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의 세계에 담긴 감각의 향연

[이동윤의 무비언박싱] <파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린 과일이 맛이 아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이미지'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보기 좋은 과일이 맛도 있다는 통념은 정설이 아닌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과일의 가치를 평가하는 순간은 시각이 아닌 미각이기 때문이다. 입 속에서 느껴지는 풍부한 과즙의 향연을 경험하지 않고 그 과일을 온전히 가치 매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각적 정보로 내려지는 일차 평가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맛있어도 형태가 이상하다면, 맛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해 버린다. 시각이 모든 가치 판단을 지배하는 시대! 시각을 넘어선 다른 감각들로 새로운 가치들을 정의 내릴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맞이할 수 있을까? <파과>를 보며 든 단상이다.

▲살인을 위해 비녀를 뽑아드는 조각(이혜영). ⓒNEW

<파과>의 '파과'는 표면적으로 이해영 배우가 맡은 역할을 상징한다. 노인이란 이유로 외면당하는 세상에서 칼을 들고 정의를 수호하려는 여인. 그녀를 노인으로 지칭하도록 만드는 시각적 정보들과 달리 속에 품고 있는 날카로운 비녀 끝 독침이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한다는 사실이 파과와 그녀를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하지만 파과를 상징으로만 파악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모순 속에 갇힌다. 시각 너머의 또 다른 감각을 통해 대상을 재평가하려는 영화적 시도가 노인에게는 여전히 시각적 이미지(나이든 외모)에서 또 다른 시각적 이미지(독침)로 전이될 뿐이기 때문이다. "상처 난 과일이 더 맛이 좋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파과로 상징되는 노인의 진정한 가치 평가는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시각을 극복한 미각적 정보를 통해 과일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영화 속 노인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노인의 별칭은 손톱에서 초밥, 다시 조각으로 세 번 바뀐다. 그녀의 별칭은 그녀의 존재감이며 후배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다. 별칭에는 노인을 둘러싼 각각의 신화적 스토리가 포함된다. 특히 스승의 복수를 위해 혼자서 스물여덟 명을 처리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업계의 영웅으로 떠받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장면을 직접 보진 못했음에도 별칭 속에 담긴 상상적 이미지들이 노인을 더욱 완벽한 킬러로 이끈다. 그런데 영화는 흥미롭게도 상상적 이미지들을 관객들에게 여과 없이 노출함으로써 별칭을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도록 만든다. 젊은 시절의 노인이 가차없이 스물여덟 명을 상대하는 장면과 노인이 되어 다수를 상대하는 장면은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상이다. 젊은 신체의 날렵한 킬러가 펼치는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카메라는 빠른 호흡과 광각 렌즈로 다이내믹하게 담아낸다. 반면 노인이 되어 다수를 상대하는 액션 시퀀스는 가격당한 뒤 고통스러워하는 노인을 좀 더 차분한 호흡으로 부각한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의 관습 속에서 ‘영웅’은 고통을 느끼지 않아 왔다. 그 어떤 괴력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근육질의 신체와 초인적 면모가 액션 영화 속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든다. 하지만 <파과>는 다수의 괴한들과 대결하는 노인의 신체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한 대 맞았을 때 온몸에 전해지는 고통을 그대로 표현하며 노인을 둘러싼 신화들을 여지없이 해체한다. 이 순간 노인에 대한 상징물로 대응되었던 ‘파과’의 상징성은 이미지 중심에서 신체적 감각으로, 시각적 정보에서 통증이라는 감정의 파고로 확장된다. 마치 상처 난 과일의 시각성이 아닌 미각을 통해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의도처럼 노인임에도 강인할 거란 편견에서 벗어나 노인으로서 느끼는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견뎌내며 끝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집념으로 노인을 재평가하도록 이끈다.

▲자신을 치료해 준 강 선생을 위협하는 조각. ⓒNEW

촉감은 <파과>의 수면 아래를 관통하는 중요한 감각이다. 대상을 철저히 효용가치로 판단하는 킬러의 세계에서 의도적으로 감정을 거세한 채 고립을 선택한 노인에게 촉감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파과>에서의 촉감은 구타에 의한 고통의 감각과 함께 아픈 곳을 감싸주는 타인의 부드러운 손길 또한 포함한다. 덤으로 받은 상처 입은 과일은 결국 노인의 냉장고에서 썩어 문드러진다. 아무리 맛이 좋더라도 결국 쉽게 상해버릴 수밖에 없는 파과의 운명처럼 <파과>의 노인은 고통과 안식의 이율배반적 촉감들 사이에서 모순적 행동들을 드러낸다. (굳이 이름에도 기입할 정도로 신성해지려 애쓴) '신성방역'을 통해 세상의 악을 퇴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노인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투우(김성철)를 살해하려 했듯이 영화 속 파과의 상징성은 고통과 포용, 희생과 이기적 생존 욕망을 모두 포함한다.

반면 '복수에 대한 강한 욕망'은 <파과>를 수면 위에서 관통하는 중요한 감각이다. 노인이 신성방역을 통해 사회의 악을 처단하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짓밟으려 했던 세상에 대한 복수였다. 신성방역 직원이자 킬러인 장비(최무성)가 이 세계에 발을 디딘 것도 딸에 대한 복수였던 것처럼 신성방역에 유입되는 킬러들에겐 복수가 가장 큰 무기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서사는 복수의 주체를 전복하고 과정을 지연시킨다. 복수하려 했던 자(투우)는 사랑받으려 했던 상처 입은 영혼에 불과했고, 복수의 대상이 된 줄 알았던 자(노인)는 투우를 살해함으로써 진정한 복수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일반적 액션 장르가 복수극을 양분 삼아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것과 달리 <파과>는 복수극의 외피를 입은 채 복수하는 자와 복수 당하는 자 사이의 교차점들 사이에서 다른 의미들을 건져 올리려 애쓴다.

▲조각을 감시하는 투우. ⓒNEW

액션 장르의 영웅임에도 타인의 구타로부터 오롯이 고통을 느꼈던 노인처럼 <파과>는 복수를 위해 타인을 죽인다는 행위를 장르적 신화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내를 의료사고로 죽음에 몰아 넣은 병원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강 선생(연우진)만이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함으로써 살인 행위에 대한 일종의 서사적 심판을 강행한다. 그 심판으로 인해 엔딩이 지극히 관습적으로 축소된다 하더라도 <파과>는 끝까지 심판에 대한 자신의 소신발언을 굽히지 않는다. 상처 입었다고 해서 타인에게 상처 줄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파과가 맛이 더 좋다 하더라도 상처 난 틈 사이로 침투해 들어오는 세균을 경계해야 하는 것처럼 상처 입은 자들의 내면에 쌓이는 분노의 감각들 또한 경계해야만 한다.

▲조각을 반기는 강아지, 무용. ⓒNEW

우리는 법이 억울한 소시민들의 편에 서지 않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수백억 원대를 횡령한 대기업 임원과 24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 앞에서 법은 이중적 태도를 취했었다. 약자가 아닌 강자들의 편에 선 법의 편향성이 야기하는 복수의 감정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감정이 아닌 사회적 정동이 되어버렸다. 겉모습만 보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평가절하당하는 시대에서 존재의 속사정은 논외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폐기물로 전락해 버리는 존재들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걸까? <파과>의 강 선생에게 주어진 해피엔딩은 절대적으로 신화적이다. 그 엔딩이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되게 하려면 우린 어떤 감각들을 더 발견해 내야 할까?

▲<파과> 메인 포스터.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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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 시나리오,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오이시맨>(2008)의 시나리오를 집필 했으며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 했다. 2019년부터 4년 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와 함께 ‘한국퀴어영화사’ 연작 시리즈를 책임 편집 했으며 『A Collection of Korean Queer Cinema』(2023)를 집필하여 영문으로 출간했다. 현재 영화 평론,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와 창작을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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