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윤 식품전문기자의 커피 이야기] ⑤베트남 커피 , 핀(phin)이 내려주는 진한 한 모금

전통 핀 커피의 진한 여운부터 에그 커피의 달콤한 탄생, 그리고 로부스타 급등이 불러온 한 잔의 경제학까지

▲ 베트남 프리미엄 카페 브랜드 탄의 핀 커피 추출 모습. ⓒ프레시안(문상윤)

베트남 남단 호찌민 새벽시장 골목에서는 아직 어둠이 가시기 전 스테인리스 핀(phin)에서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먼저 아침을 깨운다.

작은 금속 필터 아래로 진득한 갈색 방울이 뚝뚝 이어지면 노점 주인은 연유를 잔에 두어 바퀴 두르고 얼음을 잔뜩 채워 카 페 쓰어다(아이스 연유 커피)를 내민다.

반나절 뒤 하노이 구시가 좁은 골목으로 자리를 옮기면 이번에는 노오란 달걀 거품이 솜사탕처럼 올라간 카 페 쯩(에그 커피) 한 잔이 여행객의 손에 얹힌다.

같은 나라지만 전혀 다른 두 잔의 핀 커피와 에그 커피를 축으로 하는 베트남의 이색 커피 문화는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지역 역사와 경제, 그리고 창의성을 한데 묶어낸다.

핀은 프렌치 프레스를 베트남 사정에 맞게 간소화한 여과 도구다. 바닥에 작은 구멍이 난 원통, 커피층을 눌러 주는 프레스 디스크, 그리고 뚜껑이 전부다.

곱게 분쇄한 로부스타 원두를 넣고 프레스 디스크로 지긋이 눌러 준 뒤 95 ℃ 정도의 물을 두 차례 부으면 5~7 분 동안 에스프레소에 버금가는 진한 원액이 찬찬히 떨어진다.

여과지나 전기가 없어도 깊은 맛의 커피 추출이 가능한 덕분에 시장 통 한켠에서도 즉석 카페가 열린다.

핀 커피에 연유를 섞어 얼음 위에 붓는 카 페 쓰어다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우유가 귀하던 시기에 현지에서 연유로 대체된 것이 시초다.

연유가 만드는 농도와 단맛은 로부스타 특유의 쌉싸름함을 부드럽게 풀어 주면서도 진한 바디감을 살린다.

집에서 재현할 때는 원두와 연유를 2 : 1 정도로 섞고 다크초콜릿 한 조각이나 라임 제스트를 갈아 넣으면 모카 쓰어다처럼 변주해볼 수 있다.

향이 투박하다고 느끼면 뜸들이기 직전에 뜨거운 물 10 ml를 더 부어 살짝 희석하면 된다.

하노이에서는 또 다른 커피 풍경이 기다린다. 1946년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 바텐더였던 응우옌반장이 우유를 대신할 재료를 찾다 달걀노른자와 연유, 설탕을 거품기로 휘핑해 만든 것이 에그 커피의 시작이다.

노른자 거품은 3 분쯤 휘핑하면 마스카르포네 같은 질감이 되고 뜨거운 핀 커피 위에 올리면 티라미수와 라테가 한 잔에 녹아든다.

하노이 올드쿼터의 카페 지앙에서는 하루 3000잔이 넘는 에그 커피가 팔린다. 우유 부족이라는 결핍이 오히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달콤한 디저트 커피를 탄생시킨 셈이다.

이 진한 한 모금 뒤에는 로부스타 생두 시장의 격랑이 숨어 있다. 미국 농무부 해외농업국이 올해 5월 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4/25 베트남산 로부스타 생산량은 2790만 포대(60 kg 기준)로 전년 대비 3 % 줄어들 전망이다.

작황 부진에다 선물시장 투기까지 겹치면서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 현지 거래 가격은 2월에 kg당 131,000동으로 미화 약 5.1달러까지 치솟아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1년 새 70% 오른 생두 값 탓에 현지 로스터들은 음료 한 잔에 들어가는 원두를 줄이고 얼음 비율을 키우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반면 북미‧유럽 로스터들은 인도네시아‧우간다산 로부스타로 소싱처를 다변화 중이고 국내외 로스터 가운데 일부는 로부스타를 블렌딩에서 제외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로부스타의 거친 이미지를 세련된 카페 메뉴로 승화한 베트남식 레시피들이 가격 급등에도 꾸준히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핀 추출 원액은 아이스크림에 부어 베트남식 아포가토로 변주되고 에그 커피 거품은 브런치 카페에서 팬케이크에 올리는 에그 커피 소스로 변화와 발전이 되고 있다.

꿉꿉할 정도로 달콤한 연유 맛이 부담스럽다면 연유 대신 귀리우유 시럽을 사용하거나 달걀 거품에 바닐라빈을 섞어 깔끔하게 조정할 수도 있다.

베트남 커피 문화는 결국 로컬 기후·경제·취향이 만든 창의적 적응의 결과물이다. 로부스타의 강건함은 고온다습한 저지대에서 아라비카보다 안정적으로 열매를 맺게 했고 연유와 달걀노른자는 현지 물자 사정 속에서 찾아낸 달콤한 해결책이었다.

핀이라는 소박한 필터로도 깊은 추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전기 장비와 종이 필터가 난립한 현대 커피 문화에 저비용·친환경 이라는 역설적 메시지를 던진다.

생두 가격이 요동치고 시장은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베트남 사람들은 길거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핀에서 떨어지는 갈색 방울을 기다리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이번 5월 집에서 핀을 한 번 올려 보자. 진득한 원액을 컵에 받고 연유 혹은 달걀 크림을 올려 본다.

첫 모금엔 하노이 구시가 달걀 거품의 달콤함이 다음 모금엔 호찌민 새벽시장의 농밀한 로부스타 향이 그리고 그 뒤에는 국제 원두 시장의 뜨거운 현재가 고스란히 내려앉을 것이다.

한 잔의 커피가 지역, 역사, 경제를 연결하는 가장 풍부한 문화 언어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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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윤

세종충청취재본부 문상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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