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평화를 다시 묻다

[다시! 리영희] 평화네트워크의 대만 탐방기

작년 가을 창립 25주년을 맞은 평화네트워크(대표: 정욱식)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보다 안보를 강조하는 시대적 흐름과 국내외 평화운동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 시민 평화운동의 새로운 방향성과 실천 전략을 모색해야 할 전환점에 서 있었다. 그동안 여론의 주목 여부와 관계없이 한반도 문제, 평화적 군축, 외교 안보의 민주화 등 주요 평화 의제를 끈질기게 제기해 왔지만, 변화된 시대에 응전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과 동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평화네트워크는 최근 전통적인 군사·안보 중심의 평화 이슈를 넘어, 인공지능(AI)과 기후 위기 등 기술과 환경의 영역으로 평화 담론의 외연을 확장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글로벌 위기에 대한 평화적 해법을 고민하는 노력을 해 왔다. 아울러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평화 구상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반도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대만 해협, 일본, 동남아 등과 연결되는 지역적 평화 비전을 모색하고 동아시아의 다양한 긴장 요소들을 포괄적이고 구조적으로 바라보며 지역의 시민사회와 평화적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했다. 우리의 대만 탐방 계획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고, 지난 2월 평화네트워크의 운영위원과 구성원 10명이 새로운 연대와 평화의 상상을 찾아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1. 평화운동의 위기 속에 선택한 대만 탐방

2010년대 이후 북한의 핵무장이 사실상 완성 단계에 이르면서, 국내 여론에서는 평화보다 억지와 방어에 무게를 두는 담론이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2017년을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 간 전략적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사회의 여론 지형에서도 중립적 평화 담론보다는 진영 선택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 과정에서 평화운동은 친북 혹은 반미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히는 현상도 나타났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평화운동은 진보적 가치의 핵심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북한 인권과 핵 문제를 둘러싼 입장차이가 심화하면서 평화운동의 정체성과 통일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평화운동은 '국가안보를 해치는 이상주의'로 묘사되는 경우가 늘어났고, 보수 정권하에서는 제도적·정서적 억압 속에서 더욱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는 평화 담론보다는 실질적인 삶의 안정, 경제적 불평등 해소, 기후 위기 대응 등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평화운동은 그들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부족하다는 인식 속에 세대 간 연결고리가 약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평화운동 관련 보도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자극적인 안보 담론은 소셜네트워크와 유튜브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알고리즘 기반의 정보 환경은 공감과 연대보다는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며, 평화 담론의 사회적 확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평화운동이 직면한 위기의 지점에서 우리는 시야를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확장하기로 했다. 특히 우리와 유사한 지정학적 긴장과 구조적 모순 속에서 평화와 안보를 고민하고 있는 대만의 연구자와 전문가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교류와 연대의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자 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연결된 위기'라는 인식이었다. 대만해협의 위기는 결코 대만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반도의 위기와도 깊이 맞물려 있다는 점을 서로 인식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위기가 단지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 질서를 위협하는 복합적인 문제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대만인들에게 진영 논리를 초월한 새로운 접근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었다. 즉, 미중 간 패권 경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갇히지 않고, 평화와 동아시아 지역 안정을 위한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대만에 도착한 날 국립대만대학교 앞에서. 필자 제공.

2. 대만에서 만난 사람들

대만에서의 여정 중에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고 만난 인물은 타이베이포럼의 수치(蘇起) 이사장, 천수이볜 정부 시기(2000-2008) 8년간 부총통을 지낸 뤼슈롄(呂秀蓮) 여사, 그리고 대만의 주요 일간지인 중국시보의 롄쥔웨이(連雋偉) 부편집장이었다.

1) 수치(蘇起) 선생과의 대화

그중에 타이베이포럼은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한 대만 사회에서 양안(兩岸) 관계에 대한 초당적 컨센서스를 구축하기 위해 설립된 싱크탱크형 시민단체로, 갈등을 넘어 대화와 교류를 도모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수치(蘇起) 선생은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학자로 활동했고, 리덩후이 정부 시기 대륙위원회 주임위원(한국의 통일부 장관에 해당)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국가 안보 정책을 다루었다. 그는 1999년 양안 간 대화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92 컨센서스'라는 개념을 제안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92 컨센서스'는 중국과의 대화를 위한 중요한 기초로 작용했으며, 이후 2008년 마잉주 정부 출범 후에는 국가안보위원회 비서장(한국의 국가안보실장)을 맡아 중국과의 실질적 교류와 협력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수치 선생은 퇴임 이후 타이베이포럼을 창립하여, 국민당과 민진당 양측의 주요 전략가와 연구자들이 정당의 이념을 넘어 머리를 맞대고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내부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힘써왔다. 더불어 그는 베이징과 워싱턴의 주요 인사들과도 비공식적 대화를 이어가며, 지역 평화를 위한 외교적 통로를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들을 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정책 제안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 불신하는 정치 세력 간에 신뢰와 연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정세에 대한 명쾌하고 분석적인 진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견해로 우리에게 큰 통찰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우리가 시도해 보고자 하는 구상을 대만에서 실천해 본 사람이었고 그 과정에서 좌절을 경험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2014년 이후 대만과 중국 간의 대화와 협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반복된 실패 끝에 현재는 "대만이 주체적으로 중국과 협상하여 양안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정치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 양안 간의 직접적인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해졌으며, 오히려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적 협상을 통해 간접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선회한 상태였다.

그는 대만 사회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경제적으로는 개방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폐쇄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대만이 1971년 유엔에서의 퇴출 이후 다자외교의 경험이 부족해 외교적 유연성과 전략이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대만의 외교가 미국, 일본, 중국 등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고, 한국이나 중동 등 다른 주요 지역에 대한 관심과 시야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 간의 갈등이나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현재 대만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미국에만 의존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약화하는 행동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러한 관점이 대만 사회 내에서는 점점 소수 의견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말하며, 그에 따른 좌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진단과 회고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만들고, 평화와 대화의 길이 얼마나 복잡하고 지난한 여정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타이베이포럼 수치 이사장과의 대담. 필자 제공.

2) 뤼슈롄(呂秀蓮) 여사와의 대화

천수이볜 정부 시기 8년간 부총통을 지낸 뤼슈롄(呂秀蓮) 여사는 대만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로, 오랜 세월 여성 인권과 시민 권익 신장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이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유학한 그는, 대만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장기간 투옥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으로 그는 민주주의를 대만의 핵심 정체성이자 가장 소중한 사회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 부총통 재임 중 그는 민주태평양연맹 등을 창립하며 일본, 한국, 태평양 도서국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연대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와의 면담을 기획하게 된 배경은, 뤼슈롄 여사가 최근 '민간 국시회의(民間國是會議)' 운동을 주도하며 대만 사회의 심화된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활발히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 정치권을 넘어선 제3의 시민 정치 플랫폼 구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만 사회가 당파적 갈등을 넘어서는 통합의 정치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양안 문제에 있어서,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집권 여당인 민진당의 입장과는 차별화된 견해를 지속적으로 제시해 왔으며, 이로 인해 현재는 당내에서 일정 부분 소외된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뤼 여사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낡은 프레임이 대만 사회에서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진단하며, 양안 관계의 평화적 해법으로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한 '하나의 중화'라는 대안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일방적인 통일이 아닌, 상호 존중과 협력에 기반한 '통합(integration)'의 관계 설정을 강조하는 것으로 양안 간 새로운 대화의 틀을 모색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중도적 담론은 일정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민진당과 베이징 양측으로부터 외면받으며 한계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공론장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정치적 경계를 넘는 새로운 대화의 공간을 열고자 하고 있다. 뤼 여사는 또한 대만이 처한 복합적 외교·경제 환경 속에서 지속 가능한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산업 하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한국과 일본 등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 다각적인 외교 및 경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생존 전략을 넘어, 동아시아 민주주의 국가 간의 공동 비전과 실질적 연대를 통해 지역의 평화와 안정, 지속가능한 발전을 함께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의 제안은 동아시아 시민사회가 민주주의, 평화, 지속가능성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미래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전략적 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뤼슈롄(呂秀蓮) 여사와의 대담. 필자 제공.

3) 언론인 롄쥔웨이(連雋偉) 선생

롄쥔웨이(連雋偉) 선생은 대만의 대표적 일간지인 중국시보의 부편집장으로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대만대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로 대만 정치와 양안 관계에 대해 오랜 기간 현장에서 관찰해온 인물로, 날카로운 통찰과 균형 잡힌 시각이 돋보이는 언론인이다. 특히 중국의 내정과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이론적 분석과 더불어 생생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그가 몸 담고 있는 중국시보는 10여년 전 중국 자본이 유입된 후 대만 사회에서 친중 언론으로 비난받고 있는 언론사이지만, 중국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적 자원과 네트워크를 축적하고 있다.

그는 현재 대만이 직면한 가치관 혼란과 정치적 양극화의 현실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지난 8년간 집권해 온 민진당이 성소수자 권리, 노동권, 언론 자유 등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한편, 대중국 정책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이념적으로 착란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만의 시민사회에서 '평화'나 '중국과의 대화'를 언급하는 목소리는 쉽게 친중 세력으로 낙인찍히며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실제로 최근 대만 내에서 반전(反戰)이나 평화적 접근을 주장한 학자들이 "중국에 굴복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여론의 공격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양안 간 인적 교류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대만 청년 세대는 중국을 낙후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중국에 입국하면 체포될 수 있다는 불안감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의 단절을 우려하며, 대만의 언론이 중국과의 민간 차원의 교류 확대를 통해 오해를 줄이고 상호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와 학술, 인적 교류를 재개함으로써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양안 평화의 실질적 기반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030~2031년이 양안 관계에 있어 가장 민감하고 불안정한 시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대만 독립 문제가 다시 정치적 의제로 부상하면서, 민진당이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그러나 롄 선생은 대만과 중국 사이에 실질적인 전쟁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만이 중국과의 갈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정치적 선언보다는 문화적, 학술적 접점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 외교가 더욱 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절묘한 균형을 추구하는 전략이 대만에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언론이 보다 적극적으로 국제 정세를 전달하고,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이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만 시민사회가 이념적 반감만이 아닌 실질적 정보와 통찰을 바탕으로 양안 관계를 재인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언론의 공적 책임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시보에서 롄쥔웨이(連雋偉) 부편집장과 미팅 중에. 필자 제공.

3. 대만의 싱크탱크와의 대화 속에서 건져낸 동아시아 평화의 길

우리는 여정 중에 민주진보당 중국사무부, 국민당 국제사무부 및 대륙사무부, 국방안전연구원, 푸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센터, 국립정치대 국제관계연구중심 등을 방문했다. 정당과 정부 산하의 싱크탱크와 대학의 싱크탱크를 각각 방문하여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방문한 대만의 싱크탱크들은 대체로 대만 해협에서 단기적 무력 충돌의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했다. 현재 중국은 경제적 문제, 인민해방군의 내부의 문제 등으로 인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하기에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는 것이다. 시진핑 정부 역시 전략적 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영향력 확대와 내부 안정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동아시아 시민사회는 대만 해협 정세의 변화 가능성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이 지역의 안정성과 평화 질서 유지를 위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전쟁을 막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균형뿐 아니라, 시민사회 간의 상호 이해와 신뢰 구축, 민간 교류의 확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국민당 집권기인 2008년부터 2016년 사이에는 약 400만 명 이상의 중국 관광객과 4만 명에 달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대만을 방문하며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법치주의의 문화를 경험했다. 이들은 대만의 TV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적인 정부 비판과 자유로운 언론 환경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는 중국 내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경험은 단지 교류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 내 ‘제도 경쟁’을 통해 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대만 사회는 정치적 민감성으로 인해 '중국과의 대화'나 '평화'라는 담론조차 친중적 시도로 오해받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시민사회는 정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문화와 학술, 인적 교류를 통해 평화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열어가야 할 책무를 지닌다.

2027년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동아시아 평화의 관점에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첫째는 시진핑의 정치적 의도이며, 그의 권력이 안정될수록 무력사용의 필요성은 줄어들 수 있다. 둘째는 중국군의 실제 군사력이다. 대만 국방부는 현재 중국군이 대규모 상륙 작전을 수행할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셋째는 군사작전 실행의 현실성과 그로 인한 국제적 후폭풍이다. 중국 내 전문가들 역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하며, 전쟁이 중국의 경제 현대화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대만 점령 이후 2천만 명 이상의 적대적 주민을 통치해야 하는 부담과 도시 게릴라전 양상 또한 현실적인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2030년대에 접어들면 인민해방군이 대만 점령 능력을 일정 부분 갖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만 해협의 복잡한 지형, 해안선 중심의 도시 구조, 상륙 작전의 고난도 등을 감안하면, 대규모 군사작전은 여전히 높은 위험을 수반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개입 여부가 향후 동아시아 안보 환경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평화네트워크와 같은 시민사회 단체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중심의 억제 전략을 넘어, 시민사회 주도의 교류 확대, 민주주의 가치의 공유, 상호 이해와 신뢰 구축이 필수적이다. 대만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과제를 함께 인식하고, 협력적 질서 구축에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 시민사회가 공동의 비전과 전략을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민주진보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필자 제공.

4. 평화운동을 위한 리영희의 사상적 유산을 떠올리며

대만에서 평화와 안보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평화' 혹은 '중국과의 대화와 협상'을 언급하는 것이 대만 여론 지형 안에서 얼마나 큰 정치적 민감성을 동반하는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평화적 접근이나 반전 담론은 종종 "친중"이라는 낙인과 함께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었고, 이는 대만 사회에 반중 정서가 상당히 고조되어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결코 대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중국을 일방적으로 위협적 존재, 혹은 타자로 고정해버리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으며, 그 결과 중국 문제에 대해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토론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공과 반중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적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리영희 선생의 사상적 유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신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념 대결이 강화되는 시대에, 리영희가 보여준 사유의 태도와 윤리는 다시금 소환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순한 이념적 진영 선택이 아니라, 세계를 역사적·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사유할 것을 강조했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공론장의 역할임을 역설했으며, 악마화도 신격화도 아닌, 타자에 대한 균형 있는 인식이야말로 지식인의 자세라 말했다. 중국을 단일한 고정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고, 그 내부의 다양성과 역사성을 함께 보는 관점이 그의 지적 유산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외교와 안보, 세계 인식에 있어 주체성을 상실한 채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미중 사이에서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전략 속에 편입되어 움직이는 구조는 동아시아 국가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문제이자,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도 실현되기 어렵다.

오늘날 외교와 안보 담론이 진영 논리와 국가 중심의 이익 계산에 함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동아시아 시민사회가 신냉전적 질서 속에서 다시금 이념을 넘어선 사고를 복원해야 한다. 민중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율성이 담보된 외교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사상 자원이 복원되어야 한다. 우리는 대만에서의 여정 중에 이러한 지적 유산을 대만의 시민사회, 그리고 동아시아의 시민사회와 공유할 필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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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재단에서 대만 탐방 결산 회의.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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