소득 수준과 산업재해 사망률을 비교하면, 둘 간에는 강한 상관관계"(반비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은 "예외적"이며, "소득 대비 산재 사망률이 너무 높아 그래프에 집어넣기도 힘들다"고 한다(<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생각의힘). 결국, 부족한 것은 자원도, 돈도 아니다.
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일만이 아니다. 정리해고와 열악한 처우 역시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고공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증명한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2022년 구미 공장에 화재가 발생한 후 사업을 청산했다. 화재 때문에 기업이 회생할 수 없는 피해를 입거나 생산 물량이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토지 무상임대와 각종 세제혜택을 받은 일본의 모회사 닛토덴코는 한국옵티칼의 잔여 물량을 다른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으로 이전하며, 156명의 노동자를 신규 채용했다. 그 가운데 희망퇴직을 거부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기존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됐고, 이들은 520일을 훌쩍 넘겨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고공 농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세종호텔 앞 지하차도 구조물에서 120일을 넘게 농성 중인 세종호텔지부장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세종호텔은 코로나19 유행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민주노총 노조에 대한 탄압은 그 전부터 시작됐다. 외국어 시험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해고 절차, 어용노조 지원과 주방·객실 노동자 외주화 등, 기업의 의도는 분명했다. 정규직을 해고하고, 외주화를 통해 쉽게 해고 가능한 유연한 노동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파업과 단식을 이어나갔던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조선업 불황기에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남은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해진 처우를 감내하며 일했다. 이후 조선업 호황이 왔지만 하청노동자의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우 개선을 주장한 파업을 이유로 470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한화오션 앞 30m 높이의 좁은 CCTV 철탑 위에서 조선하청지회장은 100일 가까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표면적으로는 기업의 경영상 위기로 어쩔 수 없이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업이 위기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 화재가 문제였다면, 커다란 이윤을 올리며 신규인력을 채용하는 한국니토옵티칼이 구미공장의 물량과 함께 노동자들의 고용도 승계했을 것이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한 경영 악화만이 이유였다면, 세종호텔이 고용유지지원금을 추가 신청하지 않으면서 정리해고를 실시하거나 민주노총 조합원을 탄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순전히 조선업 불황 때문에 하청노동자의 처우가 악화된 것이었다면, 10년 전보다도 나쁜 하청노동자의 처우는 이미 개선됐어야 한다.
이는 기업이 노동자를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 대상, 비용, 부품, 리스크 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노동자의 목소리는 묵살되고, 지워지고, 탄압당한다. 만약 제도와 정치가 기업의 이런 노골적인 행태를 제어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이 이렇게 행동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윤과 성장은 수단이고, 모든 사람의 존엄한 삶이 목적이 되는 사회라면, 자본 역시 노동자의 삶과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는 제도와 감시, 정치적 의지와 시민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야기 했던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중요한 첫걸음이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보여주듯, 제도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법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기업이 '실적 압박' 만큼, '노동 존중 압박'을 받도록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 편에서 정부와 기업에 대해 함께 목소리 내는 일이 중요한 실천이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용승계를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리도록, 반복되는 산재사망의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에 시민과 노동자 목소리가 배제 되지 않도록, 고공 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이 하루 빨리 땅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기업과 노동자가 공평하게 이익과 희생을 분담하며 노동자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게 농성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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